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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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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때부터 왕따에 시달렸어요. 고3때는 폐쇄병동 입원으로 학교를 반 이상 못 갔습니다. 근데 ‘잘 지낸다’고 선생님이 선의로 써 준 생활기록부의 좋은 말들이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습니다. 한 번 만나 보지도 않고 장애 등록 거부라뇨.”

ㄱ(22)씨의 어머니 ㄴ씨가 지난해 ㄱ씨의 장애 등록을 거부 받은 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지난해 초 ㄴ씨는 딸 ㄱ씨를 지적 장애인으로 등록 신청했다. 지자체에 장애인 등록을 신청하면 국민연금공단은 장애 정도를 심사·판정하고 지자체는 이 결과를 토대로 등록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ㄴ씨는 공단으로부터 ‘장애정도 미해당’이라는 결정을 통보받았다. ㄴ씨가 장애 판정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ㄱ씨의 지능지수가 60에 해당한다는 전문의 소견서나 그간의 진료 기록들에도 불구하고 공단은 “생활기록부 등을 보면 대인 관계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봤다. 공단의 판단 과정에선 단 한 번의 면담도 없었다. 이의신청에도 또다시 같은 결정이 나오자, ㄴ씨는 결국 행정 소송을 제기했다.

1년4개월여만인 지난 10일, 수원지방법원 행정2단독 이정재 판사는 ㄱ씨가 성남시장을 상대로 제기한 장애정도미해당결정처분 취소 소송에서 ㄱ씨 손을 들어줬다. 성남시가 생활기록부 등 국민연금공단 자문의의 간접 평가만을 바탕으로 내린 장애등록 거부가 부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머니 ㄴ씨는 “우리 아이가 등록 장애인으로 살아가며 얻은 불이익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장애 등록을 결정하는 것도 큰 결심이었습니다”며 “그런데 두 번이나 퇴짜를 맞았을 때 들었던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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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는 생후 20일 때 뇌수막염 등 뇌 관련 발작을 겪은 뒤 주의력 장애, 충동성 및 분노조절 등을 겪어 왔다. 7살때부터 또래에 비해 과도하게 활동적인 등 증상을 보이다가 13살 때 심리평가에서 전체 지능지수 65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적장애와 행동장애가 이어지자 이때부터 진료를 받기 시작했다. ㄱ씨는 중학교 1학년때 성폭행을 당했고, 청약 통장을 갈취당하거나 명의 도용의 피해를 보기도 했다. ㄱ씨가 성인이 되면서 어머니 ㄴ씨가 더 이상 진료·금융 기록을 열람할 수 없게 되자, ㄴ씨는 ㄱ씨를 보호하기 위해 장애 등록을 결심하게 됐다. ㄴ씨는 “등록을 거부당하고 알아보니, 저와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며 “진단의 정의나 판단도 너무 모호하다 보니, 보호와 지원의 밖에 내몰린 장애 가족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국민연금공단은 ‘간접 증거’로만 ㄱ씨의 장애 등록을 거부했다. 공단은 ㄱ씨에게 “장애정도 심사용 진단서 및 임상심리검사상 지능지수 60으로 평가되었으나 잠재 능력과 관련된 소검사 수행을 고려했을 때 경계선 수준까지 고려 기재된 점, 소항목 수행정도, 학교생활기록부상 교과학습발달상황 및 행동특성, 치료경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장애정도판정기준상의 지적장애 정도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ㄱ씨를 진찰한 전문의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며 성남시의 판단에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원고를 직접 관찰하고 검사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원고의 지능지수가 70 이하로서 지적장애 상태에 있다는 의학적 소견을 밝히고 있고, 그 검사과정에 오류가 있다고 볼 아무런 자료가 없다”며 “사건 처분 당시 원고가 지적장애 등급외에 해당한다는 견해를 밝힌 국민연금공단의 자문의들은 학교생활기록부 등 간접적인 자료만으로 평가하였을 뿐, 원고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다”고 비판했다.

최근 법원에선 간접자료만으로 장애 여부를 판단하는 공단의 문제를 지적하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6월 인천지방법원 역시 지적장애 진단을 받은 40대가 부천시장을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인천지법은 “지적장애가 아니라고 판단한 국민연금공단 측 자문의들은 학생부 등 간접 자료만으로 평가했다”고 질타했다. 법원은 이어 “임상 심리 검사 결과 (원고는) 인지능력 부족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또래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며 “(성적이 최하위권이 아닌) 학생부 기록만으로 원고의 지능지수가 70을 넘는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ㄱ씨를 대리한 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박민서 변호사는 “간접증거만으로 판단하는 공단의 판단에 문제의식을 가지는 판결이 이어지는 것은 환영할만 한 일”이라며 “실제로 원고를 관찰한 주치의들의 자료가 판단에 더 반영되어야 하며, 공단의 진단 시스템 자체가 개선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장현은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