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헛소문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중엽, 러시아 지방의 어느 작은 도시. 암행 검찰관이 조만간 들이닥칠 거라는 첩보에 시장을 비롯한 관리들은 혼비백산한다. 그동안 저질러온 온갖 비리가 백일천하에 드러날 판이다. 하필이면 이때 마을 여관에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왔다는 낯선 젊은이가 묵고 있다. 우연히 여관 식당에 식사하러 들른 마을 주민들이 그를 보고는 시장에게 달려간다. “그 사람입니다! 돈도 안 내고, 가지도 않습니다. 검찰관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겠어요?” 소문은 일파만파 퍼지고 마을은 발칵 뒤집힌다.》
젊은이의 이름은 흘레스타코프. 수도의 말단관리로 여행 도중 도박판에서 여비를 몽땅 날리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고 여관에서 무전취식 중이다. 헛소문 덕분에 졸지에 검찰관이 된 흘레스타코프는 썩을 대로 썩은 관리들이 갖다 바치는 온갖 뇌물을 다 챙기고 심지어 시장 딸에게 청혼까지 한 뒤 사라진다. 그가 사라진 후에야 그의 정체를 알게 된 관리들은 분해서 발을 동동 구른다. 바로 그때 진짜 검찰관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모두가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허영과 욕망에 눈먼 세상
우크라이나 출신 러시아 작가 고골(N. V. Gogol·1809∼1852)이 쓴 ‘검찰관’의 내용이다. 1836년 4월 19일, 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오늘날까지 인기리에 상연되는 고전이다. 고골의 설명에 따르면 흘레스타코프는 “아무 생각 없이 지껄이고 행동하는” “머릿속이 텅 빈 멍청이”이다. 그에게는 검찰관을 사칭하려는 의도가 아예 없다. 워낙 아둔해서 그럴 재주도 없다. 그런 멍청이를 어떻게 마을 사람들은 검찰관으로 오인할 수 있을까? 답은 ‘페테르부르크’라고 하는 마법의 단어에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12년 천도(遷都) 당시부터 지형학적이고 문화적인 기반의 문제를 제기했다. 표트르 대제는 낙후된 러시아를 단시일 내에 서구화시키겠다는 일념으로 네바강 하구에 석조도시를 세웠다. 허약한 늪지대에 화강암과 대리석 건물이 초고속으로 들어서는 동안 수만 명의 인부들이 죽어 나갔다. 돌 건물들은 단단한 지반이 아닌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철권 황제의 문명을 향한 광기 이면에서는 반문명적 폭압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유럽을 따라잡고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모방자의 자격지심이 뒤섞이면서 제국의 수도는 ‘나의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닌, 기이하게 인위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
가짜 검찰관을 만든 헛소문
고골은 페테르부르크의 특징인 기반의 결여를 문학적으로 재해석했다. ‘외투’, ‘코’, ‘네프스키 대로’ 등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로 불리는 일련의 소설은 러시아의 수도를 실존의 토대가 무너진 거대한 신기루로 변형시킨다. 모든 관리를 14등급으로 분류하는 ‘관등표’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법칙이다. 관등의 사다리를 올라가려 기를 쓰는 인물들의 불안과 욕망이 권력을 환영으로 변질시키고 권력의 환영은 다시 그들의 불안과 욕망을 부채질한다. 욕망과 환영의 끝없는 맞물림 속에서 사람들이 타인의 삶을 엿보고 선망하는 사이에 삶은 점점 더 토대를 상실해 간다. 인격은 부서지고 해체된다. 껍질이 본질을 사칭한다. 범속한 외투 한 벌이 한 인간의 정체성을 대체하고 관리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온 코가 관리의 역할을 대신한다. 도시를 관통하는 중앙도로인 네프스키 대로는 이 ‘가짜 공간’을 대변하는 몽환적인 상징이다. “오, 네프스키 대로를 믿지 마라, 모든 게 꿈이고 모든 게 기만이다. 모든 게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
고골의 페테르부르크는 지형도 위에는 없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어디에고 있는 가상현실이다. ‘검찰관’의 배경인 지방의 소도시에도 페테르부르크는 있다. “말을 타고 3년을 달려도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에 페테르부르크의 신기루는 오히려 그 어느 곳에서보다 뻔뻔스럽게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이 세상에 페테르부르크 생활만 한 것은 없어!” “아, 페테르부르크! 정말 대단한 삶이지요!” 그러나 이 대단한 삶은 진짜 검찰관이 도착하면 사라지는 꿈이자 막이 내리면 해체되는 무대장치이다.
권력의 꼭두각시가 된 사람들
가짜 권력을 거머쥔 가짜 검찰관 흘레스타코프는 고골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눈물을 통한 웃음’의 정수를 보여준다. 탐욕과 공포로 눈이 먼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그가 늘어놓는 허풍은 너무 엉뚱해서 폭소를 유발시킨다. 그는 그동안 엿보았던 ‘다른 사람’으로 종횡무진 변신한다. 그는 총사령관이 될 뻔했고 장관의 친구이고 국민 시인 푸시킨과는 막역한 사이이고 유명한 작가 ‘브람베우스 남작’ 본인이다. 문제는 그의 무한변신이 실은 자괴감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이 늘 정서나 하는 “쥐새끼 같은 말단 공무원”일 뿐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묻지 않는데 뜬금없이 소리치기도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잘 알아, 나 자신을!” 허장성세의 밑바닥에 있는 것은 서글픈 자기비하, 자기 인격에 대한 무한한 경멸이라는 얘기다. 스스로의 기반을 결여할 때 인간은 정신없이 두리번거리고 훔쳐보고 올려다본다. 허풍을 늘어놓는 흘레스타코프도 그의 허풍에 내재된 난센스를 갈파하지 못하는 관리들도 모두 페테르부르크라는 미망에 휘둘리는 꼭두각시다. 평론가들이 ‘검찰관’을 코미디가 아닌 “비극적 그로테스크”라 부르고 그 “잔인한 희극성”을 지적하는 이유다.
진짜 앞에서 힘 잃는 허깨비
고골은 연극무대를 ‘학교’이자 ‘강단’이라 불렀다.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풍자극이나 보더빌 같은 것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주제는 언제나 딱 한 가지 ‘인생’이라고 못 박았다. 검찰관이 등장하는 도시는 실재하는 도시가 아니라 ‘정신적인 도시’로서 인간 영혼의 상징이라는 말도 했다. 아마도 고골의 의중을 가장 정확하게 파헤친 연출가는 구소련의 천재 예술가 메이예르홀트일 것이다. 그가 1926년에 무대에 올린 ‘검찰관’은 초현실주의적인 해석으로 숱한 화제를 낳았다. 고골의 지시에 따르면 진짜 검찰관이 당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들은 ‘1분 30초 동안 완전히 굳어버린 듯이 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메이예르홀트는 이 장면에서 과감한 실험을 단행했다. 잠깐 막이 내린 사이에 배우들을 실물 크기의 마네킹으로 대체해 버린 것이다. 허깨비를 따라다니다가 허깨비가 되어버린다는 해묵은 진리의 무대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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