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마다 콩알 만한 점이 알알이 맺혔다. 무수한 점은 바탕색과 경계를 이루며 배의 형상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얼굴을 완성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즐겨봤던 ‘매직아이’ 마냥, 볼록한 점들로 가득 찬 그림은 한 발짝 두 발짝 떨어져 봤을 때 비로소 한 꺼풀 너머 존재했던 형체를 서서히 드러낸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가려진, 혹은 외면받아 온 누군가의 기억과 역사는 그렇게 발견되고, 복원된다.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호주 작가 다니엘 보이드의 개인전 ‘보물섬’은 이처럼 독특한 점묘법을 통해 작가의 자기 존재, 그리고 세계를 향한 고찰을 펼쳐 보인다.
다니엘 보이드에게 ‘점’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다. 정형화된 하나의 관점이 아닌, 다양한 시선과 이해를 의미한다. 작가는 이미 칠을 한 그림 위에 투명색 풀(glue)로 점을 찍거나 그 점 위에 색을 얹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투명한 점들’이 오히려 작품 밑그림의 일부를 가림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더 적극적으로 그 점 너머의 의미를 찾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실된 무엇을 복원하고자 하는 보이드의 작품 세계는 그의 태생적 뿌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외지인(유럽인)으로부터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핍박당해야 했던 호주 원주민의 후예인 그는 호주의 탄생 배경에 대한 낭만주의적 개념을 경계하고, 서구의 일방적 역사관이 놓친 시선에 주목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총 24점의 작품이 소개됐는데, 작가의 가족과 조상을 담은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흑백의 점들 너머 두 남자의 형체가 보이는 그림 ‘Untitled(GGASOLIWPS)’은 1928년경 세계 최대의 산호초 지대인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탐사에 참여한 작가의 증조부 해리 모스만과 폴 섹스턴이라는 인물이 함께 찍힌 사진을 옮긴 것이다. 모스만은 호주 정부가 원주민 어린이를 강제로 가족과 분리시킨 정책의 희생자를 지칭하는 ‘도둑맞은 세대’에 속한다. 가족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바탕으로 자기 정체성은 물론이요 역사적 서사의 확장을 꾀하려는 의도는 전통춤 공연을 준비하는 누나, 할머니의 초상, 고향의 풍경을 묘사한 작품 속에도 녹아들었다.
보이드의 작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는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보물섬’이다. 그는 일찌감치 문학과 영화, 각종 대중문화에 담긴 호주 또는 원주민의 역사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어떻게 해석돼 왔는지에 주목하며 영국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내러티브를 담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을 작업의 핵심 소재로 차용해 왔다. 호주 대륙을 발견한 제임스 쿡 선장과 조셉 뱅크스 경을 약탈자인 ‘해적’으로 재해석한 초기 연작 ‘No Beard’(2005~2009)가 대표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소설 ‘보물섬’에 언급된 보물섬 지도, 이 책을 쓴 스티븐슨의 초상과 함께 스티븐슨이 한때 사용했던 접시를 표현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24점 중 23점의 작품명이 ‘무제(Untitled)’다. 유일하게 이름이 달린 것은 영상 작품인 ‘리버스(RIVERS)’다. 움직이는 수많은 점 사이로 강이 흐르는 모습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는데, 영상 속 점은 별, 우주의 입자 같은 세상의 근원적인 존재들을 의미한다. 역사를 보는 방식도 시대의 흐름, 인류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간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담겼다. 8월 1일까지.
/송주희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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