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No.1(1871). '휘슬러의 어머니'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지만 휘슬러는 작품을 이렇게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오르세미술관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No.1(1871). '휘슬러의 어머니'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지만 휘슬러는 작품을 이렇게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오르세미술관
“엄마는 도구에 불과해요.”

화가가 태연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내뱉자, 작품을 보러 모인 사람들의 분위기는 순간 싸해졌습니다. 화가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어머니는 그저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등장인물일 뿐이에요. 제목부터가 ‘회색과 검정의 배열’이잖아요. 그보다는 색채와 형태를 봐주세요. 정말 천재적인 솜씨 아닌가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며 화가의 어머니 표정을 살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조용히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철없는 아들의 이름은 훗날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는 제임스 휘슬러(1834~1903). 어머니의 이름은 안나 맥닐 휘슬러(1804~1881·기사에서는 안나로 표기)였습니다. 오늘은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어머니’를 만든 이 모자(母子)의 이야기, 그리고 아들이 그렇게 말했던 이유를 풀어 보겠습니다.
1934년 미국이 어머니의 날을 기념해 발행한 우표.
1934년 미국이 어머니의 날을 기념해 발행한 우표.

철 없는 사고뭉치

휘슬러의 아버지는 웨스트포인트(미국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민간 엔지니어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철도를 깔고, 기관차를 만들고, 다리를 놓는 일을 하며 많은 돈을 벌었지요. 훤칠하고 남자다운데다 능력도 출중했던 그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열다섯살의 안나도 그런 ‘여성 팬’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나의 첫사랑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가 안나의 절친한 친구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7년 후, 안나는 뜻밖의 연락을 받습니다. 첫사랑과 결혼해 아이 셋 낳고 잘 살던 그 친구가 장티푸스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였습니다. 유언은 더욱 놀라웠습니다. “내가 죽고 나서 재혼을 할 거면, 안나랑 해요. 다른 사람은 안 돼요.” 심성이 착하고 성실한 안나라면,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잘 돌봐줄 거라는 기대에서였지요. 꼭 이런 유언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안나는 아내의 죽음으로 상심한 그를 위로해 줬고, 그 과정에서 둘은 사랑에 빠져 2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1834년 휘슬러가 태어났습니다.
흰색 교향곡 No.2(1864). '작은 흰 소녀'로 불린 작품이다. /테이트 소장
흰색 교향곡 No.2(1864). '작은 흰 소녀'로 불린 작품이다. /테이트 소장
휘슬러는 어린 시절부터 성격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아이였습니다. 성질이 급하고 변덕이 심한 데다 건방진 아이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상당한 ‘금쪽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이런 휘슬러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줬습니다. 덕분에 휘슬러는 타고난 그림 재능을 거침없이 키워갈 수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 화가 윌리엄 앨런이 어린 휘슬러를 두고 남긴 말은 이런 캐릭터를 잘 보여줍니다. “흔치 않은 천재입니다. 하지만 잘 키워야겠군요.”

휘슬러가 여덟 살 되던 해, 휘슬러 가족은 러시아로 이사를 갑니다. 러시아의 차르(황제)였던 니콜라이 1세가 “러시아 최초의 철도(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철도)를 놓아 달라”며 고액 연봉을 주고 휘슬러의 아버지를 초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은 엄청난 대규모 프로젝트였습니다. 험준한 지형을 가로지르는 640km의 철도를 건설하고, 이를 위해 200개의 다리와 70개에 달하는 육교를 놓고, 기차 162량과 화물차 2580량 등 수많은 철도 차량을 제작하는 일이었으니까요.

휘슬러의 아버지는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돼 7년간 밤낮없이 일했습니다. 지금 돈으로 6억~7억원에 달하는 연봉 덕분에 가족들은 마치 귀족처럼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로와 러시아의 추운 기후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휘슬러의 아버지가 철도 완공을 2년 앞두고 콜레라에 걸려 목숨을 잃고 만 겁니다. 휘슬러의 나이 열다섯 살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휘슬러 가족은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안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쌓아 놓은 재산이 별로 없었던 탓에, 안나는 허리띠를 졸라매 가며 혼자 힘으로 살림을 꾸려 나가야 했습니다. 휘슬러의 심경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를 깊이 사랑했던 휘슬러는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기 위해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고, 열일곱 살의 나이로 합격증을 거머쥐었습니다.
회색 배열, 화가의 초상(1876). 휘슬러의 자화상이다. /디트로이트 예술 대학
회색 배열, 화가의 초상(1876). 휘슬러의 자화상이다. /디트로이트 예술 대학
하지만 휘슬러는 엄격한 사관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허구한 날 사고를 쳐서 벌점을 받았고, 학업 성적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휘슬러는 3학년이던 1854년 퇴학당하고 맙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화학 시험에서 “규소(실리콘)는 기체”라는 잘못된 답을 써서 낙제한 것이었습니다. 휘슬러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리콘이 만약 진짜로 기체였다면, 나는 장군도 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소리를 듣는 안나의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었습니다. 어려운 살림에도 뼈 빠지게 뒷바라지해서 아들을 좋은 학교에 보냈는데, 적응을 못 해서 퇴학을 당하다니요. “이제 직장을 구해 보라”는 안나의 말에 아들이 한 대답은 더욱 황당했습니다. “아뇨, 저는 예술가가 될 거예요. 프랑스로 유학 보내 주세요.” 그 말을 들은 안나는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요.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법. 결국 안나는 아들의 프랑스 유학을 허락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

얼음 속의 템스강(1860). /프리어갤러리
얼음 속의 템스강(1860). /프리어갤러리
프랑스 유학을 간 뒤에도 휘슬러는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용돈이 들어오면 흥청망청 썼고, 돈이 다 떨어지면 빚을 졌습니다. “나는 사실 예술을 배우러 온 게 아니야. 예술가가 되러 온 거야. 돈은 그림을 팔아서 벌면 돼.” 휘슬러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방탕한 삶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고, 휘슬러는 이를 미국에 있는 안나에게 보내 보관을 부탁했습니다. 안나는 이를 전부 불태워 버렸습니다. “기껏 유학을 보내줬는데 이따위로 살면서 이런 그림이나 그리다니, 정신 차리거라.” 안나는 휘슬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피아노에서(1858). 그의 이름을 미술계에 알린 첫 작품이었다./태프트뮤지엄
피아노에서(1858). 그의 이름을 미술계에 알린 첫 작품이었다./태프트뮤지엄
휘슬러는 분노했습니다. “엄마가 예술에 대해 뭘 안다고….” 방탕하게 살긴 했지만, 예술에는 언제나 진심이었던 휘슬러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뭔가 보여줘야겠어.’ 그렇게 심기일전해 만들어낸 작품이 1859년 작품 ‘피아노에서’. 이복 누나와 조카를 그린 이 작품에 ‘색채가 천재적이다’ ‘스페인의 미술 거장인 벨라스케스를 떠올리게 한다’ 등의 호평이 쏟아졌습니다. 덕분에 휘슬러는 파리 미술계의 유명 인사가 됐습니다. 열일곱 살의 그림 모델, 조안나 히퍼넌과 연인이 된 것도 이맘때였습니다.

자신감이 붙은 휘슬러는 그간 품고 있던 예술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펼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겠어.’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휘슬러 이전까지 존재했던 대부분의 미술은 모두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초상화는 사람의 얼굴을 기록으로 남기고 대상의 매력이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 역사화는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 정보와 교훈을 전하기 위해서, 종교화는 사람들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그리는 그림이었지요. 하지만 휘슬러는 이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름다움’만을 위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게 휘슬러의 야망이었습니다. 바흐의 클래식 음악이 아무 뜻 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처럼요.
흰색의 교향곡 No. 1
흰색의 교향곡 No. 1
1861년 휘슬러가 연인을 주제로 그린 작품에 ‘심포니 인 화이트(백색의 교향곡)’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어 보이는 묘한 분위기의 작품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저마다 해석을 내놨습니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여성을 표현한 거야.” “아니, 인기 소설 속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것 같은데.” 평가도 엇갈렸습니다. “탁월하다”는 칭찬도 많았지만, “그리다 만 것 같다” “뭘 전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비판도 많았습니다.

“그림이 별로”라는 사람들에게 휘슬러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자기 마음이지.” 하지만 “그림 속에 숨겨진 뜻이 이렇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완전히 틀렸다”며 적극적으로 반박했습니다. “내 그림은 초상화가 아닙니다. 그림 속 여성은 큰 의미 없는 등장인물일 뿐이에요. 그림의 색채와 모양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즐겨 주세요.” 이런 점에서 보면 휘슬러의 생각은, 훗날 대세가 되는 추상미술이라는 개념의 ‘초기 버전’이기도 했습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사람들은 시대를 앞서간 휘슬러의 생각과 작품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영국 사람들은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해 줬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며 활동하던 휘슬러는 이런 이유로 런던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미술사에 남은 전설의 싸움

“비상! 비상이 걸렸다네. 집을 완전히 뒤집어엎었어. 지하실부터 지붕까지 대청소했다네.” 서른 살이던 1864년 휘슬러는 친구인 화가(앙리 팡탱라투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휘슬러가 ‘비상’을 외치며 대청소를 했던 이유는 딱 하나. 안나가 휘슬러와 같이 살기 위해 런던으로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녹턴 : 파란색과 금색 - 올드 배터시 다리(1872). 테이트 소장
녹턴 : 파란색과 금색 - 올드 배터시 다리(1872). 테이트 소장
그전까지 안나와 휘슬러의 관계는 꽤 괜찮았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같이 살 때보다 서로 떨어져 살 때 더 애틋해지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다시 한 지붕 아래 살게 되면서 안나와 휘슬러의 관계도 긴장 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안나는 오랜만에 본 아들에게 사사건건 잔소리를 했고, 아들은 지지 않고 날 선 말로 받아치며 어머니에게 상처를 줬지요.

그래도 안나는 휘슬러의 작업을 모든 면에서 도왔습니다. 아들의 작업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점심을 준비했고, 아들의 작품 관리도 도맡아 했습니다. “판화를 찍을 때는 꼭 번호를 매겨야 비싸게 팔 수 있다”든지, “네 작품을 사줄 만한 중요한 사람들과 친구가 돼라”고 조언해 줬습니다. 모난 성격의 휘슬러가 고객들과 여러 문제를 일으키며 소송에 시달릴 때도 어머니만큼은 그의 편이 돼 줬습니다.

그중 하나가 ‘공작실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1876년 영국의 대부호가 휘슬러에게 실내 장식을 의뢰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처음 휘슬러는 작업을 계획대로 잘 풀어나갔습니다. 문제는 작업이 ‘너무 잘 풀렸다’는 것. 작업 중 제대로 ‘필을 받은’ 휘슬러는 무아지경에 빠져 여러 장식을 마음대로 추가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기존 계획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허락 없이 제멋대로 계획을 바꾼 것도 황당한데 휘슬러는 “재료비가 많이 들었다”며 추가금까지 요구했습니다. 당연히 의뢰인은 지급을 거부했고, 이 때문에 휘슬러는 추가된 재료비를 혼자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습니다.
공작실. 원래 런던에 있던 이 작품은 이후 통째로 미국에 옮겨져 워싱턴의 프리어 박물관에서 그대로 전시 중이다. 가운데 그림은 휘슬러가 그린 '도자기 나라의 공주'.
공작실. 원래 런던에 있던 이 작품은 이후 통째로 미국에 옮겨져 워싱턴의 프리어 박물관에서 그대로 전시 중이다. 가운데 그림은 휘슬러가 그린 '도자기 나라의 공주'.
공작실. 중앙의 공작새 그림은 의뢰인과 다투던 중 그려넣은 것이다. 날개를 펼치고 있는 오른쪽 공작새는 의뢰인을, 침착하게 공격을 방어하는 왼쪽 공작새는 자신을 상징한다. 남의 돈으로 이런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니 의뢰인이 싫어할 만도 하다.
공작실. 중앙의 공작새 그림은 의뢰인과 다투던 중 그려넣은 것이다. 날개를 펼치고 있는 오른쪽 공작새는 의뢰인을, 침착하게 공격을 방어하는 왼쪽 공작새는 자신을 상징한다. 남의 돈으로 이런 짓을 마음대로 저지르니 의뢰인이 싫어할 만도 하다.
금 딱지- 얄미운 돈의 폭발(1879). 공작실 사건의 의뢰인을 돈밖에 모르는 공작새 악마로 묘사했다. 세간에는
금 딱지- 얄미운 돈의 폭발(1879). 공작실 사건의 의뢰인을 돈밖에 모르는 공작새 악마로 묘사했다. 세간에는 "공작실 사건의 의뢰인이 이 그림을 보고 기절했고, 몇 년 뒤 미쳐서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샌프란시스코 미술관
하지만 이는 1년 뒤 벌어지는 ‘전설의 싸움’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습니다. 싸움의 발단은 휘슬러의 작품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떨어지는 불꽃’.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생각을 더욱 밀어붙여서 주제를 극도로 단순화한, 현대 추상화에 가까운 작품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9세기 영국 최고의 미술 평론가로 꼽히는 존 러스킨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휘슬러의 생각과 정반대로, ‘미술은 사실적이어야 하며, 도덕적인 생각을 키우고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데에 기여해야 한다’는 게 러스킨의 지론이었습니다.

그러니 러스킨이 갤러리에 전시된 휘슬러의 작품과 200기니(약 4000만원)라는 가격표를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는 작품에 대해 이런 평론을 발표했습니다. “휘슬러를 위해서도, 구매자를 위해서도, 이런 사기에 가까운 자만심 덩어리의 작품을 전시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휘슬러의 작품은 쓰레기다. 휘슬러가 뻔뻔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에 물감을 던진 대가로 4000만원을 요구할 줄은 몰랐다.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로켓(1874). /디트로이트 미술관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로켓(1874). /디트로이트 미술관
최고 권위의 평론가가 이렇게 노골적인 비난을 퍼붓자, 휘슬러의 몸값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있을 휘슬러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때까지 받아본 비판 중에 가장 저속한 비난이군.” 휘슬러는 즉시 명예훼손으로 러스킨을 고소했습니다. 작가가 비판을 이유로 평론가를 고소하는 건 지금도 아주 이례적인 일. 당시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명예를 훼손했으니 손해배상금으로 1000파운드(약 2억원 이상)를 달라”는 게 휘슬러의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78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옆에 위치한 법원에서 역사적인 논쟁이 벌어집니다.

러스킨 측 변호사(존 홀커 경) :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떨어지는 불꽃’의 주제는 뭡니까?

휘슬러 : 야경을 그린 작품이고, 불꽃놀이에 관한 작품입니다.

변호사 : 야경을 그대로 그린 풍경화라고요?

휘슬러 : 그건 아닙니다. 야경과 불꽃놀이를 주제로 그리긴 했지만, 그대로 그리진 않았습니다. 그러면 의미가 없지요. 저는 풍경을 예술적으로 편곡, 즉 변형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에 야상곡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변호사 : 작품을 완성하는 데 얼마나 걸렸나요? 오래 걸리진 않았을 것 같은데….

휘슬러 : 이틀 정도 걸렸던 것 같네요.

변호사 : 고작 이틀만에 만든 작품을 4000만원에 팔겠다고요?

휘슬러 : 아니요, 이틀이 아닙니다. 이 작품에 도달하는 데까지 내 평생이 걸렸습니다. 4000만원은 그에 대한 가격입니다.

멋드러진 휘슬러의 반격에 방청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건 그렇지.” 배심원과 방청객들이 서로 수군대는 말을 듣고 휘슬러는 승리를 직감했습니다. 곧이어 발표된 평결은, 역시나 휘슬러의 승리. “러스킨은 휘슬러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한다.” 하지만 배상금 규모는 기대와 전혀 달랐습니다. “배상금은 1파딩(약 200원)으로 한다.
블루와 실버의 하모니 : 트루빌(1865). /가드너미술관
블루와 실버의 하모니 : 트루빌(1865). /가드너미술관
배심원들은 휘슬러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러스킨의 평론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공격적이었다는 점에도 동의했지요. 하지만 러스킨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물리는 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평론가들의 비판을 원천 봉쇄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심원단은 휘슬러의 손을 들어 주되, 배상금은 사실상 무의미한 수준으로 정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의미였죠. ‘적당히들 하세요.’

뒤늦은 성공

휘슬러의 승리는 ‘상처뿐인 승리’였습니다. 러스킨과 같은 거물을 상대하기 위해 막대한 소송 비용을 들였는데, 이게 고스란히 빚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으로 휘슬러는 마흔네 살의 나이에 파산한 빈털터리 신세가 됐습니다. 휘슬러는 도망치듯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향했고, 재기를 위해 이곳에서 미친듯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휘슬러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평론가에게 소송 건 그 화가’로 널리 알려진 거지요. 덕분에 휘슬러의 작품은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됐고, 덕분에 휘슬러의 예술 철학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생겨나게 됐습니다.
녹색과 은색(1888). /프리어 갤러리
녹색과 은색(1888). /프리어 갤러리
그 모든 싸움과 결말, 파산과 도피를 지켜보며 물심양면으로 돕던 안나. 안타깝게도 안나는 아들이 성공을 거두기 전인 1881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휘슬러는 슬퍼하며 어머니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안나의 결혼 전 이름인 맥닐을 이름에 붙였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제임스 맥닐 휘슬러’야.”

어머니의 이름을 단 휘슬러는 그 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간 쌓인 명성 덕에 작품은 잘 팔리기 시작했고, 영국 예술가 협회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고, 결혼도 했고, 혁신적인 예술 이론에 대한 강연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다만 제멋대로인 성격은 여전했습니다. 어려울 때도 곁을 지켜줬던 조 히퍼넌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고, 쓸데없이 회원들과 싸워서 예술가 협회 회장직을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의 성질을 긁고 다녔고요. 그렇게 휘슬러는 1903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철없는 천재 예술가’라는 일관적인 캐릭터를 유지하다 갔습니다.
회색과 초록색의 하모니(1873). /테이트
회색과 초록색의 하모니(1873). /테이트

어머니의 초상화

휘슬러는 생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그의 철학은 추상미술의 등장 배경이 됐고, 러스킨과의 소송을 비롯해 그가 벌인 여러 사건도 미술사에 길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휘슬러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명성을 영원불멸로 만들어준 건 ‘어머니 그림’이었습니다.

1871년 휘슬러가 어머니를 그린 이 그림은 ‘미국 화가가 그린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힙니다. 심오한 그의 미술 이론, 다사다난하고 복잡했던 그의 삶은 대중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것. 하지만 이 그림은 휘슬러 사후 ‘어머니와 모성애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고, 미국 정부는 1934년 어머니의 날을 기념해 이 그림을 각색한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평론가들의 미국 중심적 사고이긴 합니다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그랜트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과 함께 이 작품을 미술사의 ‘4대 그림’으로 꼽는 평론가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생전의 휘슬러가 이런 상황을 봤다면 길길이 날뛰었을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의도와 완전히 다르게 작품이 소비되고 있는 셈이니까요. 휘슬러는 평생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했고, 어머니 그림에 대해서도 “색조의 조화와 구성을 표현한 것일 뿐, 어머니 그 자체를 그린 것은 아니다”고 말해왔습니다. 작품을 ‘어머니의 초상화’라고 부르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이건 초상화가 아닙니다. 원래 제목인 회색과 검정색의 배열로 불러 주세요.”

여기서 휘슬러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휘슬러는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한편으로는 ‘내 성공은 온전히 내 재능과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어떤 노력과 희생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휘슬러의 어머니' 그림의 발 부분 확대. 당시 유럽 사람들은 넓고 평평한 발을 '농부의 발'이라고 부르며 못생긴 발로 여겼다. 그림 속 안나의 발은 그렇게 묘사돼 있는데, 실제로는 작고 날렵한 모양이었다고 한다. 초상화를 마음에 들어하던 안나는
'휘슬러의 어머니' 그림의 발 부분 확대. 당시 유럽 사람들은 넓고 평평한 발을 '농부의 발'이라고 부르며 못생긴 발로 여겼다. 그림 속 안나의 발은 그렇게 묘사돼 있는데, 실제로는 작고 날렵한 모양이었다고 한다. 초상화를 마음에 들어하던 안나는 "다 좋은데 발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지만, 전체적인 구성의 조화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던 휘슬러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크게 그렸다.
어머니가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구성의 완성도’를 위해 실제보다 발을 훨씬 더 크게 그린 게 첫 번째 증거.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도 함께 그림에 담았다”고 한 마디 덧붙일 법했는데도 절대 그러지 않았던 게 두 번째 증거입니다. 끝까지 그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었고, 예술만 바라보느라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철없는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렸든 간에, 사람들은 작가의 의도를 초월해 그의 작품에서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때로 예술 작품은 이렇게 작가의 의도를 빗겨나가 이를 훨씬 뛰어넘는 감동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마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어떤 존재가 있어서, 그 존재가 잠깐 작가의 손을 빌려 작품을 그리는 것처럼요. 확실히 휘슬러의 천재성과 성취는 미술사에 길이 남을 만큼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넘어, 휘슬러의 삶을 빛나게 하고 그의 작품에 영원한 광채를 비췄던 건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소파에 누운 어머니와 아들(19세기 후반, 수채화). 휘슬러 자신이 의식했든 그렇지 않든, 그의 많은 대표작들 가운데에서도 어머니와 자식을 다룬 작품들은 특별한 느낌을 준다./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파에 누운 어머니와 아들(19세기 후반, 수채화). 휘슬러 자신이 의식했든 그렇지 않든, 그의 많은 대표작들 가운데에서도 어머니와 자식을 다룬 작품들은 특별한 느낌을 준다./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Whistler: A Life for Art's Sake(Daniel E. Sutherland 지음), Whistler's Mother: Portrait of an Extraordinary Life(Daniel E. Sutherland, Georgia Toutziari), 월스트리트저널(WSJ)의 기사 'Whistler's unconventional beauty'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