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예술기행] 노르웨이 오슬로

희곡 혁명 ‘인형의 집’ 작가 입센…‘솔베이지의 노래’ 작곡가 그리그
불안의 아이콘 ‘절규’ 뭉크의 나라…노벨평화상 시상·세계 최고 부국

돌아오지 않는 페르 귄트를 일평생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애절하다.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으면 노르웨이 피요르드가 뇌리에 감싼다.
돌아오지 않는 페르 귄트를 일평생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애절하다.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으면 노르웨이 피요르드가 뇌리에 감싼다.

지난 한 달 남짓 필자는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편두를 딱따구리가 따다닥 쪼아대고 전두에선 콩새가 콩콩 뛰어다녔다. 급기야 뒷머리는 곤즐박이가 달그락 달그락 두들겨댔다. 아아, 머리가 새장이라니,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이성을 잃은 것처럼 풀풀 웃음이 날 때쯤 왠지 이 두통을 낫게 해줄 것만 같은 푸른 빛 뵈이야의 빙하와 차로 한 시간을 달려도 끝이 없던 하당에르 피오르의 그 눈밭이 자꾸 떠올랐다. 가도 가도 끝없던 설원, 어디선가 불쑥 묠니르를 든 토르가 나타날 것만 같던 그 곳엘 가면 이 끔찍한 두통이 씻은 듯 나을 것만 같은데.

솔베이지노래
솔베이지노래

◆헨리크 입센과 에드바르 그리그

'그 겨울이 지나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여름날이 가면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겠죠. 하지만 당신은 돌아올 거예요. 당신은 나의 사랑, 나는 약속했잖아요, 당신을 기다릴 거라고…' 돌아오지 않는 페르 귄트를 일평생 기다리는 솔베이지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애절하다.

슬픔을 위해 눈물로 지은 시(詩)가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미당 서정주의 '40년인가 50년이 지난 뒤,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다가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다는 그 아련한 신부처럼 처연하다.

절친한 사이였던 헨리크 입센과 에드바르 그리그는 스웨덴 노르웨이연합왕국 시절(스칸디나비아3국의 역사는 거의 혼재되어 있다.)인 1874년 극시 페르 귄트(Peer Gynt)를 쓰고 작곡했다. 내용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일종의 막장극에 가깝다. 주인공 페르 귄트는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며 놀기 좋아해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다가 솔베이지와 결혼을 하면서 가정을 꾸리지만, 모험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아내를 버려둔 채 떠나면서 여러 일들을 겪는다.

결국 큰돈을 벌어 귀향하지만 폭풍우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피오르를 건너 눈길을 헤쳐 쓸쓸히 집에 돌아와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으며 죽어간다는 이야기이다.솔베이지의 노래에서 노르웨이 피오르드 풍경이 보인다.

입센은 '인형의 집'으로 안톤 체홉과 더불어 현대 연극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로 평가받지만 여성 해방, 사실주의 등 사회 문제를 주로 다룬 문제적 작가로 분류되어 고국에선 인정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으며 28년간 외국에서 유랑생활을 했다. 63세 때인 1891년 귀국해 국민 작가로 추앙받으며 북유럽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지만 초창기 노벨문학상이 '낙천적인 작품'이라는 기준을 가진 터라 끝내 수상하지 못한다. 1906년 동맥경화로 사망했다.

노르웨이 국립극장.건물 정면 기둥에 왼쪽부터 입센,홀베르,비에른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노르웨이 국립극장.건물 정면 기둥에 왼쪽부터 입센,홀베르,비에른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스마트 폰 지도로 홀로 찾아간 입센 기념관은 오슬로 중앙역 근처에 있었다. 귀국 후 그가 살던 집에 조성된 것이라 들었다. 근처가 모두 입센 거리로 명명되어 있었다. 기념관은 입센의 동상과 초상화, 페르 귄트, 인형의 집, 유령 등 입센의 작품들 미디어 아트, 유품, 자료실, 세미나실로 오밀조밀 채워져 있었다. 인구 60만의 한적한 수도이지만 외국인 전공자들이 주로 드나들어서인지 각 언어별 안내서가 많았다.

그리그는 아인슈타인, 니체와 너무 닮았다. 뭉크 미술관에서도 깜박 헷갈려 니체인지 그리그인지 한참 헷갈려 그림 설명을 보고서야 아, 니체구나 했을 정도다. 베르겐 출신으로 노르웨이의 민속 전통에 뿌리를 두고 섬세한 서정 감각으로 음악을 작곡했다. 솔베이지의 노래가 든 페르 귄트 모음곡(Peer Gynt), 노르웨이 국가 등을 작곡했다. 1885년 베르겐 근방에 '트롤드하우겐'을 지어 여생을 그곳에서 지냈는데 나는 폭설에 길이 막혀 들르질 못했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그의 외종손이라고 한다.

뭉크미술관
뭉크미술관

◆에드바르트 뭉크

어느 날, '자연을 꿰뚫는 거대하고 영원한 외침'에 홀려 뭉크는 '절규(The Scream)'를 그린다. 다리 위에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려 경악하는 자신의 공포가 이후 곧 모든 현대인의 내면을 관통하는 불안의 아이콘이 된다. 서른 살의 뭉크가 피카소와 더불어 영원한 현대성(modernity)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스스로 '나는 늘 죽음과 함께 있었다.'라고 했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열네 살 때 그토록 의지하던 누나 소피에가 어머니와 동일한 병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 라우라가 조현병을 앓게 된다.(나중에 광신도가 되어 자식들에게 정신적 학대를 일삼던 아버지의 죽음과 남동생의 죽음도 겪는다.)

열여덟 살, 아버지의 강요로 기술학교를 가게 되었지만 그림에 대한 열망을 끊을 수 없던 그는 기술학교를 그만 두고 국립왕실미술학교를 가게 되고 다행히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연애사가 또 불운하기 짝이 없었다. 밀로 탈로, 다그니 유엘, 툴라 라르센이라는 세 여자와 각별한 인연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세 여자에게서 모두 크게 상처를 입고 여자에 대한 혐오 감정과 불안증세에 더해 환각 증세까지 얻어 요양치료까지 받는다.

오슬로는 세계적인 화가이자 판화 제작자 뭉크의 도시다. 뭉크 미술관에 전시된 뭉크의 대표작인
오슬로는 세계적인 화가이자 판화 제작자 뭉크의 도시다. 뭉크 미술관에 전시된 뭉크의 대표작인 '절규'.

뭉크는 정신질환적 신경 강박증에 시달리면서도 그림을 그려 번 돈으로 오슬로 외곽 에켈리에 넓은 땅을 사 풍경화나 자화상, 구불구불한 선을 사용한 양식으로 인간 실존의 고통과 불안을 표현하는 등 대량의 판화 작품을 끊임없이 제작했다. 특히 강박적으로 자기 작품에 집착해 한 작품을 팔고 나면 같은 소재로 작품을 또 그리는 일을 반복해 그 작품의 숫자가 점점 많아졌다.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지정된 자기 작품이 파괴될 것을 우려해서 유언으로 자기의 전 작품 2만여 점을 시에 기증했다.

오슬로시는 1963년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오슬로대 식물원 근처에 뭉크미술관을 개관, 운영해오다가 워낙 방대한 작품 수로 2021년 오페라하우스 옆 새롭게 미술관을 개관했다. 약간 고개 숙인 회색 시루떡처럼 생긴 미술관 안에는 시간차를 두고 다른 버전의 '절규' 3점을 교차 전시하고, '뱀파이어', '마돈나' 등 뭉크 작품 1,200여 점을 보유해 전시하고 있다. 사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절규보다 뭉크의 완벽한 추상적인 작품이라 여기는 '태양'을 더 사랑한다고 한다.

◆노르웨이, 세계 최고 부자 나라

노벨은 평화상을 왜 오슬로에서 시상하게 했을까. 이렇다 할 정확한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진행되는 오슬로 시청사는 좌우에 거대한 갈색 치즈를 닮은 사각 탑이 서 있는 웅장한 건물이다. 북유럽신화와 노르웨이역사화가 목각채색화와 프레스코화로 커다란 벽화로 그려져 있다. 뭉크를 비롯한 28명의 유명화가가 그린 대형 그림이 걸린 방들이 있다. 이곳에서 노르웨이 국왕이 참석하는 노벨 평화상 시상식이 열린다.

노벨평화센터
노벨평화센터

시청사 광장에서 부두 쪽으로 200미터쯤 내려가면 노벨평화센터가 있다.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들 관련 자료를 모아놓았다. 바로 뒤쪽엔 오슬로국립미술관이 있는데 한시적인 듯한데 조각 작품들 때문에 외투를 지하에 걸어두고 관람해야만 했다. 칼 요한슨 거리는 화려하고 왕궁도 찬란하다. 비겔란드 조각공원은 너무 심오해서 다소 우울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1960년대 후반 북해에서 가스전, 석유가 시추되기 전까지 노르웨이는 사실상 유럽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젠 국부펀드를 운영하는 노르웨이는 한때 지배국이었던 스웨덴, 덴마크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올 정도로 세계 최고 부자 나라다. 나름 내부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네덜란드병(Dutch disease, 자원의 저주)도 잘 극복해가는 모습이 참 부럽게 느껴지는 그런 나라가 되었다. 노르웨이 우체부가 웬만한 나라 스키 국가대표급 선수보다 낫다는 이야기도 하당에르 피오르 설원을 건너며 나는 믿게 되었다.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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