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여동생∙카타르 공주가 무인도에…'춤판'에 셀럽 몰린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베니스 산 자코모 섬의 모락모락 피어나는 분홍색 연기 속 현대무용가 안은미, 사진 안은미컴퍼니

베니스의 무인도에서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도, 가게 개업식에서 볼 법한 높이 5m 바람 풍선 인형도 온통 분홍이다. 신바람 이박사 같은 트로트 음악이 쿵짝쿵짝 울리는 가운데 현란한 차림의 무용수들이 작은 섬 여기저기를 누볐다. 치마저고리 입은 남성 무용수, 동그란 선글라스에 수영모자 쓴 여성 무용수가 비눗방울 총을 쏘며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18일 낮(현지시간) 베니스 인근 섬 산 자코모에서 열린 안은미의 '핑키 핑키 굿: 산 자코모의 내일을 향한 도약’이다.

안은미의 '핑키 핑키 굿: 산 자코모의 내일을 향한 도약'은 배 위에서 돌을 하나씩 분홍 페인트에 적셔 새로 쌓아올리는 퍼포먼스로 마무리됐다. 베니스= 권근영 기자

춤판은 또한 굿판이었다. 산 자코모는 과거 한센인들의 섬이었고, 나폴레옹의 군사 기지로도 활용됐다. 현대 무용가 안은미는 "이 사연 많은 땅의 역사를 되짚고, 현대 예술의 중심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벌이는 ‘터 굿’"이라고 설명했다. 할머니ㆍ고교생ㆍ중년남성 등 모두를 춤판으로 끌어들인 ‘몸의 인류학자’ 안은미가 이번엔 베니스의 무인도에서 영매가 됐다.

종이 커튼(사진 뒤)과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나무 인형 10036개가 설치된 홀. 전통 굿과 장례의 지전과 꼭두를 모티브로 했다. 사진 안은미컴퍼니

버려진 섬 전체를 조각과 설치, 공연으로 채운 이 장소 특정적 공연이다. 창고 안 흰 종이 커튼을 지나면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나무 인형 10036개가 놓인 홀이 나온다. 굿에 쓰이던 지전(紙錢), 전통 장례에서 상여에 달던 꼭두 인형을 닮았다. 한국의 장승 장인이 깎은 목각 인형에 안은미가 일일이 옷을 입혔다. 반대편 해안가 흙산 위에는 분홍색 페인트를 채운 작은 배가 놓였다. 배 안의 무용수가 관람객들이 건네는 돌을 침례 의식하듯 하나하나 분홍 페인트에 담갔다 뺀 뒤 쌓아 올렸다. 한국의 산에서 만나는 돌탑처럼, 참가자들이 소망을 하나하나 보태 올리는 퍼포먼스다.

"안은미는 21세기 피나 바우슈"…배 타고 몰려든 예술계 유명인사들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산드레토 레 레바우덴고 재단에서 주최했다. 현대 미술 컬렉터인 파트리치아 산드레토 레 레바우덴고가 1995년 설립한 예술재단이다. 기획은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영국 서펜타인 갤러리 예술감독. 세계적 큐레이터인 그는 "안은미와 함께 일하고 싶다는 꿈이 이뤄졌다. 그녀는 위대한 안무가로, 21세기의 피나 바우슈"라고 말했다. "재단 설립자인 파트리치아와 지난해 런던 바비칸 센터에서 안은미의 ‘드래곤즈’를 본 뒤 섬에 초대해 이 프로젝트를 논의했다"라고도 덧붙였다. ‘드래곤즈’는 코로나 19가 한창일 때 아시아 5개국의 2000년생 용띠 무용수들과 화상 채팅으로 안무를 준비해 홀로그램으로 올린 무대다. 바비칸 센터의 첫 한국무용 공연이었다. 무인도도 전염병도, 안은미를 막지 못했다.

배에서 내리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파트리치아 산드레토 레 레바우덴고(오른쪽) 부부. 베니스= 권근영 기자

수상 버스도 닿지 않는 무인도이기에, 따로 빌린 배로 초대받아야 올 수 있는 단 한 번의 예술 프로젝트였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사전공개가 한창인 이날, 넘쳐나는 현대미술 전람회 마다하고 꼬박 반나절이 걸리는 이 무인도 행사를 택한 관객은 600여명. 신명과 재미의 춤판에는 알 마야샤 카타르 공주, 베티나 코렉 영국 서펜타인 갤러리 대표, 스위스의 파워 컬렉터 마야 호프만, 그리고 리움미술관 이서현 운영위원장도 있었다. 삼성문화재단은 이번 프로젝트를 기술 후원했다.

왼쪽부터 안은미, 산드레토 레 레바우덴고 재단 설립자 파트리치아, 기획자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베니스=권근영 기자

건축가 조민석 매스스터디스 대표는 “배 위에서 분홍 연기를 본 순간부터 안은미의 스케일에 빠져들었다. 원 없이 최대한 만들어낸 공연을 보니 ‘평생 팬’으로서 더없이 뿌듯하다. 오는 6월 서펜타인 파빌리온에도 그를 초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런던의 비영리기관인 서펜타인 갤러리가 24년째 이어오는 여름 건축 프로젝트다. 조 씨는 한국 건축가로는 처음 선정됐다.

선주민들이 휩쓴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한국관은 향기 전시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는 20일 시상식과 함께 공식 개막했다.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은 뉴질랜드 마오리족 여성 작가 4명으로 구성된 ‘마타호컬렉티브’가 받았다.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가 20일 개막했다. 왼쪽부터 아드리아노 페드로사 예술감독,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마타호 컬렉티브'의 테리 테 타우, 사라 허드슨, 이리나 베이커. 뉴질랜드 마우리족 예술가들로 구성됐다. 베니스=EPA/ 연합

국가관 황금사자상은 아치 무어가 참여한 호주관에 돌아갔다. 전시관 벽면을 칠판으로 꾸미고 6만 5000년 호주 선주민의 역사를 분필로 그려 넣었다.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라는 주제답게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선주민들이 주인공이 됐다.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관인 아르세날레 입구에 설치된 마타호 컬렉티브의 섬유예술 '타카파우'. 베니스= 권근영 기자

한국관은 '구정아-오도라마 시티'라는 제목으로 공간을 텅 비우고 향기를 전시하는 역발상을 꾀했다. '향기(Odor)'와 '드라마'를 조합한 제목이다. 한반도 남쪽이라는 지정학적 경계를 넘어 어디나 갈 수 있는 냄새가 미술의 소재가 됐다.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구정아: 오도라마 시티' 전시 장면. 베니스= 권근영 기자

입양된 후 27년 만에 처음 내린 김포공항에서 풍기던 설렘과 상실의 냄새, 1930년대 북한 고향의 사과꽃 향기와 햇사과 향, 할머니 방 냄새, 공중목욕탕 냄새, 밥 짓는 냄새, 지하철의 금속향, 한강의 물비린내 등이 ‘한반도의 냄새 지도’가 됐다. 해외 입양인, 탈북민, 한국에 사는 외국인, 재외 한국인 등이 전 세계 600여 명이 공유해 준 한반도에 대한 '향기 메모리'다. 프랑스ㆍ한국ㆍ일본에서 온 16명의 조향사와 함께 17가지 향으로 만들었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오는 11월 24일까지 이어진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