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리 삼성서울병원 교수-간 전이 정윤재 씨
직장암-신장암 제거 후 항암치료, 1년 후 간 전이 확인… 수술 어려워
부작용 심해 2차 항암치료 못 끝내… 다른 방법 찾다 접한 새로운 기술
양성자빔 5회 맞아… 암 흔적만 남아, 재발 가능성 매우 낮아 ‘완치의 길’
2020년 12월, 대변에 피가 섞여 나왔다. 정윤재 씨(71)는 겁이 났다. 그래도 심각한 질병은 아닐 거라며 놀란 마음을 달랬다. 정 씨는 치루가 재발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0여 년 전에 치루 진단을 받았었다. 치루가 악화해 지금 피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동네 병원에서 치루 수술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다음 날 오전에 터졌다. 수술이 끝났는데도 항문에서 피가 나왔다. 의사는 대장 내시경 검사를 시행했다. 직장 부위에서 혹 같은 것이 보였다. 의사는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정 씨는 인근 A 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 치루인 줄 알았는데 암
A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다시 받았다. 우려가 현실이 돼 버렸다. 직장암 2기였다. 림프절 전이도 의심된다고 했다. 전이됐다면 직장암 3기로도 볼 수 있는 상황. 암은 직장 안쪽 3분의 2를 막았다.
추가 검사에서 신장 혹이 발견됐다. 예전부터 물혹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혹이 어느새 커져 있었다. 조직검사를 했는데, 이 혹 또한 암으로 판명 났다. 직장암이 전이된 것이 아니라 신장 자체에서 새로 암이 발생한 것이다. 두 가지 암을 동시에 진단받은 것.
두 암을 동시에 제거해야 했다. 2021년 2월, 정 씨는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시간만 10시간 가까이 걸렸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직장과 신장의 암은 모두 제거됐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미세한 암세포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다른 장기로 암이 전이될 수도 있다. 의료진은 예방적 항암치료를 시행하기로 했다.
2021년 3월부터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2주마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항암치료는 총 12회 일정으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순탄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첫 3회까지는 밥맛이 좀 떨어지는 정도의 부작용이 있었지만 견딜 만했다. 동네를 세 바퀴 걷고 집으로 돌아올 정도로 기력도 좋았다. 하지만 4회째 항암치료를 받을 때부터 기력이 크게 떨어졌다. 운동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도 버티는 심정으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8회 치료를 끝낸 후에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의료진과 상의한 끝에 치료를 2주 정도 중단했다. 이후 다시 항암치료에 돌입했다. 여전히 몸에 힘이 없고 입맛이 없었다. 제대로 식사하지도 못했다. 이를 악물고 12회 항암치료를 모두 끝냈다.
● 간으로 전이, 수술 불가 판정
수술에 항암치료까지 모두 끝냈으니 더 이상 암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되기를 기대했다. 암의 전이와 재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추적 관찰 검사를 할 때마다 두근거렸다.
약 1년이 지났다. 2023년 3월, 간에서 암 2개가 발견됐다. 직장암이 간으로 전이된 것. 전이된 간암 치료는 쉽지 않아 보였다. 일단 암이 혈관 가까운 쪽에 있어 방사선 치료를 시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간 기능도 아주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섣불리 수술을 시도했다가는 간부전이 올 수도 있었다. 의료진은 일단 항암치료로 암 크기를 줄인 뒤 수술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다시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이번에도 12회 일정이었다. 부작용은 1차 때보다 더 심했다. 거의 걸을 수조차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가는 것도 힘에 부쳤다. 식사도 거의 하지 못했다. 머리카락이 완전히 빠져 버렸다. 도저히 암을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정 씨는 “모든 치료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항암치료는 끝내지 못했지만 수술이 좀 가능해졌을까 싶어 2023년 9월 수술 일정을 잡았다. 하지만 수술을 앞두고 시행한 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이 나왔다. 가족들은 충격에 빠졌다.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앞길이 막막했다.
다른 치료법이 없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정 씨의 아들 석일 씨(44)는 “정 안 되면 해외로 가서라도 치료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양성자 치료가 전이된 간암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양성자 치료는 삼성서울병원과 국립암센터, 두 곳에서 시행 중이라 했다.
● 양성자 치료로 암에서 벗어나
지난해 10월, 정 씨는 기대 반 걱정 반 심정으로 삼성서울병원을 찾았다. 그때 김나리 방사선종양학과 교수를 만났다. 김 교수는 “수술이 어렵거나 항암치료가 어려울 때 선택할 수 있는 치료법이다. 정 씨가 딱 그랬다. 암을 눈에 띄게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는 양성자 치료가 그나마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양성자 치료에 앞서 양성자 빔이 제대로 주입되도록 호흡 훈련을 했다. 이 훈련을 비롯해 준비 작업에 약 1주일이 걸렸다. 치료 예정일이 됐다. 양성자 빔을 월∼금요일 매일 30분씩 맞았다. 이것으로 양성자 치료는 끝났다. 김 교수는 “환자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일단 연속적으로 양성자 빔을 쏜 후부터는 경과를 관찰한다”고 설명했다.
정 씨도 그 후 정기적으로 관찰을 하고 있다. 놀랍게도 간에 있던 두 개의 암 중 하나는 흔적만 남았다. 나머지 하나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기대 이상의 치료 효과였다. 하지만 암이 다시 커질 수도 있지 않을까. 김 교수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완치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 물론 아직 완치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직장과 신장 상태는 지방 A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다행히 아직은 암이 재발하거나 전이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요즘 정 씨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한 삶을 보내고 있다. 몸이 급속도로 좋아졌다. 다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의사가 먹지 말라고 금지한 음식 외에는 모든 음식을 제대로, 잘 먹는다. 걷기 운동도 재개했다. 산을 좋아해서 산에 자주 간다. 매일 두 시간씩은 걷는다. 정 씨는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느낌”이라며 웃었다.
투병하는 동안 가족이 힘들었다.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때마다 석일 씨가 많이 노력했다. 석일 씨는 수시로 집에 들러 아버지를 살폈다. 병원에 갈 때도 늘 동행했다. 양성자 암 치료법도 석일 씨가 물색했다. 석일 씨는 “아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니다. 아들이 나를 살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암세포 다시 자랄 확률 크지 않아”
양성자 암 치료법은 주로 간암이나 폐암, 전이된 간암이나 폐암, 두경부암, 소아암일 때 많이 활용한다. 방사선 치료의 한 종류다. 양성자 빔을 쏘면 암세포를 골라서 파괴한다. 방사선 치료보다 더 정밀하고 적은 횟수로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방사선은 닿는 부위가 넓다. 이 때문에 병든 조직뿐 아니라 주변 건강한 장기까지 파괴한다. 반면 양성자는 목표 지점에 정확히 닿기 때문에 주변 장기나 조직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김 교수는 “일반 방사선 치료는 부위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10∼30회는 해야 한다. 반면 양성자 치료는 길어도 10∼15회로 끝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양성자 치료는 매일 이어서 하는 게 원칙이다. 이유가 있다. 종양 세포는 치료해도 다시 자라기 때문에 가급적 자주 억제해 주면 좋다. 하지만 하루에 2회 이상 양성자 빔을 쏠 경우 정상 장기들이 제 기능을 회복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때문에 매일 1회 시행하되 며칠 동안 이어서 하는 것이다.
양성자 치료 이후 사라지거나 줄어든 암세포가 다시 자랄 확률은 얼마나 될까. 김 교수는 “크지 않다”고 했다. 보통 양성자 치료를 끝내고 5년 정도 지날 때까지 암이 자라지 않을 확률이 80∼90%에 이른다는 것. 다만 다른 부위로 암이 전이될 수는 있기에 정기적으로 관찰할 필요는 있다. 보통은 치료 후 1년 이내는 3개월마다, 그 후로는 6개월마다 정기 검사를 통해 확인한다.
최근 국내 대학병원에도 ‘꿈의 암 치료기’라고 불리는 중입자 치료기가 도입됐다. 중입자 치료기는 치료율이 높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진료비가 수천만 원이라는 단점이 있다. 반면 양성자 치료는 전립샘암과 유방암을 빼고 대부분 암에서 건강보험이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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