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용삼의 근대사] 日, 거액의 비자금으로 고종 회유했나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을사보호조약과 한일의정서
대한제국 외교권 넘기는 조약 체결 직전 '2만엔 예금증서 제공' 일본 사료에 남아
'헤이그 밀사 파견' 소식 들은 천황 분노…고종, 감시 뚫고 中에 국회중립 통보
日, 고비마다 왕과 내각 각료에 돈 뿌려

고종을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
고종을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한 이토 히로부미 통감.

최근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가 발간한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란 저서를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1907년 고종이 퇴위 당하기 직전, 일본 천황이 고종에게 거액의 비자금을 제공하려 했다는 내용이다.

고종의 강제 퇴위는 그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불거졌다. 관련 내용이 외신을 타고 일본에 알려지자 메이지 천황은 고종이 을사보호조약을 무시한 처사에 극도로 분노했다. 분기탱천한 메이지 천황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에게 "이번 기회에 그의(고종) 두뇌를 개량하여 장래에 절대로 변하지 않도록 확실한 방법을 세우라"라고 지시했다.

또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일본 총리에게는 "이번에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여 군정·재정·내정, 그리고 궁내 출입 무리의 감소 등을 엄중히 처리하여 정리하는 한편, 200만~300만 엔을 국왕(고종)에게 주고, 그 사용을 통감부가 감독하여 은혜를 베푸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한상일,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 기파랑, 2024, 272~273쪽).

고종의 비자금 관련 내용을 제기한 한상일 교수의 저서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 표지.
고종의 비자금 관련 내용을 제기한 한상일 교수의 저서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 표지.

200만 엔을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2천500억 원 정도의 거액이다.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제공하여 일본에 저항하는 고종을 회유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상일 교수는 실제로 이 '거금'이 고종에게 전달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이 1904년 3월 이토로부터 '위로금' 명목으로 30만 엔을 받았던 전력에 비추어 볼 때 천황이 지시한 거액의 비자금이 고종에게 제공됐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한상일, 앞의 책, 273쪽).

한상일 교수의 문제 제기가 사실이라면, 고종은 일본 정부로부터 거금 200만~300만 엔의 비자금을 제공받는 대가로 황제에서 퇴위는 물론, 대한제국의 내정권마저 넘겨줬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런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헤이그 밀사 사건 직후 이토 통감이 고종을 폐위하고 정미 7조약이라 불리는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정·재정·내정과 관련된 정리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한일신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법령 제정권 및 행정 처분권, 관리의 임명권 등 내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했고, 군대마저 해산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속령 수준으로 전락했다. 메이지 천황이 지시한 '새로운 조약 체결 작업'은 충실하게 이행되었다.

◆을사보호조약 직전 2만 엔(25억 원) 수수

게다가 고종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넘기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직전, 일본으로부터 비자금을 받아 챙긴 사실이 일본 측 사료를 통해 명쾌하게 밝혀졌다.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1주일 전인 1905년 11월 11일, 본국 외무성의 비밀 훈령(기밀 제119호)에 의해 기밀비 10만 원을 대한제국 지도부를 대상으로 집행했다.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가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게 비자금 제공 사실을 보고했음을 밝힌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가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게 비자금 제공 사실을 보고했음을 밝힌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그중 2만 원(2만 엔)이 심상훈을 통해 무기명 예금증서로 고종에게 전달되었고, 고종의 측근 및 내각 각료들에게도 비자금이 뿌려졌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22, 보호조약 1~3 (195), 「'임시 기밀비 지불 잔액 반납의 건」, 1905년 12월 11일). 고종에게 전달된 2만 원(2만 엔)은 현재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25억 원 정도로 추산된다.

그렇다면 앞에서 한상일 교수가 언급한 "1904년 3월 이토로부터 '위로금' 명목으로 30만 엔 수수" 건의 사연은 무엇일까?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 궁중 곳곳에 침투시킨 첩보 조직을 통해 고종이 돈을 대단히 밝힌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우유부단한 고종을 회유하여 일본이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만족할 만한 액수의 운동비(비자금) 제공이나 차관 공여가 최선의 방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결정적 고비마다 고종과 측근, 대한제국의 고위 각료들에게 아낌없이 비자금을 뿌렸다.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고종은 앨런 주한 미국공사에게 미관파천(美館播遷)을 요구했다. 미국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고종은 1904년 1월 21일, 일본의 감시를 뚫고 밀사를 중국으로 보내 대한제국의 전시 국외중립을 각국에 통보했다. 중립 선언문은 주한 프랑스 공사 퐁트네(Vicomte de Fontenay)가 작성해주었다.

열강들이 전시중립 선언을 무시하여 국제적 승인을 얻지 못하자 고종은 서울 지역만이라도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경성(京城) 중립안'을 선포했다. 그런데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고종은 느닷없이 일본과 공수(攻守)동맹이나 다름없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스스로 국외중립, 경성 중립안을 발길로 걷어찬 것이다.

고종이 이토 특사에게 30만 엔의 비자금을 수수한 사실을 본국 정부에 보고한 조던 주한 영국공사의 보고(1904년 3월 31일자)
고종이 이토 특사에게 30만 엔의 비자금을 수수한 사실을 본국 정부에 보고한 조던 주한 영국공사의 보고(1904년 3월 31일자)

◆러일전쟁 직후엔 30만 엔(375억 원) 받아

뿐만아니라 한일의정서 체결 5일 후인 2월 28일, 고종은 러일전쟁을 치르는 일본을 돕기 위해 군자금 명목으로 본인과 두 아들(황태자 순종 및 영친왕) 명의로 대한제국 화폐인 백동화 18만 원을 기부했다.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사례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 특사를 파견했다. 3월 20일, 이토를 접견한 고종은 "서양인들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 독일 비스마르크 재상, 청나라 리훙장(李鴻章)과 함께 경을 '근세 4걸'이라 부른다"라며 이토 특사를 극찬했다.

고종과 접견 후 이토 특사는 "군자금 제공에 대한 답례" 명목으로 일본 돈 30만 엔이 입금된 예금통장을 고종에게 제공했다. 이것이 한상일 교수가 언급한 '위로금' 명목의 30만 엔 수수 내막이다. 30만 엔은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375억 원 정도다. 그런데 문제의 30만 엔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됐다.

주한 영국 공사 조던은 러일전쟁 개전 직후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일본 특사를 알현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보망을 가동했다. 그 결과 접견식에 배석했던 민영환을 통해 고종-이토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확인했다. 조던 공사는 1904년 3월 31일 본국 외무장관 랜스다운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대사(이토)는 황제(고종)에게 천황 선물이라며 30만 엔을 줬다. 그리고 경부선 철도에 고종이 가진 지분을 보장하고, 향후 경의선 지분 또한 보장한다고 확약했다."

이토가 제공한 30만 엔은 일본과 군사동맹인 한일의정서을 체결해준 데 대한 격려금, 18만 원의 군자금 제공에 대한 답례금 성격뿐만 아니라, 경부선·경의선 철도 건설을 위한 뇌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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