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기자들의 치열한 취재현장을 그린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 ‘제4계급(the Fourth Estate)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저녁 잠자리에서 악몽을 꾼 아이가 무섭다며 회사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옵니다. 엄마는 뉴욕타임스에서 백악관 취재를 담당하는 매기 하버만 기자(48). 정신없이 기사를 쓰던 하버만 기자는 아이가 계속 보채자 전화기에 대고 화를 냅니다. ’매정한 엄마‘라는 비판보다 일-가정을 양립해야 하는 직장여성의 고충을 대변한다고 해서 2018년 영화 개봉 때 하버만 기자에게 동정론이 일었습니다.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이 다큐에는 여러 명의 뉴욕타임스 기자가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하버만 기자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가짜뉴스‘ 공세에 대항한 언론의 진실 추구 노력을 상징하는 인물로 미국에서 높은 인지도를 가진 스타 기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버만 기자는 트럼프 행정부 내부에 거미줄처럼 빈틈없는 취재망을 쳐놓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개인적인 비리와 정책상의 문제점에 대한 수많은 특종 기사를 터뜨렸습니다. ’백악관 관리들이 소셜미디어 상에서 가장 많이 팔로우하는 기자‘라는 타이틀에서 그녀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버만 기자는 러시아의 미 대선 불법 개입 의혹을 조사한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팀의 ’러시아 스캔들‘ 보고서에서 가장 많이 이름이 언급된 기자이기도 합니다. 트럼프 외교정책의 근간인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것도 그녀입니다.
그런 하버만 기자가 최근 명성에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취재의 기본도 모른다” “돈만 밝힌다” “유명해지더니 변했다” 등의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그녀가 출간할 예정인 트럼프 전 대통령에 관한 책 때문입니다. 제목은 ’사기꾼(Confidence Man).‘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이 담길지 짐작이 간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올해 9,10월쯤 발간을 목표로 지금 하버만 기자는 열심히 집필 중입니다.
이미 서점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다룬 책 50여종이 쫙 깔려있습니다. 대부분 트럼프 전 대통령을 가까이서 관찰한 기자나 전직 관리들이 쓴 책들입니다. 트럼프 친척들까지 저술 대열에 합류할 정도로 시장은 포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하버만 기자의 책이 발간도 되기 전부터 예정 소식만으로 큰 화제가 되는 것은 그녀의 탄탄한 취재 실력과 폭넓은 정보망을 바탕으로 다른 트럼프 관련 저서들과는 차별화된 깊이 있는 내용이 담길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뉴욕타임스 동료 기자들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하버만이 쓰면 다를 것” “벌써부터 기대된다” 등의 격려사를 남기며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트럼프 전 대통령의 기록물 훼손 사건이 불거지면서 하버만 기자의 신간이 논란으로 떠올랐습니다. 기록물 훼손 사건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대통령기록법을 무시하고 자신이 읽은 문건들을 찢어버리거나 숨기는 사례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사는 플로리다 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15상자 분량의 대통령 기록물이 발견돼 국립문서관리청이 회수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미 하원 정부개혁감독위원회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통령기록법 위반 여부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기록물 훼손 논란 속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중요한 문서들을 너무 많이 찢어서 백악관 사저의 화장실 변기에 버리는 통에 변기가 막히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보도한 인터넷매체 악시오스는 하버만 기자가 집필 중인 책에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고 밝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전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계속 연락을 이어왔다고 주변에 말했다는 사실도 하버만의 책에 담길 예정이라고 악시오스는 전했습니다.
CNN 분석가로도 활동 중인 하버만 기자는 CNN에 출연해 보도 내용이 맞다고 확인했습니다.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악시오스의 기사 링크와 함께 “곧 나올 나의 책에 들어있는 내용”이라는 설명을 붙였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재미있는 뒷얘기들이 책에 포함됐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의도였겠죠.
하지만 ’화장실 변기‘ 사건은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 기자의 취재 윤리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하버만 기자가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취재 중에 얻은 중요한 정보를 즉시 기사화해 대중에게 알리지 않고 나중에 자신의 책에 쓸 목적으로 묻어뒀다는 것입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기록물 훼손 습관에 관한 정보를 좀더 일찍 공개했다면 이를 막을 수 있는 조치들이 마련됐을 수도 있지 않았겠냐는 비판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트럼프 킬러‘로 이름을 날린 하버만 기자였기에 대중의 실망감은 더욱 컸습니다.
군사매체 ’스타즈 앤 스타라입스‘의 얼 스티븐스 편집장은 “책 발간을 염두에 두고 정보를 늑장공개하는 기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우려스럽다”며 “매기 하버만, 뉴욕타임스, 그리고 그 망할 놈의 책에 대해 듣는 것도 이제 지겹다”고 비판했습니다. “책 장사가 그렇게 중요했나요, 매기?” “귀중한 정보를 깔아뭉갠 매기, 축하해요” 등의 조롱이 소셜미디어에 속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런 논란은 하버만 기자가 처음이 아닙니다. ’워터게이트‘ 특종기자인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부편집장은 2020년 2월 트럼프 대통령을 인터뷰했을 때 “코로나19의 심각성을 의도적으로 축소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확보하고도 자신의 책 ’격노(Rage)‘가 출간되는 9월까지 이를 공개하지 않아 비판을 받았습니다. 우드워드 기자가 일찍 이런 사실을 공개했다면 코로나19 대응 방침이 달라지고 사망자도 줄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논란이 가열되자 하버만 기자는 반박에 나섰습니다. CNN에 다시 출연해 “문제가 된 정보들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 입수해 묻어둔 것이 아니라 최근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후속 취재를 하면서 알아낸 것들”이라며 “나는 결코 정보를 아껴두는 기자가 아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평소 하버만 기자와 뉴욕타임스가 신간 홍보에 쏟은 노력으로 볼 때 이런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하버만 기자는 신뢰도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지만 책의 화제성은 더욱 커졌다는 데서 위안을 찾을 듯 합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