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한 (8) 조국의 민주화 위해 유학생들 모여 유신반대 성명 참여

양민경 2024. 8. 12.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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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유학 중 박정희 정권이 집권 연장을 꾀하여 1972년 10월 유신(維新)을 감행했다.

당시 독일 유학생들은 하루아침에 조국의 국회가 해산되고 야당 의원이 체포, 구금됐다는 기사를 보고 경악했다.

독일 각 지역 유학생들은 74년 3월 1일 서독 수도 본에 모여 유신반대 성명서를 낭독했다.

귀국까지 포기하고 유신 반대 성명서에 서명해 우리의 민주화 의사를 발표했는데도 독일 신문은 유학생들의 기대에 호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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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 투입 각종 집회 소요 막는 등
대통령 긴급조치령 내려 강압 통치
독일 정부와 시민들에게 한국 국민은
민주주의 염원하고 있다는 사실 알려
독일 현지 교민들과 파독 간호사들이 1966년 1월 3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국민일보DB


독일 유학 중 박정희 정권이 집권 연장을 꾀하여 1972년 10월 유신(維新)을 감행했다. 유신 헌법이 선언돼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정치 활동이 정지됐다. 대통령이 긴급조치령을 내려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막고 전투경찰을 투입해 사회 각종 소요를 막으며 강압 통치에 나섰다. 유신 체제는 79년 10월 대통령 시해 사건에 이르기까지 7년간 초헌법적 비상조치로 이어졌다. 우리 정치사에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사건이었다. 유신 체제는 국가 안보와 지속적 경제 성장을 놓고 군사 정부가 감행한 정변이었다.

당시 독일 유학생들은 하루아침에 조국의 국회가 해산되고 야당 의원이 체포, 구금됐다는 기사를 보고 경악했다. 나라 걱정에 빠진 학생들은 해야 할 연구가 많음에도 국내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독일 각 지역 유학생들은 74년 3월 1일 서독 수도 본에 모여 유신반대 성명서를 낭독했다. 서울대 문리대 졸업생들이 신뢰 관계에 있는 선후배에게 연락하며 유신 독재 정권 규탄에 힘을 모았다. 독일 정부와 시민에게 한국 국민이 민주주의를 염원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유학생들은 경제적 여유가 없음에도 본으로 올라가는 차비와 숙박비를 스스로 부담했다. 이때 유신 체제에 반대하거나 대통령의 금지령을 위배하는 자들은 20년 징역에 처한다는 엄격한 금지령이 선포됐다. 유학생들은 이 긴급조치령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런 정권이라면 조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유신 반대 성명서에 서명한 것이다.

나 역시 당시엔 박정희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50년이 지난 후 돌아봐도 그의 방법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유신 정국은 7년 후 ‘궁정동 시해 사건’으로 막을 내린다. 한편으로 그는 오늘날 국가 산업화 기틀을 세운 데 기여한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가 독일에서 조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지하 갱도 깊은 곳에서 일하는 파독 광부를 눈물로 위로한 사연은 감동을 줬다.

귀국까지 포기하고 유신 반대 성명서에 서명해 우리의 민주화 의사를 발표했는데도 독일 신문은 유학생들의 기대에 호응하지 않았다. 우리의 희생에도 큰 성과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정치인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자로서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나 역시 서명에 참여했다. 그 결과가 미미한 걸 보고 이제 본연의 처소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캐나다에서 민주화운동에 선봉으로 나선 김재준 목사가 독일에 격려차 왔다. 김 목사는 캐나다와 미국을 중심으로 조국 민주화 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언어와 태도에서 목회자와 신학자의 모습이 배어 있는 분이었다. 그렇지만 나와는 생각이 달랐다. 나는 민주화보다 한국 사회 복음화가 먼저라고 여겼다. 나 스스로 좀 더 실력을 기른 후에 새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리라 결정하고 민주화 운동의 지속적인 참가는 유보했다. 하이델베르크로 돌아온 후로는 오로지 대학과 도서관에서 연구에 골몰했다. 또 하이델베르크 시내 로르바하병원과 인근 비슬로흐 지역에 근무하는 한인 간호사들을 방문해 매주 한 번씩 성경 공부를 인도했다.

정리=양민경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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