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4년째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사이버대에서 만난 나의 첫 제자. 항암치료를 받으며 학업을 병행하던 어머니뻘 만학도였다.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잘 기억하고 잘 감동하던 사람, 헤어질 땐 보따리처럼 따스한 말들을 나눠 주던 사람이었다. 화상 강의 때마…
남동생 결혼식을 앞두고 고향에서 엄마가 올라왔다. 자기 전에 누워서 이런저런 얘길 나눴다. 손님맞이랑 결혼식 식순, 혼주가 할 일 등등. 그리고 엄마에게 결혼식 끝나면 며칠 더 딸네 있다 가라고 했다. 자식들 모두 보낸 엄마가 마음 쓰인 탓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고집을 부렸다. 결혼식…
마쓰우라 야타로의 ‘안녕은 작은 목소리로’라는 책에는 ‘한 달에 한 번만 만나는 사람’ 얘기가 나온다. 한 달에 한 번만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그런 사이에는 기분 좋은 거리감이 존재하는데, 특별하지 않은 만남이어도 헤어질 땐 어김없이 ‘만나서 좋았다. 고마워.’ …
생일에 가족들이 차려준 생일상을 선물 받았다. 따뜻한 밥을 먹으며 나 사랑받고 있구나 행복해했다. 문득 스물다섯 살 생일이 떠올랐다. 내 생일 즈음에는 벚꽃이 봄눈처럼 흩날렸다. 그러나 정작 학창 시절에는 생일을 편히 누려본 적이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늘 …
엄마는 신기하다. 계절마다 딸네 집에 올 뿐인데 10년쯤 산 나보다도 우리 동네 사정을 잘 안다. 하루는 개운하게 말간 얼굴로 말했다. “골목에 허름한 목욕탕 알지? 굴뚝에 옛날 글씨로 ‘목욕탕’ 쓰여 있잖아. 여기 올 때마다 가잖아. 겉은 허름해도 안은 70, 80년대 옛날 목욕탕 …
휴먼다큐 작가로 일할 때, 대선배 피디와 편집실에서 나눴던 대화. 꼬박 20일간 한 가족의 일상을 담아 온 방대한 영상을 훑어보면서 선배가 물었다. “고 작가라면 어떤 장면을 골라 붙이겠어?” 나는 고민하다가 가족들이 둘러앉아 저녁 식사하는 장면을 골랐다. “자연스러워서요. 대단한 일…
태어나 처음으로 발레 공연을 관람했다. 샹들리에가 빛나는 웅장한 공연장이 낯설어 두리번거렸다. 유니버설발레단 무대를 직관하다니. 무대에서 춤추는 발레리노가 나의 제자라니. 가슴이 뛰었다. 모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칠 때, 첫 제자로 스물두 살 발레리노를 만났다. 여섯 살 때부터 시작한…
단골 분식집이 있었다. 대학가에서도 오랜 명소 같은 분식집, 덮밥으로 유명했다. 제육, 오징어, 잡채덮밥이 단돈 삼천 원. 손님들은 분식집 주인을 ‘이모’라고 불렀다. “이모, 제육덮밥 하나요.” 그러면 이모님이 대접에 밥을 산처럼 퍼담고는 쏟아질 듯 수북하게 제육볶음을 덮어주었다. …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 조그만 학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20여 년 만에 모교를 찾았다. 모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강연이 있었다. 학교는 세련되게 변했지만 구조는 그대로였다. 익숙한 걸음으로 도서관을 찾아갔다. 예전과 같은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시끌시끌 나를 스쳐 갔다. 별관…
연말이라 시상식이 많다. 올해 우수한 역량을 펼친 빛나는 이들이 환호 속에 레드카펫을 걸어간다. 하지만 빛나지 않더라도 걸어갈 수 있지. 특별했던 레드카펫을 기억한다. 아이들 유치원에서 운동회가 열렸다. 원아들의 형제자매 부모 조부모까지 총출동한 가족운동회였다. 다 같이 ‘통천 펼치기…
지금도 그리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대전에 어느 책방을 다녀왔다. 널따란 나무 테이블 하나와 의자 열 개가 전부인 작은 책방. 테이블을 중심으로 한쪽은 서가를 꾸려둔 책방, 한쪽은 음식을 만드는 부엌이었다. 테이블은 때때로 책을 읽는 책상이기도 음식을 나누는 …
온화했던 가을도 잠시, 입동을 지나자 매서운 한파가 몰려왔다. 11월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불현듯 가을에서 겨울로 저무는 계절, 하루가 이르게 어두워지고 빠르게 추워지는 바람에 마음도 갈피 없이 심란해진다. 벌써 한 해의 끝자락이라니. 올해 나는 어떤 삶을 살았던가, 잃어버린 것들…
동네에서 낯익은 이를 마주쳤다. 한때 우리 집을 방문했던 정수기 관리원 아주머니. 일곱 살 쌍둥이 형제가 꾸벅 인사하자 아주머니가 반색하며 웃는다. “기억해요, 고객님. 갈 때마다 환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했거든요. 아드님들 많이 컸네요. 어쩜 든든하시겠어요.” 아주머니를 처음 만난 날을…
가을비 내리더니 바람이 순해졌다. 한결 산뜻해진 거리를 걷는데 손바닥처럼 등을 쓸어주는 바람이 설레서 사부작사부작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았다. 오래된 주택가를 지나 시끌벅적한 시장을 가로질러서 한적한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눈에 익은 풍경이 보였다. 여길 오고 싶었던 거구나. 익숙한 발…
스무 살, 상경해서 처음으로 얻었던 방은 월세 18만 원짜리 남녀 공용 고시원 방이었다. 창문 없는 길쭉한 방. 방문을 걸어 잠그고 웅크려 누우면 어둡고 눅눅한 관 속에 눕는 기분이었다. 얇은 합판을 덧대어 가른 방은 방음이 되지 않았고, 어둠 속에 들려오는 텔레비전 소리에 다들 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