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저기 조선을 수복하고자 싸운 무장독립군들

1004 2024.08.15 17:00 조회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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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광복단

광복단 光復團

개요

1913년 경상북도 풍기(豊基)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설립연도 : 1913년
구분 : 독립운동단체
소재지 : 경북 풍기
설립목적 : 독립운동
주요활동 : 부호의 의연금과 일본인의 불법 징수세금 압수, 무관양성, 무기구입, 연락기관 설치, 일본인 고등관 및 변절자 처벌
규모 : 단원 200여 명




내용

1910년대 국내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항일 비밀결사 조직 중의 하나로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강병수(姜炳洙)·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옥(金相玉)·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황상규(黃相圭)·이각(李覺)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대구의 우재룡(禹在龍)·박상진(朴尙鎭)·권영만(權寧萬)·양제안(梁濟安)·김경태(金敬泰)·김한종(金漢鍾)·엄정섭(嚴正燮) 등이 합류하여 광복회(光復會)로 개칭하였다. 다시 1916년에 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신현대(申鉉大)·윤홍중(尹洪重)·신두현(申斗鉉) 등이 가담하여 광복단이 되었다.

이들은 수백 명의 단원을 포섭, 단을 확장하고 〈오등(吾等)은 대한독립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죽음으로써 결의하고 구적(仇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기로 천지신명께 서(誓)함〉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단 회원은 약 200명 정도이며 국내에서 국외로 독립운동의 터전을 넓힐 때 노백린(盧伯麟) 등 10여 명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박성태·김좌진(金佐鎭) 등은 만주로 건너갔다.

조직은 군대식으로 중앙에 총사령(總司令) 박상진(朴尙鎭), 부사령 이석대(李奭大:후에 김좌진), 지휘장(指揮長) 권영만(權寧萬)을 두었고, 그 아래에 재무부·선전부를 설치하였으며, 각 도(道)에는 지부장을 두었다. 이석대가 남만주 회인성(懷仁城)에 주재하면서 활동을 담당하였으며, 그후 우재룡이 지린[吉林]에서 주진수(朱鎭洙)·양재훈(梁載勳)·손일민(孫一民)·이홍주(李洪珠) 등과 협의하여 광복회의 만주지부를 결성하였다.

광복단은 만주에서 군대를 편성하여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투쟁방법으로는 부호의 의연금과 일본인의 불법 징수세금을 압수하여 전 단원이 무장하고,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무관의 양성 및 연락기관을 설치하여 군사상 집회 및 왕래 장소로 사용하며, 일본인 고등관 및 변절자의 처벌과 무력전 개시 등이었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삼남지방의 부호를 대상으로 한 부호들에게 군자금 모집 취지서를 발송하고 친일파 처단활동을 했다. 영남지방에서는 박상진과 채기중(蔡基中)이, 기호지방은 김한종과 장두환이, 관동(關東)지방은 김동호(金東鎬)가 담당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포고문과 군자금 배정 문서인 특정배당금증(特定配當金證)을 첨부하여 각지의 자산가에게 발송하였으며 일본 관리가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여 무기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광복단의 활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전(前) 경상도관찰사이며 악질 친일부호인 장승원(張承遠)과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道高面長)인 친일파 박용하(朴容夏)의 암살사건이었다.

조직이 비밀조직이었던 관계로 정체가 좀처럼 노출되지 않았으나 회원인 이종국(李鍾國)이 1918년 1월 천안경찰서에 밀고함으로써 총사령(總司令) 박상진을 비롯한 37명이 체포되었다. 일경의 체포를 피한 한훈 등의 회원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3·1운동 뒤에는 김상옥·한훈·김동순(金東淳) 등 20여 명의 암살단을 국내에 파견, 총독을 암살하려다 비밀이 누설되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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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광복회
대한광복회 大韓光復會

개요

1915년 대구에서 결성된 한국의 항일독립운동 단체.
구분 : 항일독립운동 단체
설립연도 : 1915년 7월
소재지 : 경북 대구
설립목적 : 국권 회복, 공화정치 실현
주요활동 : 군자금 모집, 친일부호 처단, 독립군 양성




내용

1910년대 초 신해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즈음하여 1913년 경상북도 풍기(豊基)에서 광복단이, 1915년 초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이 조직되었다. 광복단은 의병과 관련이 깊은 인물들이, 조선국권회복단은 계몽주의적 인물들이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참가하였다. 1915년 7월 대구에서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다.

국권 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적으로 ① 부호의 의연(義捐) 및 일본인이 불법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②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③ 중국·러시아 등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④ 무력이 준비되는 대로 일본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는 강령을 내세웠다.

의병장 허위(許蔿)의 문하인 박상진(朴尙鎭)을 주축으로 경상도 지역에서 조직되었으며, 1916년부터 충청도·경기도·강원도·황해도 등으로 확대되었다. 대구의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 영주의 대동상회(大同商會)를 비롯하여 광주·삼척·예산·인천·용천·서울·해주 및 만주의 안동·장춘에 설립된 곡물상·잡화상을 연락거점으로 하여 군자금을 모았고, 친일부호의 처단, 독립군 양성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초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되어 주요 인물이 검거, 사형당해 조직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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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로군정서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

개요

1919년 중국 만주 왕칭현(汪城縣)에서 조직된 무장 항일독립군 부대.
설립연도 : 1919년 12월
구분 : 독립군 부대
소재지 : 중국 왕칭현
설립목적 : 무장 항일독립투쟁
주요활동 : 항일투쟁, 군대양성, 군사훈련, 청산리전투
규모 : 약 2,500명




내용


1919년 대종교(大倧敎)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출범해 그해 12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된 항일 무장독립군 부대다.

주요 임원은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장 이장녕(李章寧),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여단장 최해(崔海),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등이며, 왕칭현 일대의 삼림지대를 근거지로 하였다.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고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을 받아 청년들에게 6개월의 군사훈련을 실시, 기초훈련을 마친 총 600명 가운데 300명이 다시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등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인근 독립운동단체와 제휴해 북만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1920년 8월, 총병력이 1,600명을 넘었고, 소총·권총·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했으며, 재정은 인근 주민과 국내 모금액으로 충당하였다.

같은 해 10월, 청산리(靑山里) 어귀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 혼성부대인 동지대(東支隊) 37여단 소속 1만 명과 접전, 4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리니, 바로 청산리전투다.

그 뒤 일본군의 반격을 피해 소만국경으로 이동해 10여 개 독립군 부대와 통합, 연해주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해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22년 소련에 의해 무장해제 당할 때까지 항일 독립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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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한독립군단 大韓獨立軍團

개요

1920년 12월 독자적인 활동을 하던 여러 독립군 부대가 통합조직한 한국의 항일 독립군부대.
구분 : 독립군 부대
설립연도 : 1920년 12월
설립목적 : 민족독립의 성취
주요활동 : 항일 무장전투
규모 : 병력 3,500명




내용

1920년 6월 홍범도(洪範圖)가 이끈 대한독립군이 왕청현(汪淸縣)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이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자, 일본의 대부대가 만주 전역에 걸쳐 강력한 보복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각처에 산재한 독립군은 이를 피하여 러시아·만주 국경지대로 집결하였다. 여기에 모인 독립군부대는 북로군정서·대한독립단·간도국민회·대한신민회·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광복단·도독부·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10개 단체였다.

이들은 각자의 고집을 버리고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아 각 군단 수령회의 의논 결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에 김좌진(金佐鎭)·홍범도·조성환(曺成煥), 총사령에 김규식(金奎植), 참모총장에 이동녕(李東寧), 여단장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행동통일을 결의하였으며, 병력은 27소대 3,500명이었다. 그 해 12월 대한독립군단 병력 3,500명은 헤이룽강[黑龍江]을 건너 러시아령(領) 자유시 스랍스케 일대에 주둔하였다. 여기서 50만 명의 교포와 적군(赤軍)의 원조로 무기를 보충하였으며 때로는 적군의 작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후 일본의 강력한 압력에 굴복한 러시아가 독립군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하였고, 저항하는 독립군과의 사이에 흑하사변(黑河事變:일명 자유시사변)이 발생하였다. 이때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었으며, 결국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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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

개요

1919년 5월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구분 : 군정부
설립연도 : 1919년 5월
소재지 : 만주
설립목적 : 무장독립투쟁
주요활동 : 독립군 양성, 일제통치기관 파괴, 민족반역자와 친일파 처단
규모 :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2천 명, 의용군 제1중대 800∼900명




내용

1910년을 전후하여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김창환(金昌煥) 등은 교포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애국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한 신 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였으며, 경학사는 1912년 부민단(扶民團)으로 발전하 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 하기 위한 통일적인 독립운동기구의 필요성을 느낀 부민단은 1919년 4월 유하현 (柳河縣)·퉁화현[通化縣] ·싱징현[興京縣] ·환런현[桓仁縣] ·지안현[輯安縣] 등 각 현의 지도자들과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고 산하단체로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軍政府)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군정부의 명칭이 문제가 되자, 대한 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안정근(安定根)·김병헌(金炳憲)의 제의로 191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관할하의 서간도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로 확대, 개편하였다.

조직은 독판제(督辦制)에 의해, 독판부(督辦府) 아래 사령부·참모부(參謀部)· 정무청(政務廳)·군무청(軍政廳) 등을 두었다. 주요 간부에는 독판부 독판 이상 룡, 부독판 여준(呂準), 정무청장 이탁(李鐸), 군무청장 양재훈(梁在薰), 참모 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지청천(池靑天), 내무사장 곽문(郭文),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 재무사장 남정섭(南庭燮),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이 임명되었다.

1919년 5월 3일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는 한편, 치다오거우[七道 溝]· 콰이다마오쯔[快大帽子]·구산쯔[孤山子]·허둥쯔[河東子]에 분교 를 두었다.

하사관 3개월, 장교 6개월, 일반독립군 1개월 과정의 군사훈련을 실 시하였으며,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2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예 하부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속 의용군이 편성되었으며, 백광운(白狂雲)의 의용군 제1중대는 그 수가 800∼900명에 이르렀다.

재정은 한족회원의 헌금을 바탕으로 평안도, 경상도 지방에서 모집한 군자금으로 유지되었으며, 국내 및 서간도 지역의 일제통치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5월 삼수군(三水郡)의 영성주재소, 7월 강계군의 삼강주재소와 문옥면사무소를 습격한 것을 비롯하여 1920년 5월 문상식(文相植) 등이 경북 지역에서 관공서를 폭파하였다.

1920년 8월 김동순(金東淳)·한우석 (韓愚錫) 등이 조선총독부 총감을 처단하고 일제기관을 폭파하려다가 체포되었으며, 1921년에는 만주의 친일단체 보민회(保民會)를 해체시켰다.

그러나 1920년 2월 현정경·현익철 등 다수의 소장년파들이 이탈하여 광한단(光 韓團)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10월에는 일본군 토벌작전에 의해 본부는 북만주 어무현[額穆縣]으로, 의용대는 안투현[安圖縣]으로 옮겼다. 1921년 어무현에서 조직을 재정비하고, 위원장에 이탁, 경리위원장 이진산(李震山), 총사령관 박용만(朴容萬) 등이 임명되었으나, 박용만이 조선총독부에 귀순하는 등 와해의 길을 걷다가, 1922년 2월 대한독립단·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광한단 등과 함께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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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한독립단 大韓獨立團

개요

만주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구분 : 독립운동단체
설립연도 : 1919년 4월 15일
소재지 : 만주 류허현
설립목적 : 친일단체 분쇄
주요활동 : 관공서 파괴, 모군(募軍)·모금사업
규모 : 류허현의 본부, 100여개소의 지단·지부




내용

3·1운동이 실패하자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박양섭(朴陽燮) 등 각 단체대표와 의병계열의 인사 560여 명이 1919년 4월 15일 분립된 단체를 해체하고 단일기관으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다. 임원으로는 도총재(都總裁) 박장호(朴長浩), 부총재 백삼규,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군사부장 전덕원,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재무부장 강세헌(康世憲),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 참모 송상규(宋尙圭)· 강규묵(康圭默)·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서무 김일(金逸), 고문 안병찬(安秉瓚) 등이 임명되었다. 본부는 류허현에 두고, 각 현에는 지단(支團)·분단(分團) 등을 설치하였다. 국내외 모두 100여개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지역 에는 거류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여 구관(區管)을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국내 총지단장은 홍제업(洪濟業), 평안북도 정우범(鄭禹範), 평안남도 안창일(安昌一), 경기도 한덕리(韓悳履) 등이었다. 김승학(金承學)·백의범(白義範) 등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맹헌규(孟憲奎)·유일우(劉一優) 등은 만주 집안현(輯安縣), 장백현(長白縣)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19년 9월 단원 20명이 함경북도 갑산 동인면 금정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였으며,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따라 조병준은 평안북도 독판(督辦)으로 공채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도 신의주·의주 등에서 친일세력을 처단하였다. 3월에는 평안북도 벽동군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4월에는 영유군(永柔郡)에서 우편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5∼7월에는 평안북도 철산·삭주·강계·벽동 등지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9월에는 의주·운산·영변 등지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남겼다. 특히 독립군 파견대장 이명서(李明瑞)는 8명의 대원을 인솔하여, 8월 15일 밤 은율군의 친일파 군수를 사살하고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9월 10일 일본군의 반격을 받은 독립군은 이명서를 비롯하여 6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남은 대원은 중상을 입었다. 태천(泰川) 지단에서는 유림 김인수 등이 내지분치기관임시통칙(內地分置機關臨時通則)에 의한 의용대를 조직하고, 폭약을 구입, 관공서파괴를 계획하던 중 다수의 단원이 붙잡혔다. 김병연(金秉淵)·박기연(朴基淵) 등은 장백현 일대에서 자금을 모금하고 안도(安圖)·무송현 등지와 연락하여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단은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 계열의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1919년 말경에는 단군기원 또는 대한제국의 연호인 융희를 주장하는 박장호·백삼규·전덕원·이웅해(李雄海)·김평식 등의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호 사용을 주장한 신우현(申禹鉉)·변창근(邊昌根) 등의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대립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한족회(韓族會)·청년단연합회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사령부에 통합되고, 1922년 2월 류허현에서 한족회·광한단(光韓團) 등 독립운동단체들과 회합,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고 발전적인 해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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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한통의부 大韓統義府

개요

1922년 8월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독립군 연합단체.
설립연년도 : 1922
구분 : 항일독립운동단체
본부소재지 : 만주 환인현(桓仁縣)
설립목적 : 독립전쟁 전선의 재정비와 투쟁역량의 강화
주요활동 : 한인사회 통치행정과 무기 및 군자금 조달, 일제 밀정과 부일배 응징, 일제기관 파괴, 광동학교 설립, 기관지 《경종보(警鐘報)》《대한통의부공보(大韓統義府公報)》 발간




내용

줄여서 통의부라고도 한다.1920년의 경신참변(庚申慘變)과 1921년의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이래 일시 침체된 만주의 독립군은 독립전쟁 전선의 재정비와 투쟁역량의 강화를 위하여 연합적인 독립군단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922년 6월 환인현(桓仁縣)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 독립군 단체 대표가 모여 통합조직체인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6월 3일 개최된 중앙직원회에서 ‘통군부를 개방하여 다른 독립군 단체와 무조건적으로 통일하자’는 결의를 한 후, 각 단체에 위원을 파견하여 교섭하였다. 그 결과 8월 23일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8개 단체 대표 71명이 참석한 남만한족통일회가 개최되어 새로운 통합기구로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었다.

결성 초기 중앙본부는 마권자에 두었으며, 조직체계는 총장제로서 총장 아래에 민사부 ·교섭부 ·군사부 ·법무부 ·재무부 ·학무부 ·실업부 ·권업부 ·교통부 ·참모부 등 10개 부서를 설치하고 비서과와 사판소(査判所)를 둠으로써 민정과 군정을 겸비한 군정부(軍政府) 형태를 갖추었다.

주요 간부로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相悳)을 선출하였다. 지방행정조직은 각 현에 총관사무소를 설치하고 총관(總管) 이하 참사(參事) ·서기(書記) ·검무감(檢務監) ·검무원(檢務員) ·통신원 등 임원을 두었는데, 1923년까지 통화현 ·환인현 ·집안현 ·관전현 ·흥안현 ·유하현 ·임강현 ·장백현 등에 총관사무소 26개를 설치하였다. 의용군 조직은 1개 대대 산하에 5개 중대와 독립중대인 유격대, 헌병대의 7개 중대로 800여 명이 소속되었다.

활동은 한인사회 통치행정과 무기 및 군자금 조달, 일제 밀정과 부일배 응징, 일본 영사관 ·경찰서 ·주재소 ·남만철도 등의 일제기관을 공격하는 무장활동 외에도, 광동학교(光東學校)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기관지 《경종보(警鐘報)》 《대한통의부공보(大韓統義府公報)》 등을 발간하는 등 교육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구성원과 지도이념의 차이 등에서 오는 갈등으로 1923년 2월 전덕원(全德元) 계열의 의용군이 이탈하여 의군부(義軍府)를 결성하였다. 의용군 1 ·2 ·3 ·5중대가 그 해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결성하고, 1924년 11월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면서 통의부는 참의부 ·정의부에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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