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오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열린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맨 오른쪽), 김재철 전 문화방송(MBC) 사장(오른쪽에서 둘째) 등 증인들이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4일 오후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열린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장(맨 오른쪽), 김재철 전 문화방송(MBC) 사장(오른쪽에서 둘째) 등 증인들이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홍원식 | 동덕여대 ARETE 교양대학 교수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의 류희림 위원장이 임기 종료 하루 만에 다시 돌아왔다. 제5기 방심위에서 ‘민원사주’ 의혹과 온갖 편파 심의 논란으로 방심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인물이 기습적으로 재위촉되더니만, 당일 오후 여권 쪽 위원들만이 문을 걸어 잠근 채 진행한 회의에서 다시 방심위원장으로 호선된 것이다. 방심위에 온갖 망신을 가져온 류 위원장의 재등장은 방심위 직원들뿐만 아니라, 신속 심의 남발과 그가 임명한 선거방송심의위원회(선방위)의 온갖 무리한 심의에 시달려온 방송계에도 또다시 악몽을 예고하고 있다.

몇번이나 반복해온 질문이지만, 도대체 이 정부는 언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길래 이런 일을 되풀이하는지 거듭 묻지 않을 수 없다. 현 정부가 들어서고, 이전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방통위)과 한국방송(KBS) 남영진 이사장 등을 쫓아내더니 스핀닥터임을 자랑스레 자임하던 이동관씨를 방통위원장에 임명하고, 난데없이 방송과 아무 관계 없는 신문사 출신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앉혀서 애꿎은 방송 진행자들을 예고도 없이 교체한 건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방통위에서는 김효재 위원장 직무대행, 이동관 전 위원장, 김홍일 전 위원장 등이 차례로 일회용 반창고처럼 자리를 메꿔가며 공영방송 이사 해임과 선임 절차를 의결했고, 이제는 또 다른 논란의 인물인 이진숙 전 문화방송(MBC) 본부장에게 바통을 넘기려 하고 있다. 언론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 절차와 관례를 무시한 채 이동관, 류희림, 이진숙 등 가장 비판받고 논란이 되는 인사들만 골라서 미디어 정책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히려 하는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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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대하는 현 정부의 무도한 행태에 대해 국민들은 이미 심판을 내렸다. 지난 총선에서 야당의 일방적인 압승 배경에는 날마다 보고 듣는 언론이 누구 때문에 망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국민들의 냉정한 평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심판을 받았음에도, 어떻게든 방심위를 장악하고 문화방송 사장을 바꾸면 모든 게 자신들 뜻대로 되리라고 믿는 현 정권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더 이상 해줄 말도 쓸 약도 없다.

얼마 전 우원식 국회의장은 방송 4법에 대해, 공영방송 이사 선임 절차를 중지하는 조건으로 여야가 협의체를 구성해 새로운 방안을 찾아보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이는 야당 지지층도 반발할 제안이었지만, 그 부담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장으로서 정치 회복을 위해 내린 어려운 결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여당과 정부의 반응은 일말의 고민도, 대안도 없이 그냥 갈 데까지 가 보자는 것이다. 류 위원장의 재위촉과 밀실 연임 결정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좋으니 끝까지 해보겠다는 선언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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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우리가 정치적 타협도 없고 국민들 눈치도 안 보는 이런 형벌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행정관이 깜빡 잊어서 디올 백 반납을 못 했다거나, 검찰이 소환을 한 것인지 소환을 당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뉴스들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가끔은 이 모두가 어디선가 꾸며낸 우화인 것처럼 몽롱하게 느껴진다. 뇌가 없는 허수아비, 심장이 없어 사랑을 못 느낀다는 양철 나무꾼, 용기 없는 사자 같은 일당이 강아지를 데리고 있는 한 소녀와 함께 마법사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는 얘기 정도가 대충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원래 ‘오즈의 마법사’ 원작은 오즈가 금의 단위 온스를 상징하고, 허수아비는 미국의 농민, 양철 나무꾼은 공장노동자인 것으로 해석되며, 전체 이야기는 금본위제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을 은유적으로 비유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보수 정치권력은 비록 정의롭지는 못하더라도 더 풍부한 교육 자원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지식과 전문성, 그리고 나름의 품격을 갖췄다고 인식되었다. 어쩌면 해방 후 친일 세력들이 완전히 청산될 수 없었던 이유도, 모든 것이 결핍된 당시 상황 속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최소한의 지식과 행정 자원을 어쩔 수 없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런 나름의 장점은 사라지고, 이제 보수 정치권력은 두뇌도, 심장도, 용기도 없이 그저 누군가를 뒤따라 오즈를 찾으러 가는 무리 따위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어서 보수가 두뇌, 심장, 용기를 되찾길 바란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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