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의 후 손이다. 아니 호모 사피엔스다. 어느 순간 지구의 지배자가 됐 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우주 는 135억년 전 만들어졌고, 38억 년 전 지구 생물이 탄생했으며, 250만년 전 최초의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등장했지만, 호모 사피 엔스가 등장한 것은 겨우(?) 15만년 전이었다.
10만년 전 지구라는 평원에는 호모 사피엔 스(동아프리카)를 비롯해 호모 에렉투스(동아 시아),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유럽과 서아시 아), 호모 솔로엔시스(인도네시아) 등 적어도 여섯 종의 인간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다른 동물에 비해 뇌가 크고 직립보행을 하 며 도구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다른 종에 비해 뒤늦게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 는 다른 인류를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멸종시 킨 뒤 빠른 속도로 지구의 지배자로 떠오를 수 있었다.
“7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한 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 만 년에 걸쳐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사피엔스는 세 개의 혁명을 통해 지구와 생명체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약 7만년 전에 일어난 인지혁명과 1만2,000년전에 발생한 농업혁명, 500년전에 시작된 과학혁명이다. 그것은 막강한 힘을 발휘했다. 저자의 말처럼 “이야기를 지어내 말할 줄 아는 사피엔 스의 방랑하는 무리는 동물계가 이제껏 만들 어낸 것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인지혁명, 지구의 지배자가 되다
우리는 이런 ‘빅 히스토리(Big History)’를 다룬 책을 잘 알고 있다. 이미 접한 적도 있다. 칼 세 이건의 ‘코스모스’에선 우주와 생명의 탄생, 재 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선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선 생명의 탄생과 진화를 목격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어떤 면에서 이 책들과 DNA가 같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극 찬하고, 페이스북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가 북 클럽에서 함께 읽고 싶은 책으로 추천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던지는 질 문은 다르다(근본적으로는 같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가 된 힘은 우선 인지혁명에서 나왔다. 인지혁명은 약 7만년 전 부터 3만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무엇이 이것을 촉발 했는지 잘 모르지만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 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를 바꿨다. 저자는 이 것을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라고 부른다.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보다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불을 지배했고 무엇보다 의사소통을 하는 모든 동물과 차원이 다른 언 어를 구사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뒷 담화’와 ‘허구’다. 사피엔스의 언어가 다른 동물 (심지어 다른 인류)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다른 사람의 얘기를 전하고(뒷담화) 존재 하지 않는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는(허구) 힘이었다. 이 힘이 신화와 종교를 탄생시키고 견고 한 공동체를 완성했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 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사피엔스가 약 7만년 전 획득한 능력은 몇 시 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주었다. (…) 허구 덕분에 우리는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의 창세기, 호주 원주민의 신화, 현대의 민족주의와 같은 공통의 신화를 짜낼 수 있다. 그런 신화들 덕분에 사피엔스는 많은 숫자가 모여 유연하게 협력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농업혁명, 불행의 시작인가?
농업혁명이 어떻게 인류를 발전시키고 문명을 변화시켰는지를 가장 흥미롭게 다룬 책은 재 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다. 유발 하라리 역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으로 이 책을 거론했다. 그런 만큼 농업혁명을 다룬 부분은 재 레드 다이아몬드의 주장과 겹친다. 오늘 서평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이 총, 균, 쇠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정도다.
“중동, 중국, 중미에서 일어난 농업혁명이 호주, 알래스카,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나지 않 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대부 분의 식물과 동물 종은 작물화나 가축화에 맞 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 조상들이 잡거나 채취했던 수천 종의 동물과 식물 중에 농업과 목축업에 맞는 후보는 몇 되지 않았다. 이들 종은 특정 장소에서 살았고, 그 장소들이 바로 농업혁명이 일어난 지역이다.”
하지만 저자가 볼 때 사피엔스의 농업혁명 은 인류의 축복이 아니라 재앙에 가까웠다. 인류는 농업혁명을 통해 식량의 총량을 확대했다. 수렵채집의 시대에선 불가능했던 여분의 식량을 갖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인구 폭발과 ‘일하지 않는’ 엘리트를 낳았다. 늘어난 인구를 통제하는 강력한 무기는 종교, 계급, 권력 등 허구의 신화들이었다.
평균적인 농부들은 평균적인 수렵·채집인 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그렇다고 식사가 훨씬 풍족해진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불확실한 미래까지 준비해야 했다. 농업의 발달은 부의 증가와 정착생활로 이어졌다. 그 결과, 사람 들은 돈을 맹신하게 됐다. 인지혁명 때 만들어 진 상상의 질서가 더욱 확대되고 견고해졌다. 유발 하라리는 이런 메타포를 남겼다.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규정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과학혁명, 사피엔스에서 사이보그로
책 제목이 사피엔스이다 보니 많은 책 소개와 서평이 호모 사피엔스, 특히 인지혁명 부분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은 과학혁명이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하다. 수만 년 전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며 우리의 운명과도 직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와 생명을 이해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훨씬 과거로부터 시작됐다. 인지혁명 이후 선조들은 자연과 세계를 지배하는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과 소기의 성과도 달성했다. 하지만 과학혁명은 과거의 모든 전통 지식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인류가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가장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다.
인류가 과학혁명을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된 원동력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라는 일종의 역설이다. 거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자핸다. '우리는 모든것을 알고있다'는 집단, 조직, 종교에서 과학은 발전 할 수 없었다. 현대 과학은 무지를 기꺼이 받아들인 덕분에 기존의 어던 전통 지식보다 더 역동적이고 혁명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과학혁명을 통해 그동안 인류가 알지 못했던 문제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떤 문제든 다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예컨대 가난이나 질병, 노화, 죽음은 더 이상 인류의 피치 못할 운명이 아니라 무지의 세계일 뿐이다.
급기야 인류는 죽음까지 조종하려는 단계에 도달했다. 인간과 컴퓨터, 인간과 기계 의 결합까지 시도되고 있다. 성급한 과학자 들은 2050년이 되면 일부 인류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전혀 새로운 인류의 탄생, 혹은 호모사피엔스의 죽음 이다. 이제 사피엔스는 신이 되려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과학혁명의 어두운 미래를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생명공학이 네안데르탈인을 정말 부활 시킬 수 있을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막을 내리게 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 우리가 우리의 유전자를 주물럭거린다고 해서 반드시 멸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게 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600쪽이 넘는 책을 일주일 만에 읽었다. 수만 년 전 원시인에서 시작해 미래의 사이보그까지 연결하는 저자의 지적 탐험은 커침이 없다. 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7만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문장은 유려하고 해석은 친절하다. 그보다 더 큰 매력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과 철학적 화두다.
재레드 다이아몬즈의 <총, 균, 쇠>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은 더욱 쉽게 읽힐 것이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책들이 궁금해질 것이다. 이들이 던지는 질문은 비슷하다. 인류는 어디에서 ㅎㅘㅆ는가? 어디로 가는가? 저자들의 지적 호기심과 천재성 덕분에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정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것을 찾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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