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선배!”
목소리를 높여 불렀는데 선배가 들은 척을 안 한다. 헤드폰 때문인가. 슬슬 짜증이 나려던 차에 드디어 선배와 아이컨택에 성공했다. “헤드폰에서 노이즈 캔슬링(Noise Cancelling)을 켜고 있어 안 들렸다”는 선배의 해명에 무슨 소린가 싶어 헤드폰을 껴봤다. 노이즈 캔슬링을 켜자 난방기 소리가 사라졌다. 주변의 웅성대던 목소리도 사라졌다. 세상에는 나와 방탄소년단(BTS) 둘뿐이었다.
위상 정반대 파동 만들어 소음 상쇄
2019년 10월 말 출시된 애플의 신형 무선이어폰 ‘에어팟 프로’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새로 추가해 관심을 끌었다. 오디오 전문 브랜드로 유명한 미국 보스와 일본 소니도 이미 노이즈 캔슬링 기술을 탑재한 헤드폰과 이어폰을 출시했다.
노이즈 캔슬링은 쉽게 말해 소리에 소리를 더해 불필요한 소리를 없애주는 기능이다. 소리는 물리적으로 공기(매질)의 진동으로 이뤄진 파동이다. 파동과 파동이 만나면 간섭이 일어나 증폭되거나 상쇄된다. 노이즈 캔슬링은 이 원리를 이용한다. 소음과 위상이 정반대인 파동(소리)을 생성시켜 소음 파동을 상쇄시킨다. 소음을 인위적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원리다.
다만 노이즈 캔슬링은 밀폐가 전제돼야 한다. 노이즈 캔슬링 기술이 들어간 이어폰은 커널형 디자인(귀 안쪽 외이도까지 이어폰이 삽입되는 형태)이 대부분이고, 헤드폰도 이어캡이 귓바퀴를 덮을 만큼 크다.
이는 소음이 만들어내는 파동을 정확히 분석하기 위해서다. 이어폰(또는 헤드폰) 바깥에서 발생한 소음은 이어폰을 통과하면서 크기(파동의 진폭)가 줄어들고 파형도 바뀐다. 노이즈 캔슬링은 이어폰에 달린 마이크로 이렇게 변형된 파동을 잡아내고, 이 파동의 역파동을 만들어낸다. 이 때문에 귀 안쪽이 밀폐되지 않으면 다른 소리가 유입돼 파동을 정확히 추출하기 어렵다.
마이크를 통해 유입된 소음은 DSP(디지털신호프로세서)가 분석한다. DSP는 소리를 분석하는 일종의 컴퓨터 칩이다. 소리의 파장과 진폭을 측정한 뒤, 이와 위상만 정반대인 파동을 만들어 귀 안쪽으로 쏴준다.
실시간으로 노이즈 캔슬링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DSP의 처리속도가 얼마나 빨라야 할까. 헤드폰의 경우 일반적으로 이어캡의 두께가 1~2cm다. 상온인 25도를 기준으로 공기 중에서 소리는 1초에 약 346.5m를 나아간다.
노이즈 캔슬링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이론적으로 0.03~ 0.06ms(밀리초·1ms는 1000분의 1초) 안에 DSP가 소리를 듣고 파형을 분석해 역파동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이어캡 두께를 음속으로 나누면 된다).
그런데 실제로 노이즈 캔슬링 제품의 DSP의 처리속도는 0.25ms 수준으로 알려졌다. DSP의 처리속도가 같아도 소리의 높낮이(파장의 길이)에 따라 DSP가 처리할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가령 1초에 진동수가 10회인 파동(저음)과 100회인 파동(고음)이 있다고 하자. 한 파장이 긴 저음은 역파동을 생성할 시간이 충분히 생긴다. 반면, 한 파장이 짧은 고음은 역파동을 생성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고음보다는 저음에서 노이즈 캔슬링 효과가 좋다.
예를 들어 송풍기에서 나오는 소음의 진동수에 해당하는 100Hz(헤르츠) 파동은 파장이 약 3.5m여서 DSP가 역파동을 만들어낼 시간에 2.5ms가 추가된다. 일반적으로 4분의 1 파장 이전에 역파동이 산출되면 사람은 소음이 줄어들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3.5m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0.875m를 음속(346.5m/s)으로 나누면 시간을 얻을 수 있다.
반면 TV 화면조정음과 같은 진동수 1kHz 이상의 고음은 역파동 생성 시간이 0.25ms보다 작다. 그래서 현재 기술로는 1kHz 이상의 소음은 노이즈 캔슬링 효과가 떨어진다.
현재 노이즈 캔슬링 기술로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소음은 대부분 제거할 수 있다. 특히 대중교통을 자주 타는 사람에게 노이즈 캔슬링 효과가 가장 크다. 환풍기 소음, 버스 엔진, 지하철 소음 등이 1kHz 이하의 저음이기 때문이다. 김도헌 대림대 음향공학과 교수는 “DSP의 성능이 향상돼 처리속도가 0.1ms 수준이 되면 우리가 듣는 대부분의 소리에 노이즈 캔슬링이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이즈 캔슬링 기술이 처음 등장한 건 1930년대지만 헤드폰 등에 탑재된 건 2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노이즈 캔슬링을 위해서는 헤드폰에 마이크 2개와 드라이버, DSP 칩, 배터리 등을 탑재해야 하는데, 그러면서도 가볍게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초기 DSP 처리속도도 5ms 수준으로 느린 편이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DSP 칩의 크기가 작아졌고 배터리 성능도 개선되면서 노이즈 캔슬링도 최근에서야 빛을 발하게 됐다.
놀이공원에도 노이즈 캔슬링이 있다
사실 노이즈 캔슬링은 음향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익숙한 기술이다. 콘서트홀이나 방송국 스튜디오는 물론 휴대전화에도 노이즈 캔슬링 기술이 탑재돼 있다. 이를 통틀어 ‘AEC(능동형에코캔슬링)’라고 부른다. 노이즈 캔슬링이 주변의 소음을 전반적으로 줄이는 기술이라면 AEC는 여러 파동 중 특정 파동만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기술이다. 노이즈 캔슬링과 기본 원리는 같다.
A와 B가 분리된 공간에서 각자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각 공간에는 마이크와 스피커가 설치돼 있다. A가 ‘아!’라고 외치면 B의 스피커에도 ‘아!’가 들린다. 동시에 이 ‘아!’는 B의 마이크를 타고 들어가 A의 스피커에 다시 나와 소리가 증폭되면서 ‘삐’ 소리가 난다. 흔히 ‘하울링(howling)’으로 부르는 현상이다.
AEC는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개발됐다. A의 공간에 AEC를 적용하면 되돌아오는 A의 소리를 선택적으로 없앤 뒤 B의 소리만 들리게 할 수 있다. 이때도 노이즈 캔슬링처럼 역파동을 이용한다. 가끔 휴대전화로 통화할 때 본인의 목소리가 울리듯 들린 적이 있을 것이다. 휴대전화에 탑재된 AEC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생긴 현상이다.
최근에는 음향기기 이외에 다른 산업에도 노이즈 캔슬링을 적용한다. 노이즈 캔슬링을 이용하면 불필요한 소음을 없애고 필요한 소리를 더 잘 들리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공원 매표소처럼 주변 소음이 심한 곳이 대표적이다. 매표소 바깥에 마이크를 설치해 소음을 녹음한 뒤 이 소음과 정반대의 파형을 만들어 매표소 창구 안 스피커로 쏜다. 그러면 매표소 창구 직원이 고객의 목소리만 깨끗하게 들을 수 있다.
실제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에서는 미 정부가 국경검문소에서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노이즈 캔슬링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가령 엔진 소음이 심한 트럭에 탄 사람과 검문소 직원이 대화를 하는 경우 트럭의 소음을 측정해 이를 상쇄시키는 파동을 내보내서 목소리만 남긴다.
최근에는 노이즈 캔슬링 기술을 탑재한 자동차도 출시됐다. 자동차는 창문을 모두 닫으면 밀폐 상태가 되고, 엔진과 탑승자의 거리도 일정해 소음이 규칙적으로 발생한다. 자동차의 엔진에 달린 마이크와 자동차 내부에 있는 마이크를 통해 소음을 분석한 뒤 역파동을 만들어 소음을 상쇄한다.
김 교수는 “국내에서는 소음이 심한 환경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노이즈 캔슬링 기술을 적용한 사례가 있다”며 “다양한 산업에 노이즈 캔슬링을 적용하면 소음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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