‘백설공주’에 나오는 마녀의 거울은 어쩌면 이번 총선 결과를 미리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독이 든 사과가 백설공주를 쓰러뜨렸듯이 가격이 폭등한 사과가 4·10 총선에서 여당을 참패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달랑 사과 하나 때문에 여당이 총선에서 졌다는 건 지나친 확대해석일 수 있다. 하지만 사과값이 폭등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달랑 사과 하나’라는 소리는 목구멍 뒤로 다시 쑥 들어갈 수밖에 없다.
1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보자. 사과값 폭등 가능성에 대한 경고음은 이미 이때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봄날 기온이 이상했다. 제대로 된 꽃샘추위도 없이 기온이 급격히 오르면서 사과 꽃이 일찍 폈다. 그러더니 기온이 뚝 떨어졌다. 너무 빨리 핀 꽃은 열매가 채 맺히기도 전에 축 처져버렸다. 한 농업 전문지는 지난해 5월 10일 ‘갑작스러운 4월 이상 저온, 전국 냉해 피해 속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전국 냉해 피해 면적이 6343㏊에 달하고 이 중 사과 재배지의 피해가 가장 크다고 했다.
냉해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6월에는 잦은 비와 고온으로 과수화상병이 확산했다. 세균의 공격을 받은 사과나무들이 타들어가듯이 시들다가 하나둘 고사했다. 8월에는 태풍 ‘카눈’이 덮쳤다. 강풍과 물폭탄이 과수 농가를 초토화시켰다. 사과뿐 아니라 배·복숭아 등도 시들고 썩고 뭉개졌다.
해외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봄을 거쳐 여름으로 가는 내내 세계 각지에서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경고가 수시로 나왔다. 세계 식량 창고인 남아시아에 폭염이 강타하면서 쌀·사탕수수·밀은 물론 국산 과일의 대체재 역할을 할 각종 과일의 작황이 엉망이 됐다. 과일값 폭등의 시한폭탄은 조용히 째깍거리는 게 아니라 거친 굉음을 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경고의 신호가 계속해서 쏟아지는 동안 정부는 어떤 대응책을 마련했던가. 생각나는 건 식품 기업이나 유통 기업을 수시로 불러 물가 관리에 협조하라는 요청(이라 쓰고 엄포라고 읽는)을 한 것과 가공식품 물가 담당 사무관을 지정한 것 정도다. 이상기후의 영향으로 사과를 비롯한 주요 과일 가격의 오름세가 어느 정도 될지, 그 오름세가 다른 물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 각 대체재를 언제 어떻게 얼마나 확보해 시장에 풀 것인지 등에 대한 세심한 시나리오는 보이지 않았다. 물가에 대한 국민 불안이 정부 정책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진지하게 우려하지도 않았다. ‘달랑 사과값 하나도 관리 못 하는’ 정부라는 불신이 생기는 순간 정부의 다른 정책에 대한 국민 신뢰도도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선거 직전 할인 쿠폰을 풀기는 했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억울할 수 있다. 이상기후로 인한 농산물 가격 관리의 실패는 이전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정부 때도 배추·양파·마늘 가격 등이 널뛰기했고 농민들은 애지중지 키운 농작물을 갈아엎었다. 하지만 전 정부의 실정이 현 정부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사과값 폭등 과정을 반추하면서 중장기적 대응책 수립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이달 12일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회의 직후 기자 간담회에서 내놓은 답변이 인상적이다. 이 총재는 사과 등 농산물 가격 상승에 대해 “이제 근본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때”라며 “기후변화 등 때문에 생기는 구조적인 변화에서 우리 국민의 합의점이 어디인지 등을 생각해봐야 하는 시점”이라고 했다.
농산물 가격을 오케스트라처럼 관리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한 지 오래다. 산지 관리만의 문제도 아니고 물가 정책만으로 해결할 수도 없다. 유통 구조만 탓할 게 아니라 유통 기업들의 물량 확보 현황과 계획에 오히려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상기후에 대응할 기술 개발과 상용화도 시급하다. 사무관의 압박성 전화보다 애그테크 기업의 발 빠른 대체재 발굴·수입이 더 효과적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생산량과 품질 수준 변화를 예측하는 프로그램을 더 정교화해야 하고 스마트팜과 같은 기술 기반의 생산 방식도 늘려야 한다. 올봄 사과 꽃이 피기 시작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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