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고집쟁이. 과학적 지식을 아무리 쌓아도 세상살이에서 얻은 감각과 기억은 좀처럼 버리지 못한다. 이를테면, 색깔은 물체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사과가 빨간 것은 껍질이 본래 빨갛기 때문이고, 나뭇잎이 초록인 건 원래 초록빛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라는 것. 하지만 색깔은 빛과 사물, 그리고 그걸 보는 인간의 감각기관이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칠흑같이 어두운데도 물체가 보인다면, 그곳에 조금이나마 빛이 있기 때문이다. 깜깜밤중에 고양이 눈이 야광 불빛처럼 보이는 것도 자체 발광이 아니라, 고양이 눈에 들어간 빛을 망막에서 반사하기 때문이다.
내 감각 너머에 뭔가가 있다는 걸 알 때, 이 세계는 더욱 경이롭게 다가온다. 감각할 수 없는 세계가 내 감각의 세계와 잇대어 있다. 존재하지만 내 몸의 감각으로는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우리는 보통 빛을 색깔로 인식한다(명암도 있지만). ‘빨주노초파남보’. 눈에 보이는 빛의 범위를 벗어나면 보이지 않는다. 색깔도 없다. 보라색 너머에 있는 빛은 ‘자외선’, 빨간색 너머에 있는 빛은 ‘적외선’. 너머의 빛.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있다니! 그저 자외선 차단제(선크림), 자외선 살균기, 적외선 열감지기 같은 물건을 통해 ‘그런 게 있나 보다’ 하는 빛.
‘자외선, 적외선’이란 말이 생기고 난 다음에 ‘가시광선’이란 말이 만들어졌을 거다. ‘경계 너머’를 알아차리고 나서야 경계선 안쪽이 선명해지고 서둘러 이름을 붙인다. 경계 너머는 그만큼 결정적이다.
모든 존재는 결핍, 결여, 파열, 불완전함을 안고 있다. 감각을 믿지 않음으로써, 달리 말해 감각의 한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앎의 세계로 다가간다. 그러니 오늘도 외친다, 오직 모를 뿐!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