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의 사무소와 로비스트들이 밀집한 워싱턴DC의 K스트리트가 요새 가장 주목하는 것은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서 규정하는 해외우려단체(FEOC) 발표 시점과 구체적인 내용이다. 미 정부는 IRA에서 배터리 부품이나 광물을 FEOC에서 조달하는 것을 금지하는데 당장 내년부터 시행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세부 지침을 내놓지 않고 있다. 완성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금 당장 (세부 지침이) 나온다고 해도 준비할 시간은 불과 3개월”이라면서 “큰일이 눈앞에 닥치는 데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FEOC 세부 지침 발표가 늦어지는 이유를 두고 ‘미 정부가 불가능한 목표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나온다. 미국은 지난해 IRA 백서에서 중국·러시아·이란·북한이 소유·관할·통제하는 기업을 FEOC로 지정하고 이를 명확히 구분할 세부 지침을 내놓기로 했다. 하지만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공급망을 구축하기 어려울 뿐더러 공급망 안에 있는 모든 기업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한 통상전문가는 “만약에 배터리 부품이나 광물 공급망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는 중국 기업이 FEOC에 포함될 경우 미국 완성차 업계까지 줄줄이 공급망이 무너지는 사달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미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든 FEOC 세부 지침을 내놓겠지만 후폭풍 역시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기업들 입장에서는 1~2차 협력 업체까지는 어느 정도 공급망이 통제 된다 해도 그 이상으로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거래하는지 알 길이 없다. 자신도 모르게 FEOC로 지정된 중국 기업과 협력하고 이 배터리가 미국 완성차 업체에 공급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최근 중국 기업들이 ‘IRA 우회로’로 한국 및 외국 기업과의 합작 투자 등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 역시 언제든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배터리 업계의 한 고위 임원은 “미국의 고율 관세를 피해 동남아에서 우회 수출을 한 중국 태양광 패널 업체들이 미국 정부에 줄줄이 적발됐다”면서 “우리 기업들도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공급망을 점점 더 보수적으로 구축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생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거세지는 대중 견제 정책이 우리 기업들의 경영에 이처럼 막대한 불확실성을 안기는 것은 전기차와 배터리 영역뿐만이 아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반도체 장비 통제가 우리 기업들에 생존이 달린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중국으로의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 유입을 차단하면서 중국 내 공장을 운영하는 한국과 대만 기업들에 대해서는 1년 유예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유예 기한을 한 달도 앞두지 않은 현시점까지 유예를 연장할지, 연장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한미 간에 이와 관련한 긍정적인 논의가 오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간 갈등은 앞으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중국 화웨이의 신형 스마트폰 메이트 60프로에 SK하이닉스의 메모리반도체가 탑재된 것을 두고 SK하이닉스가 미중 갈등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처럼 전방위로 미국의 대중 견제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미국 정부의 입만 쳐다보고 있기 보다는 선제적으로 우리 기업의 목소리를 강력히 미국에 전달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 기업들 없이는 미국의 IRA도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IRA 시행 1년간 외국 기업들 중 한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액이 유럽연합(EU), 일본보다 많은 1위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상교섭본부장을 역임한 여한구 피터슨국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미국의 IRA에 한국 기업이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는 점, 지나치게 세세한 대중 규제가 미국까지 어려움에 빠질 수 있게 한다는 점을 미국 정부에 적극적으로 어필해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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