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사랑의 詩]한용운/‘나는 잊고자’

  • 입력 2008년 2월 29일 02시 56분


국민 교육을 충실하게 받은 이라면 누구나 만해 한용운의 시가 역설과 반어의 수사학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가령 그가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님의 침묵’)라고 했을 때, 우리는 대상의 부재를 통해 오히려 그의 존재를 확인하는 역설의 순간을 명료하게 경험한다. 마찬가지로 그가 ‘잊고자’ 한다면 그것은 님에 대한 항구적 기억의 소망을 피력하는 것이고, ‘말아 볼까요/내버려두어 볼까요’라고 시치미를 뗀다 해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시인은 ‘잠과 죽음’을 통해서만 잊을 수 있는 님에 대한 그리움을 ‘잊고자’ 한다는 반어로 노래하는 것이다. 이처럼 만해의 시는 님에 대한 상실감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오히려 님에 대한 발견의 기회로 승화한다. 아마도 그것은 소멸과 생성의 간단없는 반복과 결속을 원리로 하는 불교적 상상력의 결과일 것이다.

어떤 과정을 통해서건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이 세상에 ‘있게(be)’ 된다. 그 이전에도 그 사람은 살고 있었겠지만, ‘나-너’의 관계를 통해 새롭게 구성되는 세계에 그 사람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다가 새삼스러운 발견을 통해 그가 비로소 ‘있게’ 되고, 나아가 ‘있는’ 것을 넘어 우주에 가득 찬 존재로 새롭게 다가온다. 만해의 시는 이러한 사랑의 발견 과정을 통해 존재와 부재의 변증법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그런데 시인이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군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의 대승적(大乘的) 사랑이 경이롭게 다가오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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