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
0
‘돌풍’은 진영과 관계없이 모두 다 똑같은 정치인의 모습을 다룬다. 넷플릭스 제공
‘돌풍’은 진영과 관계없이 모두 다 똑같은 정치인의 모습을 다룬다. 넷플릭스 제공

지난달 28일 공개된 넷플릭스 12부작 드라마 ‘돌풍’에서 정치인들은 진영과 관계없이 모두 똑같다. “죄 지은 자가 부끄러워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질주하던 이들도 제 허물 앞에서는 관대하다. 정경유착을 끊고 재벌개혁을 완성하겠다던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 장일준(김홍파)은 “야당 때는 원칙을 지키는 판사가 좋더만, 요 자리 오니까 내 맘을 알아주는 판사가 제일 좋다”며 자신과 가족의 비리를 수사하려는, 한때 같은 곳을 바라보던 이들을 막으려 한다. 개혁을 꿈꿨던 전대협 문화선전국장 출신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도 전대협 의장 출신 남편 한민호(이해영)가 재벌에게 투자받은 사실을 덮으려고 젊은 날부터 지켜왔던 신념을 스스로 흔든다. 지난 2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김용완 감독은 “누구나 극 중 인물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다. 한끗 차이다. 그런 선택에 경종을 울리면서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약자가 부패한 정치권력에 맞서며 통쾌함을 주던 티브이(TV) 정치드라마가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고 선과 악을 명징하게 나눴다면, 이제는 누구나 각자가 정의라고 믿는 신념을 갖고 질주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돌풍’에서 부패한 정치권력을 응징하는 주인공인 국무총리이자 나아가 대통령이 되는 박동호(설경구) 역시 “개혁을 개혁하기 위해” 거짓에는 더 큰 거짓으로 맞선다. 김용완 감독은 “각자의 신념을 가진 인물들이 그 신념 때문에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박경수 작가도 넷플릭스를 통해 이 드라마를 “박동호의 ‘위험한 신념’과 정수진의 ‘타락한 신념’이 정면으로 충돌해 대한민국 정치판을 무대로 펼치는 활극”이라고 설명했다.

소시민 영웅(‘어셈블리’)과 인간적인 면모와 리더십을 갖춘 대통령(‘프레지던트’)을 내세우며 희망을 이야기했던 정치 드라마들. 사진은 ‘어셈블리’의 한 장면. 한국방송 제공
소시민 영웅(‘어셈블리’)과 인간적인 면모와 리더십을 갖춘 대통령(‘프레지던트’)을 내세우며 희망을 이야기했던 정치 드라마들. 사진은 ‘어셈블리’의 한 장면. 한국방송 제공
소시민 영웅(‘어셈블리’)과 인간적인 면모와 리더십을 갖춘 대통령(‘프레지던트’)을 내세우며 희망을 이야기했던 정치 드라마들. 사진은 ‘프레지던트’의 한 장면. 한국방송 제공
소시민 영웅(‘어셈블리’)과 인간적인 면모와 리더십을 갖춘 대통령(‘프레지던트’)을 내세우며 희망을 이야기했던 정치 드라마들. 사진은 ‘프레지던트’의 한 장면. 한국방송 제공

극 중 대사처럼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은” 현실을 비판하는 정치드라마의 등장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정치혐오와 무관치 않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기능해야 할 정치가 정쟁에 치우쳐 갈등을 조장하면서 유권자들이 진보와 보수 모두 똑같다고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변화”라고 풀이했다. ‘돌풍’에서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만 이 나라에 빛은 없다. 어둠이 더 큰 어둠을 상대하고 있을 뿐”따위의 정치혐오에 기반한 대사가 자주 등장한다.

광고

이런 환경에서 ‘부패 권력을 응징하는 정의 구현’이라는 극적 전망은 드라마에서조차 이야기하기 어려워졌다. ‘프레지던트’(2010)에서처럼 현명하고 올곧은 대통령, ‘어셈블리’(2015)에 등장하는 소시민의 정치 입문 등 시대가 바라는 이상적인 지도자상을 내세워 아무리 답답한 현실도 우리끼리 바꿔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겼던 정치 드라마들이 이제는 기대할 것이 없다며 초현실적 영웅의 등장만을 꿈꾸는 것이다. 박경수 작가는 “이미 낡아 버린 과거가 현실을 지배하는 답답하고 숨 막히는 오늘의 현실을 리셋하고 싶은 갈망에서 시작한 작품”이라며 “이제는 초인이 답답한 세상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토대를 만들기를,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니까 드라마에서라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정치 드라마는 보좌관(‘보좌관’), ‘대통령 권한 대행(‘60일 지정생존자’) 등 다양한 직업군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사진은 ‘보좌관’의 한 장면. 제이티비시 제공
정치 드라마는 보좌관(‘보좌관’), ‘대통령 권한 대행(‘60일 지정생존자’) 등 다양한 직업군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사진은 ‘보좌관’의 한 장면. 제이티비시 제공
정치 드라마는 보좌관(‘보좌관’), ‘대통령 권한 대행(‘60일 지정생존자’) 등 다양한 직업군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사진은 ‘60일 지정생존자’의 한 장면. 티브이엔 제공
정치 드라마는 보좌관(‘보좌관’), ‘대통령 권한 대행(‘60일 지정생존자’) 등 다양한 직업군으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사진은 ‘60일 지정생존자’의 한 장면. 티브이엔 제공

정치 드라마의 소재가 확장된 측면도 있다. 정치 드라마는 1980~90년대 문화방송(MBC) ‘공화국 시리즈’처럼 사실주의적 시선으로 시대를 담아내다가 2000~2010년대에 이르러 ‘시티홀’(2009), 대물’(2010), ‘프레지던트’ 등 인간적인 면모와 리더십을 겸비한 이상적인 지도자를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5·18 민주화운동 등 현대사의 비극에 대한 정치적 성찰을 담고,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2021 ‘오월의 청춘’ 등)에 주목하고, 보좌관(2019 ‘보좌관’)과 대통령 권한대행(2019 ‘60일 지정생존자’)처럼 정치 세계의 다양한 직업군을 들여다보는 등 외연을 확장했다. 올해 들어 ‘삼식이 삼촌’처럼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경제발전이라는 명분은 같지만 방향이 다른 사람들의 신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윤석진 교수는 “드라마의 본질은 갈등 제시와 해결인데, 현실 정치가 정치의 기능을 상실하고 드라마보다 더 강한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는 상황이기에 현실 정치보다 더 강한 갈등을 만들려고 정치를 소재로 다양한 ‘변종’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광고
광고
‘돌풍’. 넷플릭스 제공
‘돌풍’. 넷플릭스 제공

다만 최근 정치 드라마가 여러 인물과 사건을 열거하면서 눈길끌기에 바빠 개연성이 약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식이 삼촌’에 이어 ‘돌풍’도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그 과정이 명쾌하지 않고 박동호의 마지막 선택에도 의견이 갈린다. 박경수 작가의 전작인 ‘추적자’ ‘펀치’ 등과 달리 만듦새가 성글고 인물들의 동기가 약해 몰입감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나온다. 김용완 감독은 “박동호의 마지막을 어떤 식으로 묘사할지 고민했고 여러 의견을 예상했지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며 “정치 드라마는 시의성이 중요하고 현실 정치와 맞닿아 있어야 해서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특정 인물과 사건을 반영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남지은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