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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동 구석기 유적

구섯기 유출출토 (면목동)구섯기 유출출토 (면목동)구섯기 유출출토 (면목동)구섯기 유출출토 (면목동)구섯기 유출출토 (면목동)
  • 소재지 : 중랑구 면목본동, 면목3∙8동 일원
  • 시 대 : 후기구석기시대

면목동에 있는 후기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서울에서 확인된 유일한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구석기가 출토된 지역은 앞으로는 중랑천이 흐르고 뒤로는 산을 등지고 있어 구석기인들의 수렵‧채집생활에 최적화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면목동 구석기 유적은 1967년 면목지구 산기슭의 택지조성작업을 하던 중 경희대학교박물관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석기 327점이 출토되었다. 구석기 분포범위는 100㎡정도로, 이 일대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제작 당시 사용된 돌망치와 돌을 가공하며 발생된 수많은 파편들의 흔적들로 볼 때, 유적지에서 석기가 직접 제작된 것을 알 수 있으며 발견된 석기에서 사용된 흔적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직접 생활한 사실도 알 수 있다.

성덕사

성덕사
  • 소재지 : 중랑구 봉화산로 109-8(상봉동 303-3)
  • 건립시기 : 1957년

성덕사는 법당(대웅전)을 비롯하여 종각, 칠성각, 삼신각, 미륵전 등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성덕사 건립과 관련된 ‘애동지 전설’은 다음과 같다.

성덕사 터에서 나무를 하던 나무꾼이 나무를 베어도 계속 멀쩡히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혼비백산 할 때 그 옆을 지나던 승려가 “그 터(성덕사 터)는 전염병이 나돌 당시 죽지 않은 아이들도 한꺼번에 내다버려 아이들의 원한이 서린 곳이다. 매년 정월 보름에 짚으로 만든 인형에 이름을 써서 나무에 걸어놓고 애동지(동지가 동짓달 초순에 드는 날)에는 절대 팥죽을 쑤어 적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만한 숫자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예언을 남겨두고 떠났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지키지 않았지만 한 과부만이 이를 지켰고 다음해 질병이 돌았을 때 과부의 아이들만 무사하였다. 1957년에 절이 건립되고 부터는 마을에 떠다니던 나쁜 기운도 없어지고 사람이 사고로 다치는 일도 없어졌는데, 성덕사가 치성을 대신 들어주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경동제일교회

경동제일교회경동제일교회
  • 소재지 : 중랑구 봉화산로 91(중화동92-1)
  • 건립시기 : 1904년

경동제일교회는 ‘서울의 동쪽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동제일교회는 1904년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하리(현재의 중랑구 중화동 145-1번지) 최승렬의 집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가 되었으며, 최승렬과 미국 선교사 한운설(G.G. Hounshell)이 함께 설립하였다.

1909년 미국 북장로 선교사 곽안련(C.A. Clark)이 당회장으로 부임하면서 감리교에서 장로회로 바뀌게 되고 1942년 경동제일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박용환 육영 기념비

박용환 육영 기념비 박용환 육영 기념비
  • 소재지 : 중랑구 봉화산로 91(중화동92-1)
  • 건립시기 : 1939년

‘동창심상 소학교’는 1935년 개교 후 1946년까지 11년간 유지된 일제강점기 초등교육기관이었다.

1939년 3월 그 공로를 인정하여 당시 양주군에서 ‘신재 박용환 육영 기념비’를 세웠다. 1946년 동창학교가 국가에 헌납되고 148년 동창학원이 폐교된 뒤에도 1949년부터 1954년 봄까지 공립 중화초등학교의 분교로 사용되었다. 6.25전쟁 당시였던 1951년부터 3년간은 중화초등학교 교사의 화재로 학생들 1000여명의 교실로 사용되었다.

1953년 이후 ‘경동제일교회’가 동창학교 터를 매입하여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현재는 경동제일교회 한쪽에 기념비만이 잔존해 있다.

송계교 터

경동제일교회
  • 소재지 : 중랑구 묵동 330

‘송계교’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다리로 동남부 지역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였다. 송계교를 건너 현재 중랑천변 일대에는 조선시대 국립 여관인 ‘송계원’이 위치해있었다. 1408년(태종8)에는 동구릉으로 향하는 장례 행렬의 편의를 위해 그때까지 목교로 남아 있던 다리를 석교로 바꾸었으며 이후 왕릉으로 행차를 위해 후대의 왕들이 수시로 통행하였다.

현재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석교의 일부가 중랑천 아래에 묻혀있다. 현재 다리가 있던 자리에는 월릉교가 놓여있고 북부간선도로가 지나간다.

망우리공원 서울미래유산 로고

망우리공원
  • 소재지 : 중랑구 묵동 330
  • 개장시기 : 1933년

망우리공원의 어원은 ‘낙이망우’에서 유래되었는데, 즐겨서 시름을 잊는다는 뜻으로, ‘깨달음을 얻어 즐거이 근심을 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33년 개장한 망우리공원은 1973년까지 40년간 공동묘지로 쓰면서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생각(철학) 이야기(문학) 시대정신(역사)이 담겨 있는 공간이다. 망우리공원에는 시인 박인환, 김상용을 비롯해 소설가 계용묵, 최학송, 독립운동가 한용운, 서광조, 서동일, 오재영, 예술가 지석영, 아동문학가 방정환 등 50여 명이 잠들어 있다.

최근 ‘공동묘지’라는 부정적 인식을 탈피하고, 서울시와 중랑구의 추진으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 서울미래유산 선정연도 : 2013년

망우터널 서울미래유산 로고

망우터널
  • 소재지 : 중랑구 망우동 산30-1
  • 개장시기 : 일제강점기

망우터널은 서울시와 구리시 간 경계에 있는 폭 4.5m, 높이 3.5m, 길이 약 300m되는 터널로 양원역과 구리역을 연결하는 옛 중앙선 철로 중에 있는 터널이다. 중앙선 철도는 서울 청량리역~경주시 경주역을 잇는 철도선으로 경부선에 이어 제2의 종관철도(남북으로 관통하는 철도)였으나 2005년 노선을 확장하는 사업 과정에서 중앙선이 폐선되면서 이용되지 않게 되었다.

망우터널은 일제강점기 때 건설되어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터널로서 그 가치가 있다.

- 서울미래유산 선정연도 : 2013년

중앙선 폐철도노선 서울미래유산 로고

중앙선 폐철도노선
  • 소재지 : 중랑구 양원역로 50 일대(망우동 239-1)
  • 개장시기 : 1939년

중앙선 폐철도노선은 1939년에 개통된 양원-구리 사이의 2.7㎞노선으로, 2005년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폐선될 때까지 66년 동안 여객과 화물을 수송함으로써 한반도 교통에 크게 기여하였다.

폐선 된 옛 중앙선 노선은 선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는 통상적인 관리 방침에 따라 폐선 구간의 선로는 철거되어 부지는 임대 중에 있으며, 일부 구간은 도로에 편입된 상황이다.

- 서울미래유산 선정연도 : 2013년

동부고려제과 서울미래유산 로고

동부고려제과
  • 소재지 : 중랑구 망우로 388(망우동 563)
  • 개장시기 : 1939년

동부고려제과는 1974년에 서울 중랑구 망우동에서 개업하여 현재까지 같은 장소에서 영업을 이어오고 있는 동네 빵집으로 중랑구 윈도우 베이커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제과점을 개업했던 큰 형이 산본에 점포를 오픈하면서 1993년 그 동생이 가게를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 서울미래유산 선정연도 : 2015년

13도 창의군탑

13도 창의군탑
  • 소재지 : 중랑구 망우로 540(망우동 산56)
  • 개장시기 : 1991년

이 탑은 구한말인 1907년 11월 전국 13도에서 모인 의병들이 일제침략의 본거지가 있는 서울을 탈환하여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경기도 양주에 집결, 동대문에서 30여리 떨어진 망우리 일대에서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1년 8월 14일 동아일보사가 건립하였다.

당시 48진 1만여명에 이르는 의병은 13도 창외대진소를 설립하고 총대장에 이인영을,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하였다.

다음해 1월 허위는 3백명의 선봉 결사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 망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현전을 벌였으나 후속 부대의 도착이 늦어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망우리 일대에서 벌어진 혈전에서 서울을 탈환하지는 못하였으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려는 연합의병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자 하는 의미가 크다.

양원리 우물터

양원리 우물터
  • 소재지 : 중랑구 용마산로136가길 43-5(망우동 295-2․296-6)
  • 시대 : 시대미상(조선시대 추정)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동구릉에 건원릉을 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곳의 우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좋아 이 우물을 ‘양원수’라 이름을 지어주었고, 이때부터 마을 이름도 양원리라고 하였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1970년대부터 농약의 사용, 주택 증가 등으로 수질이 나빠져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마을 한 가운데 흔적만 남아있었으며 1998년에는 중랑구청 주관으로 양원리 우물터 표석을 설치하였다. 현재는 우물터 상부에 개인주택이 건축되어 있어, 우물 일부가 건물 아래쪽에 묻혀있다.

환관 하음군 전균 묘

환관 하음군 전균 묘
  • 소재지 : 중랑구 용마산로136가길 43-5(망우동 295-2․296-6)
  • 시대 : 조선 전기

전균[1409(태종9)~1470(성종1)]은 조선 전기의 환관이다. 1453년(단종1) 계유정난 당시에 수양대군(세조)을 적극적으로 도운 공으로 큰 신임을 얻었으며, 1468년(세조14)에는 품계가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렀는데 환관으로서는 최초로 공신이 되고 1품에 올랐다.

신내동 산24-5번지에는 전균 부부의 합장묘가 확인된다. 단분합장묘와 묘표, 문인석등 옛 석물과 근래 건립한 상석, 향로석 등을 갖추고 있다. 묘역을 수호하고 있는 문인석의 높이는 총 250㎝로, 동시대 문인석들과 비교해도 그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이 묘역은 현재까지 잘 알려진 조선시대 내시 묘 중에서 가장 시대가 올라 갈 뿐만 아니라 인물의 중요성도 높고 석물의 원형도 매우 잘 보존되어 있어 그 가치가 있다.

먹골배 시조목

먹골배 시조목
  • 소재지 : 중랑구 신내동 산124
  • 시대 : 시대미상(조선시대 추정)

왕방연은 조선시대 단종이 유배를 갈 때 호송을 담당했던 금부도사였다. 왕방연은 어명을 지키느라 목말라하던 단종에게 물 한 그릇 바치지 못했던 것에 한이 있었다. 그래서 관직을 그만두고 봉화산 자락에 배나무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이후 배나무가 사방으로 번식되면서 중랑구 일대가 온통 배 밭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중 먹골(묵동의 옛 이름)에서 재배된 ‘청실배’는 토심이 깊고 중랑천변으로 배수가 잘되는 사양토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석세포가 적으면서 맛이 뛰어나 구한말까지 왕실에 진상되었다고 한다.

현재 봉수대 공원에 이식되어있는 먹골배 시조목은 2008년경 묵동 다목적체육관의 건립에 따라 노원구에 소재한 농원으로 옮겨졌다가 2017년 4월 4일 묵동 법장사의 주지스님에 의해 현재의 봉수대 공원에 이식되었다.

자료 관리 : 문화관광과 [ 문화관광팀 ] 전화:02-2094-1818
최종수정일 : 2023년09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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