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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교육 교사모임 ‘아웃박스’가 제작·배포한 디지털성범죄 예방교육 ‘딥페이크는 성착취물이다’ 자료 일부분. 아웃박스 누리집 갈무리
성평등교육 교사모임 ‘아웃박스’가 제작·배포한 디지털성범죄 예방교육 ‘딥페이크는 성착취물이다’ 자료 일부분. 아웃박스 누리집 갈무리

딥페이크(이미지·음성 합성 기술)를 활용한 불법합성물 성범죄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학생, 학부모, 교사의 불안과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교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참담한 현실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는 교사들이 있다.

지난 2017년 꾸려진 성평등 교육을 연구하는 교사 모임 ‘아웃박스’는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당사자 동의 없이 만드는 딥페이크 이미지가 폭력이자 범죄임을 가르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학생들이 생각하고 의견을 나누도록 돕는 수업 자료를 만들어 최근 누리집에 공개했다.

한겨레는 일요일이었던 1일 저녁, 서울시 중구의 한 회의실에서 아웃박스 소속 초등학교 4학년 담임 ㄱ, 과학 전담 ㄴ, 2학년 담임 ㄷ, 3학년 담임 ㄹ교사 등을 만나 딥페이크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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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남자아이들이 3, 4학년쯤 되면 친구의 성기를 때리는 놀이를 하거나 화장실에서 서로 성기를 보려 하는 성적인 행동을 하는데 이를 자세히 보면 타인을 괴롭히며 자신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를 ‘자라면서 으레 하는 장난’으로 넘기지 않는 것, 그런 행동은 전혀 멋지지 않다고 일러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타인에게 성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행동이 지속돼 몸에 배면,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이 기술을 활용해 왜곡된 방식으로 남성성을 과시하고 피해자 고통에 둔감한 딥페이크 성범죄까지 이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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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교육 교사모임 ‘아웃박스’가 만든 디지털성범죄 예방교육 ‘딥페이크는 성착취물이다’ 자료 일부분. 아웃박스 누리집 갈무리
성평등교육 교사모임 ‘아웃박스’가 만든 디지털성범죄 예방교육 ‘딥페이크는 성착취물이다’ 자료 일부분. 아웃박스 누리집 갈무리

인터넷에는 딥페이크 피해가 발생했다는 초등학교 명단이 돌고 있지만 많은 학교에선 이번 사태를 중·고교보단 ‘먼 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교사들은 전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만 돼도 거의 모든 학생이 스마트폰을 갖고 있을 만큼 요즘 아이들에게 디지털 환경은 곧 일상이다. 일상에서 다양한 폭력 위험에 노출돼 있음에도 이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으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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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교사는 “디지털성범죄가 멀리 있는 일일 때 제대로 교육하는 게 필요하다”며 “그렇지 않으면 피해를 당하고도 ‘내 잘못인가?’라고 여기게 되거나 ‘내게 문제가 생겼다’고 어른들에게 말하는 게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들은 디지털성범죄가 ‘성차별적 구조에 의해 발생하는 성별에 기반한 폭력’이라고 가르치는 게 꼭 필요하다고 했다. 수업 교재에 글로벌 보안업체 ‘시큐리티히어로’가 지난해 딥페이크 성착취물 공유 사이트 10곳과 유튜브 등 85개 채널을 분석한 결과 딥페이크 타깃이 된 인물 99%가 여성이었다는 통계를 실은 까닭이다. 하지만 공교육에서 성별에 따라 피해 양상이 다름을 가르치는 건 쉽지 않다.

ㄴ교사는 “여성 피해자가 많다는 사실이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처럼 여겨지다 보니 굳이 여성 가해자, 남성 피해자 사례를 언급해 기계적으로 균형을 맞추거나 성별 이야기는 뭉뚱그린 채 ‘온라인 에티켓’ 정도만 가르친다”고 짚었다.

일부 교사와 보호자들은 디지털성범죄에 대해 논의하는 일 자체를 남자아이들을 가해자로 몰아가는 일로 여겨 꺼리기도 한다. ㄱ교사는 “성별로 편을 가르도록 하는 게 아니라, 위험한 행동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함께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시민으로 길러내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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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제공하는 성교육 자료에서도 이런 문제가 나타난다.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디지털성범죄 예방교육 플랫폼 ‘디클’에 게재된 초등학생(7~12살) 대상 딥페이크 교육 영상을 보면 남학생 내일이는 또 다른 남학생 우동이 얼굴 사진을 웃기게 합성했고 그로 인해 우동이는 놀림을 당한다.

내일이가 친구를 존중하지 않은 잘못을 뉘우치는 내용으로, 사진을 합성해 유포하는 행동이 성폭력이 될 수 있음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잘못하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트에 사진이 올라가 성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성적인 의도를 갖고 나에게 접근할 수도 있다”는 대사 두 마디가 나올 뿐이다.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휵진흥원의 디지털성범죄 예방 교육 플랫폼 ‘디클’에 게재된 7∼12살 대상 딥페이크 관련 영상. 디클 누리집 영상 갈무리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휵진흥원의 디지털성범죄 예방 교육 플랫폼 ‘디클’에 게재된 7∼12살 대상 딥페이크 관련 영상. 디클 누리집 영상 갈무리

성폭력 피해자가 여성이 많다는 현실과 성적인 행동과 말이 폭력일 수 있음을 삭제해버린 교육은 교실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교사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최근 고학년 사이에서 ‘음란마귀 테스트’가 유행한 적이 있는데, 남학생들이 가슴이나 성기 사진을 그린 뒤 여학생이나 다른 남학생에게 이게 뭐처럼 보이냐고 물어봐요. 친구가 기분 나빠하면 “가슴이 아니라 도넛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라면서 낄낄대요. 친구가 불쾌해하는 걸 웃기다고 장난치는 거죠. 이런 장난을 당한 남학생은 또래 남자애들 사이에서 소외되지 않으려 똑같은 장난을 되풀이하기도 해요.”

ㄹ교사는 “아이들끼리 어떤 말을 하며 노는 지 대다수 선생님은 알지 못하고, 문제를 알아차린다고 해도 ‘다른 사람 신체를 가지고 놀리면 안 된다’는 정도의 말만 하고 지나간다”며 “문제 의식을 가진 소수의 교사들도 학습 성취 기준 등에 ‘성평등’ 같은 단어를 모두 삭제해 놓은 (학교) 분위기에서 학부모 민원을 신경 쓰지 않고 성평등 수업을 다양하게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ㄱ교사는 “교실에서 친구들끼리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 성적인 농담이나 (친구를 같은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 바라보기보단 아닌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외모 평가 같은 문화를 용인해 온 교육 현장 분위기가 결국 딥페이크 성범죄마저 ‘놀이’로 자리 잡게 한 것”이라고 짚었다.

성평등교육 교사모임 ‘아웃박스’가 제작·배포한 디지털성범죄 예방교육 ‘딥페이크는 성착취물이다’ 자료 일부분. 아웃박스 누리집 갈무리
성평등교육 교사모임 ‘아웃박스’가 제작·배포한 디지털성범죄 예방교육 ‘딥페이크는 성착취물이다’ 자료 일부분. 아웃박스 누리집 갈무리

교사들은 각 가정에서도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보고 경험하는지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요청했다. ㄷ교사는 “‘숙제 다 하면 유튜브 한 시간 볼 수 있어’라며 스마트폰을 건네주고 마는 게 아니라, 아이가 유튜브를 보는 동안 어떤 걸 보는지 내용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다”고 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어떻게 노는 지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관계를 평소 구축해둬야 피해나 가해를 일찍 발견하거나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들은 거듭 당부했다. “딥페이크 문제가 아니더라도, 성교육이나 성평등 교육을 국·영·수 공부시키듯 아이들에게 최대한 빨리 접하게 하면 좋겠어요.”

정인선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