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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협은 1986년 8월12일 전태일기념관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유가협 제공
유가협은 1986년 8월12일 전태일기념관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유가협 제공

학생운동·시국사건 구속자 가족
‘민가협’ 결성 뒤 유가협도 설립
시위현장서 지지·응원 역할 넘어
양심수 석방, 고문 근절 운동 참여
인권운동에 ‘한획’그은 피해자단체

석방된 장기수 이철씨 결혼식 뒤
우종원 어머니 내 품에 안겨 통곡
그날 ‘평생 이들과 함께할 것’ 다짐

유가족이 되기 전에는 유가협이란 단체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유가협은 1986년 8월12일에 창립되었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님 이소선, 박영진 열사의 아버님 박창호, 송광영 열사의 어머님 이오순, 박종만 열사의 부인 조인식 등 12분의 유가족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다. 모두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신 자결한 열사들의 부모 또는 가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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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아직도 이 나라의 주인이어야 할 민중은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와 마땅히 획득해야 할 권리를 유보당하고 착취당한 채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조차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 참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척박한 땅 위에 진정한 민주의 꽃을 피우기 위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피와 눈물을 흘려야 할지를 생각하면 우리 유가족들은 심장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슬픔과 분노를 가눌 길이 없습니다. (중략) 이에 우리 가족들은 고인들이 생전에 그리도 목메어 그리던 민족통일과 민중이 주인되는 새날을 위해 앞장서 투쟁할 것을 온 세상에 선언하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유가협은 민주화운동 과정 중에 자신의 목숨을 ‘민주의 제단’에 바친 열사들 또는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의 유가족들이 고인들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유가협이 결성되기 전인 1985년 12월12일에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 만들어졌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민가협과 유가협을 구분하지 못한다. 민가협은 시국사건이나 정치적 이유로 구속된 가족들로 구성된 단체다. 당시 구속자가 가장 많았던 학생운동 구속자 가족들이 그 중심이었다. 거기에 구속노동자 가족, 조작간첩 구속자 가족들이 단체로 가입했고, 나중에는 유가협도 민가협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양심수후원회도 만들어져서 민가협 활동을 지원하였다. 유가협과 민가협은 학생·노동자들의 시위 현장에 참여하면서 그들을 지지·응원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집회와 시위대를 보호하는 역할에도 적극적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때 ‘최루탄 없는 날’ 행사에는 전경들의 최루탄 발사기에 장미꽃을 꽂아서 비폭력시위의 전범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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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3월4일 광주·대전 등지에서 올라온 민가협 회원들이 청와대 앞길에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1988년 3월4일 광주·대전 등지에서 올라온 민가협 회원들이 청와대 앞길에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피해자 단체의 등장

민가협과 유가협은 공동으로 양심수 석방, 고문 근절 운동에 참여했다. 1988년 12월14일 이들 단체는 설악산의 백담사까지 쫓아가 전두환 구속을 주장하는 시위를 함께 벌였다. 당시 학생운동권에서는 ‘전두환·노태우 체포 결사대’를 만들어 전두환의 구속을 주장하는 투쟁을 집중적으로 전개했고, 국회에서는 광주특위가 진행됐다.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내몰린 전두환은 맹탕 사과문을 발표하고 백담사로 은둔했다. 눈으로 뒤덮인 설악산 백담사 입구까지 쫓아가 전두환 구속을 주장하는 투쟁을 벌였던 민가협과 유가협은 거의 한 몸처럼 보였다.

민가협과 유가협의 등장은 우리나라 제1세대 인권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1세대 인권운동은 대략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펼쳐졌다. 주로 정치범(양심수) 석방, 고문근절 운동과 같은 시민·정치적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위원회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만들어진 것은 1974년이었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절정에 달했던 그해 긴급조치가 남발되고, 유신에 반대하거나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활동 일체가 처벌 대상이 되었던 시기다.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재건위 사건,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 등이 모두 그해에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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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먼저 앰네스티 한국지부가 1972년 결성됐지만,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국내 인권문제에 직접 대응해 활동하지 못한다는 국제앰네스티의 가이드라인과 중앙정보부의 감시 탓에 활동이 제한적이었다. 이런 사정으로 한국 인권운동은 종교계를 중심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또 이 시기엔 인권변호사들이 등장해 정치범 재판과정 등에서 적극적인 변호활동을 펼쳤다.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겪는 구속자의 가족들과 유가족이었지만, 유가족들은 구속자 가족들이 부럽기만 했다. 감옥에 있을지언정 구속자 가족들의 자식들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1988년에는 오래 수감생활을 했던 장기수들이 속속 석방되기 시작했다. 석방된 장기수 중에는 재일동포간첩단 사건으로 10년 동안 복역했던 이철씨도 포함됐다. 그에게는 구속 전 결혼을 약속한 약혼녀 민향숙씨가 있었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김만조씨는 수감 중인 이철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조작간첩사건으로 구속된 이들의 석방을 위해 헌신했다. 그 시절에 간첩으로 몰린 정치범 석방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88년 10월28일, 10년 동안 미루어왔던 이철, 민향숙의 결혼식이 명동성당에서 있었다. 그날의 결혼식은 마치 민주화운동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과 같았다. 김수환 추기경이 주례를 섰고, 결혼식이 끝나고는 퍼레이드를 했을 정도다. 농성 중이던 유가족들도 그곳에 축하하러 갔다. 나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못 갔는데, 저녁에 결혼식에 다녀온 가족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1989년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이소선 어머님(가운데)과 우종원 열사의 어머니 이계남씨(왼쪽). 전태일재단 제공
1989년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이소선 어머님(가운데)과 우종원 열사의 어머니 이계남씨(왼쪽). 전태일재단 제공

내 품 안에서 울던 종원이 엄마

“어머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내 물음에는 대답도 않고, 소주를 가져오라고 했다. 농성장 규칙 중 하나가 금주였는데, 워낙 표정들이 어두워 술을 사다 드렸다. 그러자 어머니, 아버지들이 깡소주에 ‘병나발’을 불었다. “우리 종태가 장기수로 감옥에 가 있었으면, 얼굴이라도 보고, 석방돼 결혼하는 것도 볼 텐데, 종태야. 너는 어쩌려고 죽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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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태 열사(광주 5·18의 진상을 알리려고 1980년 6월9일 17시50분께 신촌 이화여대 앞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분신)의 어머니가 먼저 울기 시작했다. 그걸 시작으로 우종원 어머니가, 김성수 어머니가 따라 울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어머니가 울었다. 아버지들은 말없이 소주잔을 비우고 연신 담배를 피웠지만, 그들도 울음을 감추지 못했다. 감옥에 있으면 면회라도 갈 수 있을 텐데, 석방되면 안아보기라도 하고, 결혼하는 걸 볼 수 있을 텐데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의문사 가족들은 제 자식이 죽은 사연조차 알지 못하니 더욱 서러웠다. 나도 동생을 잃고 그립고 서러워 죽겠는데, 저 엄마들은 오죽하겠냐.

유가족은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싫어했다. “그만들 울어. 나는 태일이와 평생 같이 사는 거야. 나는 태일이하고 같이 투쟁하는 거야. 왜 자꾸 묻으라고 해. 난 안 묻을 거야.” 그때 이소선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이후에 그 말을 다른 가족들도 따라 했다. 그 한쪽 구석에서 “우리 종원이 보고 잡다, 우리 종원이 너무 불쌍해” 하면서 울고 계신 우종원의 엄마를 보았다. 나는 그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 엄마가 내 품에 안겨 “보고 잡다”를 거듭하며 엉엉 울었다. 내 윗옷이 다 젖을 정도였다. 우종원은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81학번이었다. 홀로 행상으로 살림을 꾸려 서울대에 보냈던 그 아들이 어느 날 변사체로 돌아온 지 3년이 넘었다. 같은 81학번이었던 나를 그 엄마는 각별히 살갑게 대해주었다. 유가족들은 그를 ‘울보 엄마’로 불렀다. 그 어머니와 이소선 어머니는 나와 담배 친구이기도 했다.

그날 밤의 농성장이 36년이 지난 오늘에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날 밤 어머니들의 눈물바다를 보고 나는 그들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