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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투르크, 플러스섬(Plus-sum) 관계 유지 중요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동향분석팀장 지난 6월 10~11일 양일에 걸친 윤석열 대통령 투르크메니스탄 국빈 방문을 계기로 열린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대한민국-투르크메니스탄 간 공동성명을 통해 경제부터 국제 문제, 문화, 인적 교류 등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 협력에 대해 상호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덕분에 그동안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던 투르크메니스탄에 대한 관심은 물론 양국 간 협력 강화로 인한 긍정적 영향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이란,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앙아시아의 자원 부국 중 하나로 매장량 세계 4위 수준의 천연가스 수출을 기반으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실현한 국가다. 더군다나 석유, 유황, 요오드 등 에너지 및 광물 자원이 풍부해 향후 이를 바탕으로 고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뛰어난 잠재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나라다. 우리나라와는 1992년 이미 외교 관계를 수립한 바 있음에도 2007년 전까지는 경제 협력, 인적 교류 등이 활발했었다고까지는 평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2007년 주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 개설, 2008년 정상회담 등을 계기로 발전한 양국 관계는 2008년 11월 호혜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면서 본격적인 교류 기반을 형성한 바 있다. 이후 이번까지 총 3차례에 걸친 국빈 방문을 통해 실질적인 교류와 협력 실천 방안이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오후(현지시간) 투르크메니스탄 아시가바트 대통령궁에서 열린 공식환영식을 마치고 세르다르 베르디무하메도프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구체적으로는 첫 국빈 방문이었던 2014년 6월 열린 정상회담에서는 플랜트, 석유화학 등의 산업 분야에서 경제 협력의 틀이 마련됐고, 2019년 4월에 있었던 두 번째 국빈 방문에서는 기존 에너지 플랜트 분야에 대한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석유화학, ICT, 교통 등으로 협력 분야를 확대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런데 올해 6월 정상회담에서는 약 8건의 협력 문건이 체결되면서 우리 기업의 투르크메니스탄 진출 기반이 한층 강화되는 등 보다 구체적이면서도 민간 부문까지 아우르는 그야말로 실질적인 성과 도출을 기대할 수 있는 합의를 이뤄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실제로 가스전 및 화학공장 설비 협력에 관한 합의서 체결은 에너지 플랜트 분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고, 인프라 및 신도시 협력 MOU를 통해서는 건설·인프라 분야 협력과 관련 인적·물적 교류 활성화를 도모하기로 했다. 또한 무역투자촉진프레임워크(TIPF; Trade and Investment Promotion Framework) 체결로 포괄적 경제 협력 관계로의 격상을 위한 제도적 기반까지 마련된 것이다. 특히 에너지와 플랜트 분야는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더욱 구체화하면서 우리 경제에 직간접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질적 성과 창출이 기대된다. 세부적으로는 현대엔지니어링이 투르크메니스탄 국영가스공사와 세계 2위 규모의 갈키니쉬 가스전 개발 관련 갈키니쉬 가스전 4차 탈황설비 기본합의서를 체결한 것이나 국영화학공사와 키얀리 폴리머 플랜트 정상화 2단계 협력합의서를 체결하는 등 에너지 플랜트 분야에 우리 기업의 진출이 본격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더군다나 양국 간 공동협력위원회 활성화 MOU, 금융기관 간 협력 MOU 등도 함께 체결되면서 투르크메니스탄에 진출하려는 우리 기업에 대한 우호적 여건도 조성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향후 관련 국내 기업들의 시장 기회가 확대됨은 물론, 수출 증대 등 경제 전반에 걸쳐서도 상당한 수준의 실질적 성과를 기대해 볼 수 있게 됐다. 또한 인프라 및 신도시 협력 MOU를 통해 내륙국가인 투르크메니스탄의 철도, 도로, 항공 등 교통망 건설에 우리 기업의 참여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칠곡경북대병원 투르크메니스탄 응급의료지원센터, 종양학 센터 MOU 등의 체결을 통해 보건·의료 분야까지 다방면에 걸쳐 양국 간 교류와 협력이 활성화하고 경제적 관계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술력을 보유한 우리나라와 자원을 보유한 투르크메니스탄의 상호 보완적인 경제구조를 통해 양국 경제의 동반성장이 기대되는 바다. 한편, 통상 현안에 대한 소통 채널로 볼 수 있는 무역투자촉진프레임워크는 양국 간 정부 차원의 협력 강화는 물론 민간 부문의 협력 증진 기반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중장기적으로도 양국 간 실질적인 협력 관계가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며, 중앙아시아 주요국과의 협력 강화로까지 연계된다면 우리나라의 외교적 입지까지 증진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우리나라와 투르크메니스탄과의 협력이 단기적인 성과를 넘어 중장기적 측면에서도 더욱 공고해지고 그로 인한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상호 누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요구된다. 먼저, 양국은 플러스섬(Plus-sum) 관계 유지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천연자원 부국인 투르크메니스탄과 기술 및 산업 강국인 한국은 에너지 및 인프라 산업 부문에서 다양한 협력을 진행하고 있고, 향후 더욱 확대될 것으로도 기대된다. 다만, 지금까지 진행된 협력 과제에 대한 철저한 점검과 모니터링을 통해 발견되는 이슈나 문제점 등에 대해서는 양국이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해결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런 양국의 노력은 현재 진행 중인 협력 건에 대해서는 가시적인 성과 도출을 위한 계기가 될 것이고, 향후 진행될 협력 과제의 순조로운 진행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지금까지의 양국 간 협력이 정부 주도형으로 발전해 왔다면 향후에는 민간 주도형으로 빠르게 전환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양국의 상호 협력 관계가 공고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협력을 넘어 산업계, 학계 등 민간 차원의 협력 관계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정부는 물론 민간 차원에서도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도록 다양한 채널이 구축된 만큼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양국 간 협력이 민간 부문으로까지 빠르게 확대됐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양국은 문화적 사회적 인적 교류 활성화에도 힘써야 할 필요가 있다. 양국 간 협력 관계가 지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이면서도 양적인 교류에서 탈피해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질적 교류의 폭을 넓혀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각적인 노력이 수반될 때 양국 간 관계 증진은 물론이고, 중앙아시아 내 한국의 위상 증진과 이 지역 내에서의 국익 확대까지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2024.06.21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동향분석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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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외교 지평 넓힌 ‘K 실크로드 협력 구상’ 추영민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HK 국가전략사업단 연구교수 일반적으로 우리가 중앙아시아라 일컫는 지역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으로구성돼 있다. 이들은 1992년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이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을 지속해 오고 있다. 우리와 피를 나눈 32만 명의 고려인 동포가 거주하는 지역이자 오랜 교류의 역사, 언어·문화적 유사성 등을 기반으로 우리와의 공통분모를 형성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양 지역 간 활발한 인적 교류도 감지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주어진 물리적 거리는 멀지만, 지난 30년간 많은 접점을 형성하면서 심리적 거리를 좁혀나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첫 해외순방으로 중앙아시아를 선택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지역에 특화된 한-중앙아시아 K 실크로드 협력 구상을 발표했다. 해당 전략은 동행, 융합, 창조라는 3개의 협력 원칙을 바탕으로 에너지·자원(Resources), 개발 협력(ODA), 동반자 협력(Accompany), 그리고 앞선 세 가지 협력을 정부, 기업, 국민 간 유기적 네트워크 구축으로 뒷받침해 나가겠다는 중점과제와 추진체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구상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 적절한 대응이며, 아래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의 외교 지평을 넓히고 한-중앙아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글로벌 중추 국가 연대를 위한 행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분쟁 그리고 미중 전략 경쟁의 심화 등으로 인한 세계 구조의 재편 속에서 한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매우 유사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주도의 진영과 중·러 중심의 진영 간 대립이 지속되면서 주변국들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는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중앙아시아 국가들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두 진영의 대결 추세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 유럽, 중동을 중심으로 많은 국가가 이들 지역에 러브콜을 보내오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간 미국, 일본, 한국 등과 실무 혹은 장·차관급에서 진행됐던 C5 1(중앙아시아 5개국 상대국) 형태의 대화 플랫폼이 최근에는 EU, 중국, 미국, 러시아, 걸프협력회의(GCC) 등과 같은 국가들과의 정상급 회의로 개최되는 양상으로 확대 실현됐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중앙아시아 국가들은자국의 이익에 따라 입장을 표명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중앙아시아 K 실크로드 협력 구상은 전략적 요충지로 재평가받고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변화를 반영해 그간 러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됐던 이들 권역에 대한 접근법을 재정비하고 우리 외교의 집중력을 높인 매우 시의적절한 전략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한-중앙아 국가들은 두 진영 사이에서 마주하고 있는 고민을 함께 풀어나가며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행보는 한국이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유라시아 대륙에서 외교적 지평을 넓혀나가고 자유, 평화, 번영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중심으로 글로벌 중추 국가 연대를 구성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인적·문화적 접점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 협력의 가능성 중앙아시아 지역은 국제사회에서 자원 부국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이번 순방에 포함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원유, 천연가스, 그리고 많은 희귀광물을 보유한 국가들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 국가에는 신성장 산업에 필요한 리튬, 니켈, 코발트 등과 같은 핵심 광물이 매장되어 있어 글로벌 공급망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만큼 이들 지역에 대한 주요국의 관심 역시 증대하고 있다. 2023년 9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주요 광물 대화(C5 1 Critical Minerals Dialoues) 출범을 제안한 바 있으며, 같은 해 11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도 에너지 협력 등을 이유로 중앙아시아를 공식 방문한 바 있다. 한국의 주요 기업들이 포함된 경제사절단과 동행한 우리 대통령의 중앙아 순방, 그리고 동계기 각국에서 개최되는 비즈니스 포럼은 코로나 이후 회복세를 보이는 양 지역의 경제 관계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앙아시아는 고려인의 존재, 한국 문화의 확산, 이주민 증가 등 기존에 다양한 인적·문화적 접점이 형성돼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한국이 이러한 접점들을 경제적 측면으로 확장시켜 더 많은 실질 협력의 성과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볼 수 있다. 단, 현재의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이러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어 나가면서 양 지역이 협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협력의 방식으로서 분명한 제도적 기반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한-중앙아시아 K 실크로드 협력 구상에서 제시하고 있는 한-중앙아 5개국 정상회의 및 한-중앙아 공급망 대화 창설, 한-중앙아 비즈니스 포럼 확대, 차세대 고려인 동포 직업연수 프로그램 개설, 정부초청장학사업(GKS) 확대 등이 향후 성과의 핵심적인 지표가 될 수 있다. 이번 순방을 계기로 한-중앙아 관계가 위기의 순간 속에서도 상호 이해의 접점을 찾아내고 많은 실질 협력의 성과를 이끌어내는 진정한 협력의 동반자 관계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24.06.17 추영민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연구센터 HK 국가전략사업단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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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에 취하다…술과 음악 ◆ 술과 음악가 바흐의 마테수난곡 원본에는 머그잔 자국이 있다. 많은 이들은 바흐가 술을 마셨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데, 라이프치히에 있는 그의 집 방 두 곳이 와인과 증류주를 보관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베토벤도 식사 때마다 와인을 한 병씩 마셨다고 알려져 있으며, 슈만의 스승이자 아내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는 슈만이 항상 술에 취해 논리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안 된다며 딸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피아노의 황제 프란츠 리스트도 꼬냑과 브랜디를 항상 손에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일리야 레핀의 무소르그스키 초상화는 선연한 눈빛과 대조적으로 빨간 코의 무소르그스키 모습을 통해 그가 술과 가까웠음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말 미국 내셔널 음악원의 원장으로 부임한 드보르작 또한 타지생활의 고독과 허전함을 독한 술로 채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말년에 작곡을 거의 안 한 시벨리우스는 그의 술 문제가 작곡활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외에도 모차르트, 베를리오즈,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글라주노프, 에릭 사티 등 수많은 유명예술가들과 술은 그들의 예술세계와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듯하다. 그렇다고 열거된 위대한 작곡가들이 술 없이는 예술활동을 할 수 없었다고 억측해서는 안 된다. 이토록 예술가들과 가까운 술은 음악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음악과 술은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고 고양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프랑스 브르타뉴 대학의 니콜라스 게강(Nicolas Gueguen)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음악소리가 클수록 술의 소비량이 늘어난다고 하며 과음을 피하고 싶다면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곳이 좋다고 한다. 영국의 에이드리언 노스(Ardian North) 교수팀은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실 경우 음주량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술의 맛도 60%이상 높여준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는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실 경우 음악이 뇌의 특정한 부분을 자극해 다른 감각을 인식하는데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술과 음악은 생리학적으로도 여러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술과 음악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하였으며 둘 사이의 공통점들은 무엇일까. 클래식 콘서트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술과 음악의 유래 술과 음악은 우리의 내부(default mode network)를 들여다 보는 동시에 외부와 소통(Task Positive Network)을 유연하게 해주는 매개체다. 모두 우리의 감정기재에 본능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 점에서 둘의 기원이 진화론적으로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인간에게 축적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평론가인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다.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의 선사시대 유적을 당시 사람들은 미술작품이라고 볼 수 있었을까? 그것을 그린 이들을 현재의 우리가 미술가라고 지칭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구석기시대 인들에게 동굴의 황소그림은 작품보다는 미신과 기원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음악 역시 우리가 어떠한 소리를 음악이라고 지칭하기 이전에는 음악가만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음악의 유래는 여러 측면의 기원설이 제기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음악을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동물 울음소리 등을 모방하려다가 발전된 것으로 보고 있고, 어떤 학자는 노동을 쉽게 하기 위해 리듬을 붙이다가 발전하였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주장은 언어를 강조하기 위해 음높이를 조절하다가 발전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사실 음악의 유래는 어떤 한가지 사실로 설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음악은 우리의 어머니들이 뱃속의 아기에게 사랑스럽게 흥얼거리던 소리들이 우리 DNA에 각인되면서부터 시작했을 수 있다. 술의 기원 또한 하나의 사실로 설명되기 힘들다. 먼저 술이 되려면미생물인 효모가 당분을 분해하고 알코올로 발효돼야 하는데 그런 환경이 자연에서 우연히 일어나 인류에게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인류가 썩어가는 과일이 모여있는 곳의 액체 또는 발효된 꿀을 맛보았고 알코올이 함유된 그 액체들의 매력에 빠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음악과 술의 기원은 이렇듯 우연과 필연이 섞여있으며 약간 모호하기도 하지만 둘 다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는 감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들이 있다. 별을 보며 안녕을 기원하던 그 시절, 인류에게는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고 종교의 발생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왔을 것이다. 이후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온 종교는 제의적 행사를 통해 부족의 번영과 안전을 기원하였으며 이때 빠지지 않고 등장한 두 가지는 바로 술과 음악이었다. ◆ 종교 술과 음악은 종교와 함께 발전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특히 종교 탄생의 배경에 술이 한몫했다는 주장도 있다. 자연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발효된 과실 알코올음료를 맛본 인간은 환상과 쾌감, 환각 등의 증세를 보였을 것이고 그것이 신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것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술을 신과 만나는 매개체로 종교행사에 사용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인간이 술을 빚은 역사는 1만 2000년 전 선사시대 유적에서도 발견되었으니 그 역사가 꽤 깊다 할 수 있다. 중동지역의 원시종교는 술에다 물을 타서 신께 바쳤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후 기독교 문명에서 수도원은 양조장 역할을 함께 하기도 했다. 이는 죽음을 각오하며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귀족과 성주들이 수도원에 포도밭과 땅을 기부하고 떠난 영향도 있다. 지역과 기후에 따라 포도재배가 용이한 곳은 와인을, 보리재배가 수월한 곳은 맥주(에일)를 수도사들이 직접 만들었다. 한마디로 술은 종교적이며 신성한 것이었다. 음악 역시 종교행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기원전 3500년전의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문명은 제례음악에 류트나 리라, 하프 등을 사용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당시 벽화나 도자기, 고대 이집트의 오래된 사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세시대에는 성가가 교회음악에 큰 역할을 하였는데 이후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마드리갈(Madrigal-세속 성악곡) 등으로의 발전하여 서양음악의 기초를 만들었다. 바로크 시기에 이르러서는 악기의 발전과 더불어 성대한 미사음악과 종교음악들(칸타타, 오라토리오)이 음악의 발전을 이끌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J.S.Bach)는 교회의 칸토르(Kantor) 즉 예배음악의 지휘자였으며 모차르트도 한때 짤스부르크의 교회에 봉직하였고, 사계로 유명한 비발디 또한 교회의 사제였다. 이렇듯 술과 음악은 종교를 통해 발전하였으며 지금도 계속 진보하고 다양화 되어가고 있다. 한편 이런 술과 음악은 종교 이전 고대 축제형식으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술과 음악의 신 디오니소스 축제가 바로 그것이다. ◆ 디오니소스 축제 고대 트라키아의 민간신앙으로부터 출발한 디오니소스 신앙은 이후 그리스로 흘러 들어가 대규모 축제형식으로 발전되었다.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의 12신들 중 하나이며 로마신화에서는 바쿠스(Bacchus)로 불리는 술과 음악의 신이다. 아폴론도 음악의 신이지만 성향은 다르다. 아폴론이 조형적이며 이성적인 음악의 신이라면 디오니소스는 본능적이고 감성적인 음악의 신이라 할 수 있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기원전 13세기경 디오니소스 신앙의 숭배의식으로 광란적이며 극단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기원전 7,8세기경부터는 대 디오니시아(Great Dionysia), 즉 공식화된 디오니소스 축제가 되면서 점차 순화되기 시작하였다. 고대 아테네의 황금시대에 디오니소스 축제는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합창과 연극 등 다양한 공연을 통해 사회를 풍자하는 철학적인 행사가 되었다. 오늘날 연극공연의 기원을 이 디오니소스 축제로 보기도 하며, 크게 보면 연극과 음악이 결합한 오페라의 등장도 디오니소스 축제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술을 통해 광란의 장이었던 축제가 세월이 지나면서 현대예술의 시초가 된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부활의 신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 앞 철자 디오(Dio)는 다시라는 뜻으로 인간 어머니 세멜레(Semele)의 뱃속에 있다가 다시 아버지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나고, 헤라 여신의 질투로 죽었다가 다시 제우스의 어머니 레아(Rhea)에 의해 부활한 기구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술과 음악 그리고 예술을 통해 새로운 시작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디오니소스 축제가 우리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주량을 조절하여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더욱 강해지기를 원했다. 술과 음악은 적당하면 에너지를 얻지만 지나지면 중독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과유불급과 중용의 덕목 또한 중요하다. 적당한 술과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탈무드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술 마시는 시간을 낭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시간에 당신의 마음은 쉬고 있으니까. ☞ 추천음반 술과 관련된 음악은 기악곡보다는 주로 가곡과 오페라 축제나 무도회 장면에 등장한다. 주당이었던 영국의 작곡가 헨리 퍼셀(Henry Purcell)의 I gave her cakes and I gave her ale이라는 노래는 1690년경쯤 작곡된 다소 장난스러운 술자리를 묘사한 작품이다.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오페라 La Perichole의 웨딩씬에 나오는 Ah! Quel diner도 여인이 술에 취한모습을 노래하는 장면이다. 조안 서덜랜드(Joan Sutherland)의 목소리가 실감난다. 모차르트의 돈 지오바니(Don Giovanni)에도 Finchhan dal vino(샴페인의 노래)라는 곡이 있다. 베르디 라트라비아타의 축배의 노래(brindisi)는 대중적으로 유명하다. ◆ 김상균 바이올리니스트 서울대 음대 재학 중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비엔나 국립음대와 클리블랜드 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 최우수 졸업. 이 후Memphis 심포니, Chicago civic오케스트라, Ohio필하모닉 악장 등을 역임하고 London 심포니, Royal Flemisch 심포니 오디션선발 및 국내외 악장, 솔리스트, 챔버연주자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email protected] 2024.06.14 김상균 바이올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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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장의 앨범만으로 전설이 된 일본 ‘시티 팝’의 원류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 나왔던 곡들이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야 자신들의 호시절을 회상하는 의미에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 노래들은 세계로 뻗어 나가면서 뒤늦게 전지구적 관심을 받게 된다. 국내 사정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일본 문화가 정식 수입되기 이전인 80년대 한국에서의 경우 정작 현재 시티 팝으로 분류되는 곡들과는 별개의 일본 음악들(이를 테면 안전지대나 콘도 마사히코 같은 것들)이 주로 인기를 끌었다. 국내에서도 이 열기는 뒤늦게 도착한 셈이다. 시티 팝이라는 명칭 보다는 뉴 뮤직이라는 명칭이 앞서 존재했다. 시티 팝이라는 단어 자체가 90년대부터 통용되던 말이기는 하지만 이 단어는 장르의 부활과 함께 마치 2000년대의 시각에서 버블경제 황금기를 관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90년대 무렵 국내에도 미국의 여피(Yuppie) 바람 때문인지 뭔가 도회적 분위기의 CF나 영화들(이를테면 안성기와 강수연 주연의 그대 안의 블루)같은 것이 많이 나왔다 회고되는 것과 비슷했다. 여름 행사의 대표격인 워터밤 페스티벌에서 관객들이 시원한 물줄기를 맞으며 환호하고 있다.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대체로 시티 팝이라 분류되는 것들은 퓨전 재즈나 미국의 AOR에서 영향 받은 일본의 7, 80년대 음악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정의됐다. 사실 AOR이라는 장르 자체의 경계가 모호하기도 한데, 시티 팝의 경우 보다 일본적인 색깔이 두드러지는 편이었다. 대체로 곡들은 부드럽고 능숙하게 연주된, 그리고 깔끔한 레코딩으로 마무리되어 있는 외형적 특색이 있었다. 다양한 시티 팝 아티스트들이 존재하고 그것의 시작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분류와 정의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슈가 베이브가 일본 시티 팝의 그라운드 제로라 칭해진다. 슈가 베이브는 밴드로써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일본 팝/록음악의 지형을 영원히 바꿔 놓았고 이후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 중요도가 인정됐다. 오히려 시티 팝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슈가 베이브에 대해 다소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들의 사운드는 스틸리 댄이나 토토 보다는 캐롤 킹과 핍스 애비뉴 밴드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60년대 팝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기 때문에 밴드가 등장했던 70년대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시대에 뒤쳐진 것처럼 감지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들에게 있어 시대성은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슈가 베이브의 야마시타 타츠로는 인터뷰에서 슈가 베이브의 데뷔 앨범이 발매된 40년 전부터 자신이 생각했던 목표는 오래되지 않은 음악, 시대를 비추지 않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라 말했던 바 있었다. 슈가 베이브는 시티 팝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인물들인 야마시타 타츠로와 오오누키 타에코, 거기에 무라마츠 쿠니오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해갔다. 알려진 대로 야마시타 타츠로는 이 분야에 있어 전설적 존재가 됐고, 오오누키 타에코 또한 아라이 유미, 요시다 미나코와 함께 뉴 뮤직 3인방으로 군림했다. 무라마츠 쿠니오의 경우에도 애니메이션 명탐정 홈즈와 란마 1/2의 주제곡을 작곡하는 등 꾸준히 음악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이 세 사람만이 그대로였고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여러 연주자들이 교체됐다. 1972년 무렵 대학생이던 야마시타 타츠로는 주로 비치 보이즈의 커버곡으로 구성된 자주 제작 앨범 Add Some Music to Your Day를 록 카페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작곡을 만들어 보자는 의미에서 1973년도에 슈가 베이브를 결성했다. 1974년 4월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고 앨범제작이 결정되면서 9월부터 리허설을, 그리고 10월부터 녹음을 시작했다. 미국적이고 보다 선명한 녹음 방식을 채택하려 했는데 당시 일본의 메이저 회사에서는 이런 방식들이 용인되지 않았고 결국 인디에서 음반을 발매했다. 슈가 베이브는 야마시타 타츠로와 오오누키 타에코의 절묘한 밸런스가 매력적이었으며 각각이 별개의 곡을 만드는 남녀 혼성 그룹이기도 했다. 꾸준히 라이브 활동을 했지만 포크나 블루스 록이 인기였던 그 무렵, 일본적인 정서가 가미된 슈가 베이브의 세련되고 상쾌한 팝 사운드는 트렌드와는 차이가 있었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해피 엔드의 오오타키 에이이치의 레이블 나이아가라와 계약하면서 슈가 베이브의 1975년도 데뷔 작 Songs는 나이아가라의 첫번째 앨범이 됐다. 하지만 이는 당시 분위기와 너무나도 달랐고 앨범의 판매 또한 부진하면서 단 한 장의 정규 앨범만을 발표한 이후 밴드는 1976년도에 해체한다. 이미 모두가 알다시피 야마시타 타츠로는 후에 솔로 아티스트로 큰 성공을 거두고 오오누키 타에코 또한 동료였던 야마시타 타츠로와 사카모토 류이치의 도움으로 성공적인 솔로 데뷔를 하게 된다. 시간이 조금 지나 1990년대 무렵 다시금 일본 내에서 시티 팝이 급부상하면서 슈가 베이브의 중요도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밴드활동이 종료된 지 거진 20년만에 새롭게 인정받는 분위기가 형성됐는데 90년대 무렵 일본에서 쏟아졌던 시부야 케이에 영향을 주면서도 알려졌다. 이 무렵부터 슈가 베이브는 일본 음악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특히 Show나 밴드 최고의 히트곡 Down Town의 경우 일본의 여러 방송 시그널로 활용되면서 익숙해졌다. Show의 경우 각 악기의 심플한 리듬 패턴을 쌓아 올려내면서 복합적인 그루브를 만들어냈고, Down Town은 악기의어레인지와 멜로디, 그리고 분위기적 측면에서 미래의 시티 팝 사운드에 대한 어떤 표준을 세웠다 말할 수 있었다. 비치 보이즈의 Pet Sounds와 BJ 토마스 등의 서던 컨트리 팝 스타일을 결합시킨 비는 손바닥에 가득의 경우 야마시타 타츠로의 올 타임 베스트 앨범에 Down Town과 함께 수록되기도 했던 만큼 애착을 가진 곡이었다. 오오누키 타에코가 작곡한 곡들은 신선하면서도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무엇보다 캐롤 킹의 영향이 강하게 감지됐다.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은 열망을 그린 친숙한 멜로디의 신기루의 도시, 오오누키 타에코의 솔로 활동에서도 불렸던 언제나처럼, 그리고 애니메이션 감바의 모험에도 삽입됐던 바람의 세계등에서 오오누키 타에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슈가 베이브 해체 이후 야마시타 타츠로, 오오타키 에이이치와 나이아가라 트라이앵글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토 긴지가 작사한 60년대 꿈이 지나간 날들의 경우 이토 긴지 스스로가 자신의 걸작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낸시 시나트라의 Sugar Town의 일부가 사용되기도 한 마지막 곡 Sugar를 비롯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이 뛰어나기 때문에 이는 일종의 베스트 앨범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슈가 베이브는 서해안 팝, 남부 컨트리 록, 훵크 등을 탐구하며 다양한 요소들을 추가해 냈음에도 어떤 통일된 사운드를 유지해갔다. 그러니까 Songs는 아메리칸 팝스를 일본의 스타일로 전개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앨범이었다. 청량감 넘치는 보컬과 섬세한 어레인지는 기적과도 같은 마법을 만들어냈고 이는 일본 대중음악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작품이 된다. 참고로 앨범 커버에 있는 삽화는 니코 제시와 앙드레 모루와가 출판한 사진집 Women of Paris에 있는 두 여성을 그린 것이다. 초여름에 어울리는 상쾌한 바람 같은 신선함이 내내 가득한 앨범이다. 슈가 베이브의 분위기는 소소했고 활동은 짧았지만 그럼에도 어떤 혁명적인 성과를 거둬냈다. 밴드에게도, 그리고 일본의 음악 역사에 있어서도 유일무이한 작품인 Songs는 5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새롭게 들린다. 내 경우에는 2007년 무렵 일본 밴드 램프의 소메야 타이요와 밥을 먹다가 이 앨범을 꼭 들어보라면서 펜으로 적어줘서 구입했고 여전히 듣고 있다. 다른 일본 친구를 통해 앨범을 받았는데, 앨범 옆 OBI(띠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결정!! 뉴 뮤직으로 가는 길, 모든 음악이 가야 할 길이 여기 있다. 슈가 베이브의 데뷔 앨범 ☞ 추천 음반 ◆ Songs (1975 / Niagara, Elec) 본문에서 언급했듯 이들의 정규 앨범은 단 한장이다. 1986년에 첫 CD화가 이뤄졌고 1994년에 데모를 포함한 재발매가, 2005년도에는 오오타키 에이이치가 리마스터한 30주년 앨범이, 그리고 2015년에도 40주년 앨범이 각각 발매됐다. 매회 보너스 트랙과 마스터링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 앨범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비교 감상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On the Pulse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email protected] 2024.06.12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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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이곳에서 영원히 잠들다 자유, 평등, 박애의 기치 아래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1889년, 파리 서쪽 지역에 만국박람회가 열리면서 하늘을 찌르는 듯한 에펠탑이 세워졌다. 파리의 상징 에펠탑은 파리 시가지 웬만한 곳에서 다 보인다. 그런데 에펠탑이 잘 보이지 않는 파리 시가지의 동쪽 지역에는 고개를 들게 하는 에펠탑과는 달리 고개를 숙이게 하는 명소 페르-라셰즈가 있다. 이곳은 다름 아닌 네크로폴리스, 즉 죽은 자들의 도시다. 로마제국 시대의 초기 크리스트교 신자들은 죽은 자들의 도시를 코이메테리움(coemeterium)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잠자는 곳이란 뜻으로 공동묘지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cimitero(치미테로), 프랑스어 cimetire(심티에르), 영어 cemetery(세머테리)의 어원이 된다. 페르 라셰즈 입구. 산 자의 도시와 죽은 자의 도시의 경계다. 파리에는 19세기에 네 개의 큰 공동묘지가 조성됐는데 그 중 페르 라셰즈가 가장 크다. 동쪽 공동묘지로도 알려진 이곳을 찾는 사람은 연간 350만 명이나 되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네크로폴리스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찾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유명한 인물들의 묘소가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묘소들이 고딕, 아르 누보, 아르 데코 등 다양한 예술 양식의 묘비와 조각들과 꽃으로 장식돼 있으니 장례의 예술의 전시장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따라서 이곳은 공동묘지라고 해서 산 자들의 세계로부터 죽은 자를 엄격히 격리해 놓는 엄숙하고 음산한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볼거리와 산책로가 사람들을 발길을 끄는 것이다. 이렇듯 이 공동묘지는 처음부터 건축가에 의해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 뒤에는 나폴레옹이 있었다.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의 골목길. 프랑스 혁명 기간에 영웅으로 떠오른 나폴레옹은 1804년 스스로 황제가 됐다. 그해 그는 모든 시민은 인종이나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인간답게 묻힐 권리가 있다고 선포했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신성한 곳으로 간주하던 기독교 교회 묘지에는 무신론자, 비기독교 신자, 스스로 생을 마감한사람들은 절대로 묻힐 수 없었으니 나폴레옹이 이런 뿌리 깊은 종교적 관습을 타파한 것은 과히 혁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건축가 알렉상드르-테오도르 브롱냐르(1739-1813)에게 예수회 수도원이 있던 자리에 17헥타르의 넓은 공동묘지를 조성하도록 했다. 페르 라셰즈라는 이름은 이 수도원의 수도사 프랑수아 드 라 셰즈(16241709)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건축가 브롱냐르는 묘소를 찾은 사람들이 나무가 늘어선 대로와 골목길을 따라 조용히 거닐 수도 있는 매력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조각 정원 같은 네크로폴리스를 만들었는데, 이것의 기존의 공동묘지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도시계획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나폴레옹만큼 혁명적이었다고나 할까. 장례의 예술같은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가운데가 쇼팽의 묘소다. 그런데 페르 라셰즈가 파리 중심부에서 너무 멀어서 별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첫 해 1804년에는 겨우 14기의 묘소만 들어섰다. 이에 이곳을 매력적인 장소로 탈바꿈시키려는 해결책이 나왔다. 즉, 유명한 사람들의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시인 라 퐁텐과 극작가이자 배우였던 몰리에르의 묘소가 1804년 후반에 이곳으로 옮겨졌고, 1817년에는 12세기의 전설적인 두 연인 피에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묘소가 이곳으로 이장됐다. 그 후부터 이곳은 유명한 인물들 가까이 묻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돼 신청자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1830년에는 묘소가 자그마치 3만 3000기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공동묘지의 영역도 계속 확장됐으며, 지금은 이곳에 1백만 기가 넘는 묘소가 있다. 쇼팽의 묘소에 헌화하는 여인. 수많은 묘소 중에서 유난히도 많은 참배객의 발걸음을 이끄는 것은 쇼팽의 묘소이다. 참배객 중에는 꽃을 들고 온 여인들도 적지 않다. 특히 파리를 찾는 폴란드 사람들에게 이 묘소는 거의 성지와 다름없는 필수코스이기도 하다. 쇼팽의 묘소는 그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의 사위인 조각가 클레징어에 의해 제작된 하얀 대리석상으로 장식돼 있는데, 리라 위에 몸을 구부리고 영원한 잠을 자는 쇼팽을 지켜 내려다보는 뮤즈 여신과 같은 모습이다. 결핵성 폐질환과 고투하면서 꺼져가는 불길 속에서도 최고의 작품을 창조했던 쇼팽은 1849년 10월 17일 3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는 파리에서 가까이 지내던 예술계 친구들의 손에 의해 10월 30일에 이곳에 묻혔고, 그의 주검 위에는 그가 20세에 바르샤바를 떠날 때 친구들이 고국을 잊지 말라고 은으로 만든 용기에 담아줬던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다. 에펠탑이 세워지기 40년 전 일이었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mail protected] 2024.06.11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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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프리카, 미래 동반성장을 위한 여정을 시작하다 서상현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지난 6월 4일부터5일까지 국내 최대 국제 행사 중 하나인 2024 한·아프리카 정상회의가 개최됐다. 이번 회의에 아프리카 정상 25명을 포함해정상급 33명이 방문하는 등 국내에서 개최한 국제 행사 중 한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많은 정상들이 방문했다. 이번 정상회담은 한국과 아프리카가 함께 만드는 미래: 동반 성장, 지속가능성 그리고 연대라는 주제로 일산에서 개최됐다. 이후 5일에는 한국과 아프리카의 정상들과 기업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2024 한·아프리카 비즈니스 서밋이 서울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래 최대 규모의 다자 정상회담이자 우리나라가 아프리카를 상대로 처음으로 개최하는 다자 정상회의로 예상을 뛰어넘는 많은 정상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쳤다. 최근 개최된 주요국과 아프리카 간 정상회의에 정상급 참석 규모를 보면 한국의 위상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지난 2023년 러시아와 아프리카 정상회담에는 아프리카 정상급 27명, 올해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아프리카와의 경우 26명이 참석하였다. 이 밖에 또 영국(2020년) 16명, 튀르키예(2021년), 16명, 미국(2022년) 45명, 중국(2018년) 50명 등이다.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처음 개최된 정상급 회의에 이렇게 많이 참석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한국의 아프리카에 대한 진정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유럽 국가들처럼 많은 원조를 제공하는 등 물량 공세로 아프리카를 지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국은 상대적으로 적은 원조를 제공하더라도 해당 국가가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심성의껏 지원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가 원하는 한국의 고도성장 경험은 현재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프리카에는 가장 필요한 것이다. 최근 한국 정부가 14개 아프리카 국가와 협정을 맺은 K-Rice 벨트 협력이 가장 좋은 예다. 아프리카는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빈곤에 처한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이는 두 사태로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의존하던 밀과 옥수수의 수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서 정상적인 곡물 수급이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에 한국 정부는 한국이 과거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통일벼 품종 개발로 쌀 자급자족을 이룬 경험을 K-Rice 벨트 협력으로 아프리카 식량난을 해결해 주고자 한다. 이처럼 한국은 아프리카 국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을 지원함으로써 아프리카 정부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한국의 진정성을 알기 때문에 이번 행사에 많은 정상들이 기꺼이 방문하게 되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아프리카연합(AU) 의장인 무함마드 울드 가주아니 모리타니아 대통령이 4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한-아프리카 정상회의 공동언론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한국과 아프리카 모두 많은 성과를 거뒀다. 우선 한국은 아프리카에 대한 원조를 확대하겠다고 선언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4일 아프리카 48개국 대표단과 2024 한-아프리카 정상회의 공동선언문을 채택했다. 이 공동 선언에서 한국은 2030년까지 대(對)아프리카 공적개발원조(ODA) 규모를 총 100억 달러까지 확대하고 동 기간 내 140억 달러 규모의 수출금융을 제공하기로 했다. 또한 한국과 아프리카 국가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핵심광물 대화도 출범시키기로 선언했다. 이밖에 한국은 이번 정상회의를 계기로 아프리카 23개국과 총 47건의 협정 및 협약을 체결하는 등 경제협력 성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1개국과 12건의 무역 투자 및 광물 분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는데, 이는 한국과 아프리카와의 무역 및 투자를 증가시키는 추진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과 아프리카 간 무역 규모는 우리나라 전체 교역의 1.9% 정도인 200억 달러가 채 되지 않고 있으며 투자 또한 전체의 0.5%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번에 경제동반자협정(EPA) 협상 개시를 선언한 탄자니아의 경우 니켈과 흑연 등 핵심광물이 풍부한 국가이고 EPA 협상 추진 체계에 합의한 모로코는 미국, EU 등 전 세계 50개가 넘는 국가들과 자유무역지대(FTA)를 체결하고 있어 모로코를 통한 미국, EU, 중동 등으로 우회 수출기지로도 유망한 국가다. 또한 협력 초기 단계에 있는 가나, 말라위, 코트디부아르, 짐바브웨 등 8개국과는 무역투자촉진프레임워크(TIPF) 체결에 성공하며 관세 양허 요소가 없는 맞춤형 경제 협력 플랫폼을 구축하는 성과를 냈다. 이 밖에 민간 부문에서도 아프리카 19개국과 총 35건의 계약 및 MOU가 체결됐다. 이 같은 성공적인 정상회의가 끝났지만, 향후 후속 조치 등을 통해 이번 성과를 지속해서 점검해야 한다. 이는 위에서도 언급됐듯이 현재 아프리카는 일본, 중국, 미국 등을 비롯한 많은 국가와 정례적인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있어 아프리카는 한국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와 협력 선택이라는 옵션이 있다. 따라서 한국이 이번 회의에서 체결한 다양한 협력 사항들을 미루거나 지키지 않는다면 향후 아프리카와 관계가 순탄치 않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한국도 최근 강화되고 있는 선진국들의 보호주의에 맞서 새로운 신시장 개척이 필요하다. 아프리카는 14억명의 인구와 높은 경제성장 그리고 점증하는 소비층 등을 고려하면 아프리카 시장은 반드시 개척해야 하며 이번 정상회의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경제 협력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외교 지지와 다양한 국제 행사 유치에도 아프리카는 필요하다. 우리는 지난해 부산 엑스포 개최 실패에서 아프리카의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꼈다. 아프리카는 54개라는 많은 국가가 있어 반드시 많은 지지를 받아야 했지만, 오랫동안 공들이지 않고는 쉽게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점을 배웠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의를 바탕으로 한국과 아프리카가 단기적인 측면에서가 아닌 장기적으로 상호 윈-윈(win-win)할 수 있는 협력 방안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민-관 협력이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정부는 민간 기업들이 아프리카에 진출할 수 있게 이번 정상회의에서 논의된 EPA와 TIPF를 적극적으로 체결해 주고, 민간 기업은 우수한 기술력과 노하우를 아프리카에 제공함으로써 상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2024.06.07 서상현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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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과 코미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들 ◆ 하우하이(How High, 2001) 하우하이 포스터(사진=기고자 제공) 하우하이는 2001년에 개봉한 힙합 코미디 영화다. 미리 노파심에 일러두지만 이 영화에 탄탄한 서사나 설득력 있는 개연성, 깨달음을 주는 교훈 같은 건 기대하지 말길 바란다. 대신에 이 영화에는 어이없는 설정과 뜬금없는 전개, 지저분한 유머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종일관 유쾌하고 엉뚱하니, 이런 감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열광할만한 작품이다. 사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메쏘드맨과 레드맨이라는 두 래퍼의 매력과 캐릭터에 기대는 작품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돈독한 우정을 이어오며 듀오 앨범도 내는 등 미국힙합 씬 최고의 다이나믹듀오인 이들은 스크린 안에서도 거칠 것 없는 악동의 에너지를 발산했다. ◆ 바버샵: 더 넥스트 컷(Barbershop: The Next Cut, 2016) 아이스큐브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바버샵의 4번째 시리즈다. 3대째 운영하는 미국 시카고의 한 이발소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영화다. 흑인 동네에서 이발소는 주민이 모여 정치, 사회, 문화와 스포츠를 토론할 수 있는 공동체 공간이다. 이러한 켈빈(아이스큐브 역)의 이발소에는 이제 여성 고객을 위한 미용실 공간도 생기면서 식구가 더욱 늘어났다. 그러나 지속되는 동네의 폭력과 범죄는 이발소에 충격을 안겼고, 마침내 이들은 평화를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힙합아티스트 커먼, 니키미나즈, 이브 등이 출연했다. ◆ 프라이데이(Friday, 1995) 프라이데이는 1995년에 개봉한 힙합 코미디 영화다. 아마 힙합 영화 안에서 코미디 장르로 한정하자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힙합 코미디 영화의 아이콘 같은 작품이라는 뜻이다. 프라이데이의 감독은 F. 게리그레이가 맡았다. 원래 F. 게리그레이는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이 영화를 통해 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거둠에 따라 그 후로 굵직한 흑인/힙합 영화의 감독을 계속 맡게 된다. 주연인 아이스큐브와 크리스터커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스큐브는 N.W.A의 멤버로서, 래퍼로서 이름을 알렸지만 영화계와도 깊고 긴 인연을 가지고 있다. 프라이데이 같은 힙합 코미디 영화에 다수 출연했으며, 보이즈앤후드 같은 진지하고 무거운 흑인영화에서도 역시 주연을 맡았다. 바버샵: 더 넥스트 컷(왼쪽)과 프라이데이 포스터(사진=기고자 제공) 크리스터커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흑인 코미디언 중 한 명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가난하고 위험한 동네에서 살아가는 한가하고 유쾌한 흑인 청년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요즘은 케빈하트가 흑인 코미디언의 아이콘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엔 크리스터커가 있었다. 프라이데이의 가장 흥미로운 포인트라면, 이 영화가 그 후 인터넷 밈과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실제로 두 주인공의 익살스런 대화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이콘 같은 존재가 되어 수많은 패러디와 오마쥬를 양산했다. 또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 그리고 그들의 역학관계는 그 후 등장하는 비슷한 영화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수많은 티셔츠와 각종 굿즈가 양산되었음은 물론이다. ◆ 김봉현 음악저널리스트/작가힙합에 관해 책을 쓰고 강의를 하고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케이팝 아이돌 연습생들에게 음악과 예술에 대해 가르치고 있고, 최근에는 제이팝 아티스트들과 교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힙합 에볼루션, 힙합의 시학 등이 있다. [email protected] 2024.05.31 김봉현 음악저널리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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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이 인정한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가상 밴드 가상 밴드(Virtual Band) 혹은 가상 음악가라는 것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나름 오래된 작업 방식이다. 만화영화 속 노래 부르는 등장인물을 시작으로 점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 가상 뮤지션들의 형태는 보다 정교하고 견고하게 구축되어 갔다. 캐릭터 혹은 가상 아바타로 구성된 가상 밴드는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앨범의 아트웍과 비디오 클립, 심지어는 무대 위까지, 시각적 요소를 다루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들은 자신의 세계관 속에서 노래의 창조자이자 연주자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팬들 또한 실제 존재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들을 추종한다. 가상 밴드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80년대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가서는 노래 부르는 다람쥐들인 앨빈과 슈퍼 밴드(칩멍크)가 있고, 일본의 경우 애니메이션 마크로스에 등장하는 린 민메이가 있었다. 이후에는 가상 아이돌 보컬로이드 가수 하츠네 미쿠, 그리고 한국의 대표 사이버 가수 아담의 사례가 있기도 하다. 가상 밴드라는 용어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고릴라즈를 통해 대중화됐다. 고릴라즈는 보컬 건반의 2-D, 베이스의 머독 니칼스, 기타 및 보컬의 누들, 그리고 드럼의 러셀 홉스의 4인조로 구성되어 있다. 당연히 이들은 모두 만화 캐릭터이며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음반들을 발표하면서 단순히 가상 밴드로써의 특이함을 넘어서는 팬덤을 구축해내며 주요 페스티벌의 메인 무대를 서기도 했다. 이 가상의 세계 뒤에는 실제 아티스트들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고릴라즈라는 프로젝트는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됐다. 브릿팝 밴드 블러의 보컬 데이먼 알반, 그리고 탱크걸의 원작자인 만화가 제이미 휴렛이 그 주인공이다. 이 둘은 런던의 같은 아파트에서 거주하다가 우연히 MTV를 보고는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제이미 휴렛은 탱크걸에서부터 유지되던 삐딱하고 어두운, 하지만 유머러스한 캐릭터들을 완성했고 데이먼 알반은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런던과 자마이카를 오가며 녹음을 이어갔다. 고릴라즈(이미지=공식 홈페이지 https://www.gorillaz.com) 데이먼 알반은 블러에서 하지 않았던 것들을 고릴라즈를 통해 마음껏 시도했다. 블러 시절의 브릿팝은 물론 힙합, 전자음악, 그리고 덥과 라틴, 펑크와 월드뮤직을 포함한 다양한 스타일을 탐구해갔다. 그리고 그렇게 발매된 2001년도 데뷔 앨범 Gorillaz는 싱글 Clint Eastwood의 성공으로 인해 유럽 등지에서 플래티넘을 달성했다. 이 데뷔 앨범의 경우 힙합 프로듀서 댄 디 오토메이터가 개입하고 있었는데 그는 비슷한 시기 델트론 3030이라는 서기 3030년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컨셉 앨범을 만들면서 데이먼 알반을 피쳐링시켰던 적이 있었다. 데이먼 알반 또한 댄 디 오토메이터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델트론 3030에서 작업했던 델 다 훵키 호모사피엔과 DJ 키드 코알라를 고릴라즈의 프로젝트로 합류시켜낸다. 고릴라즈의 데뷔 앨범에는 그 밖에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이브라힘 페레르, 토킹 헤즈와 톰톰 클럽의 티나 웨이모스, 그리고 가상 캐릭터 누들과 이미지가 겹치는 시보 마토의 미호 핫토리 등이 함께했다. 이처럼 다양한 게스트진을 포괄해내는 형식은 이후에도 고릴라즈라는 프로젝트의 어떤 특징처럼 굳어진다. 고릴라즈의 데뷔 앨범 투어 당시에는 공연에서 애니메이션 밴드 멤버들이 거대한 스크린으로 전면에 등장하고 실제 곡을 연주하는 밴드는 그 뒤에 위치하면서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 상태로 공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멘트를 할 때는 성우들이 마치 더빙하듯 청중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데이먼 알반은 이후 인터뷰에서 스크린 뒤에서 연주하는 것이 몹시 어려웠고 이상한 경험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고릴라즈의 두 번째 정규 앨범 Demon Days의 경우 미국 시장에서까지 성공하면서 비교적 드문 포맷인 가상 밴드로서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당시 제이지의 리믹스 앨범으로 한창 이목을 집중시켰던 프로듀서 데인저 마우스가 이전 작에서의 댄 디 오토메이터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보다 팝적인 감각을 장착하게 됐다. 브레익 비트와 소울, 라틴의 요소들을 적절히 분배해 나가는 와중 특히 드 라 소울이 피쳐링한 곡 Feel Good Inc.가 빌보드 얼터너티브 송 차트 8주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아이팟 광고에 삽입되면서 앨범의 성공을 견인한다. 그리고 Demon Days의 투어때부터는 캐릭터 뒤에서 공연했던 데이먼 알반을 비롯한 실제 밴드 멤버들이 무대 앞으로 나온다. 특히 따로 영상으로도 공개됐던 Demon Days 투어의 맨체스터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공연에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까지 무대 위로 올려내면서 풍성한 음향을 구현해냈다. 화면의 캐릭터의 입과 밴드가 싱크하는 것이 다소 복잡해 보이기는 했지만 무리 없이 공연이 진행됐고 고릴라즈의 공연은 청각적으로는 물론 시각적으로도 항상 흥미진진한 볼거리가 있었다. 환경 보호를 테마로 한 세 번째 앨범 Plastic Beach의 경우 신스팝의 요소들과 크라우트 록 풍의 전개들이 보다 급진적인 인상을 줬으며, Plastic Beach의 투어 당시 도로에서 녹음된 앨범 The Fall 또한 같은 해 말에 발매했다. 2015년에는 10년 넘게 캐릭터 러셀 홉스의 목소리를 담당했던 레미 카바카 주니어가 밴드의 영구적인 멤버로 자리매김했다. 7년 만에 발표한 앨범 Humanz에서도 빈스 스테이플스, 그레이스 존스, 대니 브라운 등을 피쳐링 시키고 노엘 갤러거를 작곡에 참여시켰으며, 이듬해 발표한 The Now Now의 경우 참여진을 대폭 줄이면서 데이먼 알반 중심으로 작업됐다. 앨범 커버에도 데이먼 알반의 캐릭터라 볼 수 있는 2-D 혼자 기타를 연주하는 형태로 구성해 놓기도 했다. 참고로 고릴라즈는 2017년 무렵 페스티벌을 통해 국내에 내한 공연을 다녀갔다. 작년에도 썬더캣 스티비 닉스, 배드 버니 등의 쟁쟁한 참여진을 앞세운 Cracker Island를 발표하면서 고릴라즈는 여전히 롱런 중이다. 고릴라즈가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고릴라즈의 영화화 계획이 잠시 계획되기도 했지만 결국 데이먼 알반과 제이미 휴렛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 적어지면서 무산시켜버렸다. 이들이 캐릭터 뒤에 서서 전면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는 만큼 이들이 어디까지 노출하고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느냐가 가상 밴드로서 꽤나 중요한 부분이기는 했다. 사실 가상 밴드라는 시스템 자체가 어찌 보면 프로듀서 아래 기획되어 일종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듯 보이는 작금의 아이돌 산업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고릴라즈의 경우 앞에서는 제이미 휴렛이 비주얼 적인 부분들을 다뤄내는 동안 뒤에서는 데이먼 알반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는 한편 상상력을 키워 나가면서 폭넓은 방식으로 창작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다채로운 사운드와 광범위한 아티스트들과의 공동 작업이 이뤄지게 됐다. 생각해보면 의외로 고릴라즈가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 블러와 비교하는 식의 반응은 거의 없었고 데이먼 알반의 솔로 프로젝트라는 이미지 또한 없었는데 돌아보면 이것이 오히려 이득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오히려 데이먼 알반의 정체를 가리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배경이나 편견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음악을 감상하게끔 유도해 내는 역할을 했다. 다양한 음악들이 장난스럽게 섞여 있었고 데이먼 알반의 개인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도 블러 때와는 또 다르게 의욕으로 가득 차 있어 보였다. 참고로 고릴라즈 데뷔 이후 블러는 앨범 한 장을 더 내놓고 휴지기에 들어갔고 블러의 또 다른 멤버 그레이엄 콕슨 또한 인디와 포크 풍의 앨범들을 꾸준히 발매해갔다. 이후에는 블러가 다시 뭉치면서 데이먼 알반은 고릴라즈, 블러, 심지어는 자신 명의의 솔로 앨범 활동까지 병행해내며 복잡한 일정을 전개해 나간다. 음악 비즈니스에서 가상의 캐릭터로 운영되는 세계관으로 고릴라즈 정도까지 와본 프로젝트는 아직 없을 것이다. 때문에 그러한 내용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곡이든 놀라운 그루브를 장착하고 있는 이들의 음악에는 쾌활함과 어둠을 겸비한 독특한 세계관이 있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고릴라즈의 첫 앨범은 새로운 21세기가 막 도래했을 당시 출시됐는데, 당시에는 정말로 21세기에는 이런 새로운 컨셉들이 더 많이 쏟아지겠거니 하는 순진한 기대감 같은 것이 증폭되기도 했던 것 같다. 조금만 더 과장해보면 정말로 새로운 천년이 열리고 있는 중이라는 착각을 고릴라즈의 출현을 통해 체감했다. ☞ 추천 음반 ◆ Gorillaz (2001 / Parlophone, Virgin) 고릴라즈가 공연할 때 가장 큰 호응을 얻어내는 레퍼토리인 Clint Eastwood, 각종 CM에 활용되면서 인기를 끌었던 19-2000, 익숙한 트럼펫 샘플링의 Rock the House, 낮은 브레익비트와 키드 코알라의 스크래치가 불을 뿜는 Sound Check(Gravity) 등 앨범에 수록된 대부분의 곡들이 이미 친숙하다. 가상 밴드의 가능성을 확장시킨 위대한 첫 발자국으로 2021년에는 앨범 발매 20주년 기념 박스세트 또한 발매됐다.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On the Pulse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email protected] 2024.05.30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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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이 나라 중장년은 청춘의 어느 한 지점을 그에게 빚지고 있다. 사람만 빚을 졌을까. 우리의 현대사도 채무자다. 세상을 바꾼 노래는 흔치 않다. 그 노래를 만들었거나 부른 이가 의도했든, 안 했든 말이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았던 노래가 세상을 바꾸었다면 그건 이미 주인의 손을 떠난 것이다. 더 이상 그의 노래가 아닌 것이다. 부르는 이의 것이다. 모든 것은 이 노래로 시작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는 것을 철저히 거부해 왔다. 바로 이 노래다. 애국가 빼면 온 겨레가 아는 유일한 노래라는 말까지 듣는 노래. 어떤 이는 명예 애국가니, 청춘의 애국가니 했다. 나는 이제 젊지 않지만 가슴 속에서는 영원히 늙지 않는 노래, 아침이슬을 듣는다. 올곧게 뻗어가는 양희은 버전을 먼저 듣는다.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주는 고품질 헤드폰으로 들어야 한다. 눈을 감는다. 흘러간 청춘, 그 어느 장소에 나는 돌아가 있다. 청후감(聽後感)을 말하고 싶은데 마땅한 한마디가 주저된다. 장엄? 비장? 치열? 처절? 처연? 결연? 숙연? 경건? 숭엄(崇嚴)이란 단어가 있다. 국어사전에는 높고 고상하며 범할 수 없을 정도로 엄숙한 느낌이라고 했다. 이 노래는 성가(聖歌)다. 젊음의 성가요, 삶의 성가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1971년, 작사·작곡·노래 김민기) 후대가 전설이라 칭한 뮤지션은 우리 가요사에 더러 있다. 전설은 특히나 요절한 이에 대한 헌정에 어울리는 칭호다. 김광석, 김현식, 유재하, 김정호 정도일까. 그러나 살아서 전설로 불린 사람은 거의 없다. 죽어서 전설이 된 이를 만든 살아있는 전설. 그러나 그 전설은 오랫동안 뒷것이었다. 나는 뒷것이고 너희들은 앞것이야. 나를 자꾸 앞으로 불러내지 말라 했던 그다. 대중의 갈채를 받는 앞것이 되길 체질적으로 싫어했던 그다. 스스로 뒷것이라 했지만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쟁쟁한 앞것들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암울했던 시대 얼굴 없는 앞것이었다. 아니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영원한 앞것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한동안 잊고 있던 사이에 어언 73세가 된, 이젠 시대가 아니라 암세포와 싸우고 있는 김민기가 살아있는 전설로 소환됐다. SBS스페셜 3부작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가 5월 5일 종영했다. 20대 초반부터 평생을 세상의 그늘진 곳에서, 무대의 막후에서, 작업실 골방에서 뒷것을 자처하며 살아간 김민기의 삶을 처음으로 본격 조명한 헌정이었다. 3부 시청률(3.3%)이 동 시간대 전 채널을 통틀어 1위가 됐을 만큼 울림과 여운이 컸다. 군사독재정권에 쫓겨 또는 자발적으로 농사꾼으로, 탄광의 막장 인부로, 공장과 바다와 건설 현장에서 청춘을 보내고, 정의와 자유에 목마른 청춘과 핍진한 민중에 정신적 위로가 된 수많은 명곡을 지어내고, 지금은 최고 반열에 오른 수많은 가수와 배우들의 무명 시절 선생님이었던 보살 같은 사람. 겸손한 그 이름 석 자를 이제서야 전설로 커밍아웃한 우리가 무심했다. 그의 첫 번째 대표작 아침이슬로 돌아간다. 노랫말은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뿐이다. 상반된 이미지들이다. 진주보다 고운 아침이슬과 서러움, 떠오르는 태양과 묘지, 평화로운 아침 동산과 거친 광야. 세상은 어찌 한 가지 모습만 정답이겠는가. 설움이 맺힐 때 작은 미소를 짓고, 찌는 더위에 시련이 와도 저 거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주검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섭리를 깨달아야 한다. 긴 밤을 지새우고 찾아온 새벽. 그 여명의 풀잎에 맺힌 찰나의 깨달음. 아침이슬은 어둠과 빛과 설움과 극복이 응축돼 반짝이는 결정체다. 세월에 연마된 진주다. 자, 서러움은 모두 버려두고 나가자. 거친 세상의 모든 시련과 악수하고 마주해야 한다. 청아하고 단호하게 뻗어 올라가는 양희은의 힘찬 목청은 고단한 삶의 결연한 의지를 고양한다. 그런데 가슴 한편이 아려오며 눈물 한 방울 똑 떨어진다. 빛나는 은유적 가사와 아름다운 선율이 왜 슬픔을 줄까. 감동과 슬픔은 이웃이다. 각각의 이유로 누구에게나 삶의 고달픈 순간은 있다. 스무 살 새파란 청년이 만든 노래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유적이고 서정적이면서 기품 있는 아침이슬의 장대한 후폭풍은 그 누구도 예감하지 못했다. 맑은 아침이슬에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밸 거라고는 몰랐다. 1972년 유신 철폐 시위, 1987년 6월 민주항쟁, 2016년 박근혜 정권 퇴진 시위에서 때론 백만 명이 넘는 이들이 신촌에서, 서울역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목이 터져라 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세상의 페이지는 넘어갔다. 노래의 태생은 저항이 아니었다.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들어간 후 이사 간 우이동 집 반지하 창고를 작업실로 쓰며 그림을 그리다 붓이 안 나가서 즉석에서 만든 노래라고 그가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 동네에는 야산도 있고 무덤도 있었다고 한다. 술을 마시고 묘지 근처에서 잠들었다가 아침 햇빛에 깨어났을 때의 경험을 옮긴 것일 뿐이라는 말도 있다. 그는 투사가 아니었다. 이 노래가 광장에서 투쟁의 도구로 불릴 때, 그는 민통선 안의 폐가에서 농사를 짓고, 어두운 지하 막장에서 석탄을 캤고, 김 양식장에서 일당 잡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정권이 감시하고 고문하고 회유할 때 저항하지 않고 은둔의 길을 택했다. 투쟁하여 쟁취하는 선동은 그의 길이 아니었다. 그는 그럴수록 낮은 곳으로 내려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성찰하고 극복하고 각성했다. 군사정권이 그의 첫 앨범 전체를 금지곡으로 만들고 그를 주시한 것이 자신과 자신의 노래와 정권의 운명을 바꾸었을 뿐이다. 혁명과 대중과 천재와 예술은 이렇게 아이러니한 관계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터진 날, 어린이들을 위한 해송유아원 건립 기금 마련 공연에 목숨 걸고 참석해 노래하는 김민기. 그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자료=SBS 프로그램 갈무리) 만일 한국의 밥 딜런을 꼽으라면 단언컨대 김민기다. 그만큼 문학적 영감과 음악적 재능을 동시에 지녔던 뮤지션은 찾기 어렵다. 그는 섬세한 지적 자의식과 자신과 타자의 삶,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스스로 힘들게 걸어간 회의적 지식인이다. 누군가는 윤동주 시인과 결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음악적으로는 앉은 자리에서 뚝딱 가사와 멜로디를 만들어낸 천재 뮤지션이었다. 다만 그는 남 앞에서 기타를 둘러메고 얼굴 내밀고 노래한 적이 거의 없다.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노래를 못한다고 했고, 자기 노래를 듣는 것조차 오래 입다 벗어놓은 내복 같아서 듣기 싫다고 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과 다른 지점이며 어쩌면 더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 인터뷰에서는 내 노래들이 내 몸에서 나간 거긴 한데, 나간 것의 백배가 되어서 돌아오면 내 몸이 버거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만 그는 스스로 쟁이 기질이라고 했다. 어제의 작업을 부정하고 늘 새로운 걸 찾았다. 나이 마흔에 극단 학전을 만들어 올 3월 폐관할 때까지 33년간 운영하며 갈 곳 없는 가수와 배우들에게 무대를 내주고, 뮤지컬을 만들고, 아동극에 전념하기도 했고,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아침이슬은 장안에 노래 좀 부른다고 소문난 풋내기 양희은의 운명도 바꾸었다. 1971년 한 노래모임에서 우연히 이 노래를 듣게 됐고, 찢어진 악보를 주웠다(지금도 그 악보를 갖고 있다고 한다). 노래에 감동한 양희은은 재동초등학교 1년 선배인 김민기를 졸라 첫 앨범 양희은의 고운 노래 모음에 넣었다. 시각 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12현 기타로, 김민기가 클래식 기타로 반주해 주었다. 아침이슬이 처음 대중에 선을 보인 음반이다. 그해 조금 늦게 김민기는 자신의 유일한 정규앨범이 된 김민기의 사이드 B에 이 노래를 실었다. 재킷은 우울한 보랏빛이다. 사이드 A의 첫 곡은 친구였다. 두 사람의 노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양희은의 것은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듯 단호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다. 김민기는 그저 낮은 음정으로 담담하게 읊조릴 뿐이다. 양희은 버전과 반대로 착 가라앉은 숙연한 분위기다. 양희은이 대중에 더 알려지면서 이 노래를 그의 오리지널로 아는 사람이 많다. 양희은은 이 노래를 평생 일만 번 이상 불렀다고 한다. 아침이슬이 수록된 김민기 1집과 양희은 1집. 1971년 김민기는 양희은에게 먼저 이 노래를 주었고, 몇 달 후 자신의 앨범에 실었다. 김민기가 스무 살, 양희은이 열아홉이었다. (자료=네이버지식백과) 음악은 창작자의 의지를 떠나 듣고 부르는 이들에 의해,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고 의미가 새롭게 부여된다. 각자에 의해 각자의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게 좋은 음악의 생명력이다. 김민기의 많은 명곡(다음 편)은 그걸 증명하는 데 충분하다. 1987년 6월 시청 앞 군중 속에 나도 있었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이 목이 터지게 아침이슬을 부르는 걸 난 처음 봤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들 너무 절절하게 부르니까. 더 이상 내 노래가 아니었다. (2018년 9월, JTBC인터뷰)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email protected] 2024.05.29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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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중 정상회의: 포용외교 개시의 분수령이 되다 반길주 고려대학교 일민국제관계연구원 국제기구센터장 우여곡절 끝에 2024년 5월 2627일 이틀간 한일중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한일중 정상회의는 2011년 9월 출범한 3자 협의체로 3개 국가가 교대로 2년씩 사무총장을 맡는 방식으로 진행돼 왔다. 최근 국제정치가 신냉전 역학에 직면한 가운데 오커스 등 소다자 협의체가 주목받고 있는데 한일중 정상회의는 이보다 앞서 출범한 동북아 소다자 협의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냉전 구도라는 도전에 직면해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유사 입장국과 비유사 입장국이 모두 포함된 소다자 협의체라는 성격이 발목을 잡은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2019년 12월 중국 청두에서 개최된 이후 4년여 만에 제9차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리면서 동북아 소다자 협의체가 제 기능을 찾는 단초가 됐다. 3국 정상은 이번 회의를 통해 공급망 안정, 인적 교류, 공중보건 등에 대해 협력 방안을 논의했고 회의 후에는 공동 기자회견도 열었다. 이번 회의에서 3국 정상회의 정례화 및 협력 제도화 추진에 합의한 것은 의미 있는 발걸음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3자 경제협력에 대한 공동의 의지를 확인한 부분이다. 3국 정상과 경제인이 소통하는 한일중 비즈니스 서밋자리가 마련된 것은 이러한 의지를 정책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일중 정상회의 성과는 단지 3자 회의에 그치지 않는다. 한중은 이번 회의를 계기로 양자외교를 통해 외교안보대화 신설, 공급망 등의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한일도 양자 정상회담을 가져 수소 공급망 협력을 모색하고 셔틀외교도 잘 이어가기로 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리창 중국 총리,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2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제9차 한·일·중 정상회의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한국이 의장국으로서 서울에서 개최했다는 점에서 이번 한일중 정상회의는 한국 특유의 포용외교 개시의 분수령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현 정부는 출범 후 약 2년간 안보외교를 통해 안보달성 기초를 굳건히 다지는데 진력해 왔다. 대표적으로 역대 최강 한미동맹을 통해 탄생한 핵협의그룹(NCG)과 한미일 안보 아키텍처를 들 수 있다. 한편 안보외교는 본질적으로 유사 입장국과의 협력에 방점을 둔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비유사 입장국과의 소통 강도가 높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비유사 입장국인 중국도 포함된 소다자 협의체가 성사됨으로써 한국의 외교가 1단계인 안보외교에서 2단계인 포용외교로 진화되는 첫발을 내딛는 기회가 됐다. 한국 정부는 이미 포용 원칙에 대한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2022년 발표한 「자유, 평화, 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해 3대 협력원칙 중 하나로 포용을 제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포용외교를 가시화하기 위해서는 한국은 비유사입장국인 중국과 소통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국도 한국의 협력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최근 한중 양국은 소통 강화에 대한 공동의 의지를 보여왔다. 한국의 포용외교 정책화는 최근 한중 양측이 관계 개선을 이루고자 노력해 온 여건 조성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지난해 9월 한국 대통령과 중국 총리는 아세안 계기에 양자회담을 통해 한일중 정상회의 추진 동력을 살렸다. 이후 한국의 국무총리는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한 후 이 계기에 중국 주석과 회담을 진행했다. 이러한 정상급 인사의 외교전선 관리는 11월 부산에서 한일중 외교장관회의로 이어졌고 올해 5월 조태열 외교장관의 베이징 방문을 통해 성숙했다. 이러한 외교 마라톤을 거치며 마침내 제9차 한일중 정상회의가 성사됐고 의미 있는 성과도 달성했다. 포용외교 정책화의 사례인 이번 한일중 정상회의는 세 가지 차원에서 그 함의를 진단해 볼 수 있다. 첫째, 유사 입장국이 비유사 입장국과도 협력의 공간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신냉전 구도 완화에 기여할 수 있다. 포용외교 정책화 현시로 한국의 인도-태평양전략의 신인도도 높아지는 시너지 창출도 기대할 수 있다. 둘째, 지지부진했던 한중 정상회의의 물꼬가 트일 수 있다. 통상적으로 다자회의 계기에는 양자외교도 활성화된다. 마찬가지로 이번 3자 회의에서도 한중 양자회담이 진행됐다. 이를 통해 한중 외교안보대화 신설에 합의했고 한중 FTA 협상 재개의 물꼬도 트였다. 교착상태가 풀리고 있는 한중관계의 동력을 잘 살린다면 명실상부한 한중 정상회담도 가능할 것이다. 외교 관례상 시진핑 주석의 한국 답방이 필요한 상황에서 한일중 정상회의는 이러한 외교 관례가 현실화하는 초석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셋째, 앞으로 시험대를 어떻게 이겨내느냐가 주목을 받을 것이다. 한일중 정상회의 개최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었지만 이번 소다자 협의체는 오커스, 쿼드, 한미일 협의체 등 다른 소다자 협의체와 지속해서 비교 대상이 될 것이다. 한일중 정상회의가 작은 변수 하나로 인해 다시 멈추기라도 한다면 신냉전 시대에 별로 기대할 수 없는 소다자 협의체로 전락할 수 있다. 따라서 한일중 정상회의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인식으로 후속 조치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또 후속 조치에는 포용외교의 성격을 잘 살리려는 노력이 반드시 담겨야 할 것이다. 2024.05.28 반길주 고려대학교 일민국제관계연구원 국제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