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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해의 역사속 한식]쌀

입력 | 2016-10-26 03:00:00


황광해 음식평론가

 정조 20년(1796년) 3월, 우의정 윤시동의 ‘신임 제주목사 유사모의 근황’ 보고다. 상황이 복잡하게 얽혔다. 제주도는 척박하여 쌀 등 곡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 늘 호남 일대에서 곡물을 실어 보냈다. 조정에서는 신임 제주목사에게 곡물을 전하도록 명했다. 유사모는 한양에서 베, 후추, 단목 등 6000냥쯤 되는 물건을 지니고 호남 해안으로 갔다. 그는 현지에서 돈 6000냥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막상 곡물을 사기가 힘들었다. 현지에서는 그 돈이 백미 1000섬에 불과했다. 조정의 명은 ‘절미 2000섬의 곡물’을 지니고 제주에 부임하라는 것이었다. ‘절미(折米)’는 싸라기를 뜻하지만, ‘쌀로 환산할 때의 양’이라는 의미도 있다. 민간 사상(私商)에는 백미만 있을 뿐 다양한 곡물이 없었다. 백미는 비싸고 보관, 운반도 불편했다. 벼나 다른 곡물을 가져가서 제주 현지에서 도정하는 것이 낫다. 조정에서는, 호남 일대에 보관한 국가 소유 곡물 중 벼(租·조), 밀(牟·모) 등을 가져가는 걸로 결정한다.(일성록)

 조선시대에는 오곡에 메밀(蕎麥·교맥), 밀 등을 더하여 식량으로 사용했다. 오곡은 쌀, 기장, 조, 보리, 콩이다. 이 가운데 기장은 황미(黃米)로, 조는 소미(小米)로 불렀다. 이에 비해 쌀은 대미(大米)로 부르기도 했다. 모두 주요한 식량으로 여겼다.

 쌀은 다른 곡물에 비해 귀하고 비쌌다. 선조 10년(1577년) 1월, 충청도 천안에서 시작된 돌림병이 한양까지 전해진다. “보리밥을 먹어야 병을 면할 수 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기록에는 ‘온 도성이 소란스럽게 보리쌀을 구입하였으므로 보리쌀 값이 뛰어올라 겉보리 값이 백미 값과 같았다’(조선왕조실록)고 전한다. 원래 보리쌀은 쌀값의 반 이하였다.

 우리는 쌀로 밥, 떡, 죽, 술을 만들어 먹었다. 고려시대에는 쌀로 죽을 끓여 도성의 회랑에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구나 퍼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고려도경) 목은 이색은 “흰쌀로 쪄낸 떡이 크고 두툼하여라/정결하고 맑으니 가히 신명에게 올릴 만하다”고 노래했다. 인조 2년(1624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조선통신사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온 강홍중(1577∼1642)은 ‘동사록’에서 “일본에는 백미로 누룩을 만들고 백미로 밥을 쪄서 담근 제백(諸白)이라는 명주가 있다”고 했다. 밀, 보리 등 잡곡으로 누룩을 만들고 지에밥을 지어 술을 빚는 조선과 달리 일본인들은 쌀로 밑술을 만든 다음 지에밥을 더하여 술을 빚었음을 알 수 있다.

 쌀을 헤아리는 단위는 지금과 비슷했다. 10홉(合)은 한 되(升·승), 10되는 한 말(斗·두)이다. 다만 한 섬(石·석)은 15말이다. 정조 19년(1795년) 7월의 기록에, ‘북한산성 언저리 가난한 집 112호에 1호당 2말씩 도합 14섬 14말을 지급하였다’(일성록)는 내용이 있다. 224말이 14섬 14말이니 결국 한 섬은 15말이다. 중국 송나라의 제도를 따라 원래 10말이 한 섬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15말로 바뀌었다. 

 갱미(粳米)는 밥을 짓는 멥쌀이다. 한편으로 갱미는 잘 쓿은쌀을 이르기도 한다. 세조 4년(1458년) 6월, 세조가 말한다. “나는 스스로 검약하고자 한다. 음식을 특별히 가리지 않는다. 밥에 쓸 쌀이 특별히 정갈하거나 흰 색깔일 필요가 없다. 이제부터 제사 이외에는 세갱미(細粳米)를 쓸 필요가 없다. 중미(中米)가 좋겠다.” 도승지가 답한다. “중미는 지극히 거치니 밥상에 올리기 힘듭니다.” 세조가 최종적으로 답한다. “갱미를 올리라.” 갱미는 중미보다 좀 더 쓿은쌀이다. 세갱미는 세심하게 쓿은쌀이다. 중미는 현미보다 조금 더 부드럽다. 예나 지금이나 현미는 먹기 껄끄럽다.

 태종 12년(1412년) 8월의 기록에는 ‘녹봉을 갱미에서 조미로 바꾼다. 임금이 (쌀을) 정밀하게 깎는 폐단을 염려하여 조미로 넉넉하게 주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조미(造米·조米)는 벼의 외피만 벗겨낸 것을 말한다. 색깔이 희지 않으니 검다고 표현했다. 현미(玄米) 즉, 매조미쌀이다. 숙종 1년(1675년) 윤 5월의 기록에는 ‘송시열(1607∼1689)이 만년에는 청주 화양동에 살았는데 여반((랄,려,여)飯)과 해진 옷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조선왕조실록) ‘여반’은 매조미쌀, 현미로 지은 거친 밥이다. 세조 4년 윤 2월, 경상도 관찰사의 보고 내용 중에 ‘백미 5되는 면포 2필, 조미 5되는 면포 1필에 준한다’(조선왕조실록)는 문장이 있다. 도정하는 공임도 있겠지만 현미를 백미를 만들 때 양이 줄어들기 때문일 것이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