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기후 헌법소원 최종선고 관련 기자회견에서 아기기후소송의 청구인 한제아 어린이가 발언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사촌 동생 생각이 났어요.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보람차요."
2022년 아기기후소송을 냈던 한제아(서울 흑석초 6학년) 어린이는 2년 전보다 훌쩍 큰 키로 헌법재판소 선고를 기다렸다. 두 살 된 사촌 동생의 사진을 재판관을 향해 든 채였다. 일부 위헌 결정이 나오자 한제아 어린이는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았다.
31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헌재는 지난 29일 청소년·시민단체·영유아 등이 제기한 헌법소원 4건과 관련해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탄소중립기본법) 제8조 1항에 대해 재판관 9명 전원일치로 헌법불합치 결정했다.
심판 대상이 된 탄소중립기본법 조항은 '정부는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35% 이상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비율만큼 감축한다'는 내용이다. 헌재는 이 조항이 2030년까지 감축 목표량을 제시하고 있을 뿐, 탄소중립 목표 시점인 2050년까지의 나머지 계획은 없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한제아 어린이는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헌재의 결정이 "희망을 열어주는 것 같아요"라며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해당 조항 개정 때) 무엇이 마련되든 그 내용을 지켜야 한다는 약속이 들어갔으면 좋겠어요"라고 밝혔다.
미래세대? 기후위기 현실 사는 어린이들…"야외체육 사라졌어요"
김한나 어린이·헌법을 읽고 밑줄을 그은 모습. 강지윤 기자이번 아기기후소송의 당사자이자 주역인 한제아·김한나(성남 당촌초 3학년) 어린이를 지난주 만났다. 어떤 계기로 이번 소송에 참여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김한나 어린이는 대뜸 헌법책을 꺼내들었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하트와 엄지손가락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김한나 어린이는 "북극곰, 저어새, 검독수리를 좋아하는데 모두 멸종 위기래요. 이상하기도 하고 속상해서 내가 살 세상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헌법책을 읽었는데 우리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래요. 헌법재판소가 인권을 지켜주는 곳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라고 설명했다.
한제아 어린이는 아기기후소송을 냈던 2년 전과 지금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질문에 "그때보다 키가 많이 컸어요. 그런데 평균기온이 올라서 여전히 더워요. 어릴 때는 키가 작아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더 더웠을 텐데"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촌 동생은 두 살이고 키가 엄청 작아요. 저도 더운데 동생은 더 더울 거예요. 아기들이 '오늘 30도래 생각보다 안 덥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라고 했다. 동생 세대가 겪을 미래에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한제아 어린이. 강지윤 기자이처럼 어린이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대기오염, 자연재해 등의 문제를 이미 직접 경험하고 있다. 지금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앞으로는 더 혹독하고 잔인한 기후위기와 마주하고 또 살아가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방관하는 '미래세대'로 남을 수 없었던 이유다.
한제아 어린이는 "더위에 약한 편이라 땀띠가 자주 나요. 꽃가루 알레르기와 아토피도 있는데, 요즘 지구 온난화 때문에 꽃가루가 더 많이 날리잖아요. 기후위기 때문에 더 고생하고 있어요"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올해는 비도 많이 오고 더워서 야외 체육 수업을 거의 못 했어요.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에도 친구들이 덥다고 밖에서 안 놀아요"라며 씁쓸해했다.
2022년 유니세프는 "전 세계 어린이 4명 중 1명은 이미 기후비상사태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2050년에는 전 세계 어린이의 94%가 매년 4~5차례 위험한 폭염 폭염에 노출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헌재는 "이른바 미래세대는 기후위기의 영향에 더 크게 노출될 것임에도 현재의 민주적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제약돼 있다"며 "이런 점에서 중장기적 온실가스 감축계획에 대해 입법자에게는 더욱 구체적인 입법의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현행 감축목표 '합헌' 아쉬움 남지만…"국회도 우리 목소리 들어주세요"
기후위기비상행동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개최한 기후 헌법소원 최종선고 관련 기자회견에서 한제아 어린이가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 첫번째는 김한나 어린이. 연합뉴스정부의 부족한 기후위기 대응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아시아 최초의 기념비적인 결정이 나왔지만 아쉬움도 뒤따른다. 헌재가 2030년 배출량 목표치도 헌법에 어긋난다는 주장은 기각한 데다 감축의 구체적 목표치 설정을 정부의 권한으로만 해석했기 때문이다.
헌재는 우선 2018년 대비 2030년까지 감축해야 할 배출량 목표치를 40%로 정한 같은 법 시행령 제3조 1항이 미래세대의 기본권을 과잉 침해한다는 청구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기각했다. "미래세대에 과중한 부담을 이전하는 것이라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기후소송 청구인 측은 정부의 40% 감축 계획이 탄소예산 관점에서 충분하지 않다며 해당 조항이 설정한 연도별 배출량 목표대로라면 2025년경 탄소예산이 모두 소진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탄소예산은 전세계적인 약속인 파리협정 등에 따라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섭씨 1.5도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 인류에게 허용되는 온실가스 배출 총량을 의미한다. 현세대가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면 미래 세대가 쓸 수 있는 탄소 예산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한제아 어린이는 "(지금 배출 계획을 유지하는 것은) 미래세대의 탄소예산을 빌려 쓰겠다는 건데, 그 사람들은 미래가 되면 사라지고 없잖아요. 빌린 걸 돌려주지 못하면 강제로 뺏어가는 게 아닌가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정부가 '제1차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에서 설정한 부문별·연도별 감축 목표가 위헌이라는 청구인들의 주장은 불과 재판관 한 명 차이로 기각됐다. 재판관 5명은 위헌, 나머지 4명은 합헌 의견을 내면서 위헌 정족수(6명)에 딱 한 명이 부족했다.
4명의 재판관은 정부가 기후위기 완화를 위한 구체적 목표를 나름 합리적으로 정하고 있으므로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반면 다수였던 5명의 재판관은 정부의 계획에 따르면 2030년까지 40%만큼 줄이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므로 부당하다는 취지로 위헌 확인 의견을 냈다.
다만 이들 5명의 재판관도 "각 부문별 및 연도별 배출량 목표의 수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정할지에 대해서는 정부에 광범위한 행정계획 형성의 권한이 있다"고 선을 그었다. 내심 현행 40% 감축 목표치를 헌재가 올려주기를 기대했던 청구인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한제아 어린이의 보호자인 김은제 활동가는 "기쁘면서도 아쉬움이 남죠. 헌재가 입법자의 역할을 많이 열어둔 것 같아요. 정부와 국회가 좋은 기후 대책을 수립하게끔 모두 힘을 모아야겠습니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국회는 헌재 결정에 따라 오는 2026년 2월 28일까지 더 강력한 기후변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김한나 어린이는 "헌법재판소가 대한민국 국민과 지구를 지켜줬어요. 이제 국회와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온 힘을 써줬으면 좋겠어요. 헌법재판소처럼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세요"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