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 집에 있던 그림까지 회수해 소장품 모두 기증

입력
수정2024.07.08. 오후 7:02
기사원문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가신이의 발자취] 국보 ‘세한도’ 기부한 손창근 선생을 기리며
고인(가운데)이 2018년 8월28일 기증원에 서명한 뒤 홀가분하게 웃고 있다. 왼쪽은 부인 김연순 여사, 오른쪽은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국보 ‘세한도’와 또 다른 작품 ‘불이선란도’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손창근(1929-2024) 선생이 지난달 11일 별세하셨다. 사흘이 지나도록 박물관 직원 그 누구도 선생의 부음을 듣지 못했다. 부고를 알리지 말라는 고인의 당부에 따라 가족장으로 장례를 마친 뒤에야 소식이 전해졌다. “박물관에 알리면 바쁜 분들께 폐를 끼치니 절대 연락하지 말라”는 그분의 뜻을 차남 손성규 교수가 전했다. 그런 분이셨다. 그분은 원칙에 엄정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간결한 분.

1974년 고서화 기증한 부친 이어
2008년부터 연구기금·임야·건물
2018년 ‘불이선란도’ ‘잔서완석루’
2020년 가장 아끼던 ‘세한도’까지


2006년 더운 여름날 그분을 처음 뵈었다. 내가 기획한 김정희 서거 150주년 기념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추사 김정희-학예일치 경지’에 전시할 ‘세한도’ 등 그의 소장품을 빌리러 서울 종로구 청운동 빌라로 갔다. 작품을 포장하고 박물관 규정에 따라 직원이 인수자로서 서명한 ‘인수증’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단박에 인수증을 되돌려주었다. 인수자 신원을 어떻게 믿느냐며 국립중앙박물관 관인이 찍힌 인수증을 가져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충분히 타당한 견해여서 같이 간 김규동 연구관(현 국립대구박물관장)이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직인이 찍힌 인수증을 가져오라고 했다.

새 인수증이 도착할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앉아 기다렸다. 땀이 계속 흐르는데 닦을 휴지나 손수건이 없어 난감했고, 일이 어그러져 김정희의 대표작을 전시에 내놓지 못할까 걱정에 휩싸였던 기억이 18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개성상인 집안 출신다운 치밀함을 몸소 경험한 날이었다. 그러나 전시를 마치고 작품들을 반환하러 갔을 때, 집 구석구석에 걸린 서화 작품들을 보여주며 정겹게 설명하던 그분의 친절한 면모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고인이 2018년 11월21일 기증식 리셉션에서 부인 김연순 여사와 함께 축배들 들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18년 내가 기증 담당 연구관이 되면서 만남이 잦아져 그의 이력을 물어볼 기회를 가졌다. 그는 개성에서 인삼 재배와 무역에서 떠오르는 실업가 손세기(1903-1983)의 장남으로 서울대 공대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서울 가회동에서 거주했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란을 가 부친을 도와 가업을 일으켰다. 개성에 모든 재산을 두고 와 얼마나 힘드셨냐고 물으니, 전쟁 기운이 감돌던 무렵 어느 날 밤 트럭을 가지고 몰래 개성 인삼밭으로 가 남은 인삼을 마지막으로 쓸어왔다고 말씀해주셨다.

피란 시절 백년가약을 맺은 동향의 김연순(1930년생) 여사가 당시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했다. 남편의 군 복무로 대구에서 신혼 생활을 했을 때, 대각선으로 누워야 제대로 잘 수 있는 작은 집에서 살았고, 빗물을 받아 군복을 세탁했다고 전했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늘 생활비가 빠듯했다고 한다. 바닥에 떨어진 고무줄 한 개도, 식당 냅킨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으며,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가 손창근 선생의 인생 좌우명이었다.

개성상인 부친과 함께 모은 컬렉션
어려운 결정에 기증 전날 잠 못 이뤄

“원칙에 엄정하고 민폐 싫어했던 분”

평생 근검절약하며 부친이 모은 ‘세한도’와 ‘불이선란도’ 등 한국 회화사를 대표하는 명품 고서화 컬렉션을 소중히 간직한 그는 1960년대 외국계 상사에 근무하면서 고서화를 본격적으로 수집했다. 수집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소장품으로 김정희 예서(隸書) 대표작 ‘잔서완석루’를 꼽았다. 부친이 꼭 사라고 추천했는데, 당시 보유하고 있던 현금이 부족해 증권을 팔아 힘들게 이 작품을 구입했을 정도로 애를 많이 썼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고서화 한 점 한 점 수집할 때마다 얼마나 정성을 쏟았을지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손세기·손창근 부자는 정성을 쏟아 모은 컬렉션과 자산을 아무 대가 없이 국가와 사회에 기증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손세기 선생은 1974년 서강대에 보물 ‘양사언 필 초서’ 등 고서화 200점을 기증했다. 손창근은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회에 연구기금으로 1억원을 기부했다. 이어서 2012년 4월 경기 용인과 안성 지역 임야 662헥타르(200만 평, 남산의 두 배 면적)를 산림청에 기증했다. 그가 자비를 들여 50여년간 해마다 나무를 심고 도로를 내며 소중히 가꾸어온 숲이 이제는 부친의 호 ‘석포(石圃)’를 딴 ‘석포숲공원’이 되어 시민들의 쉼터로 거듭났다. 거액을 기부하였으나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삶을 원치 않았다. 심지어 남들 다 하는 회갑연이나 칠순잔치도 마다했다. 대신 88살 미수연을 기념해 2017년 50억원 상당의 건물과 함께 1억원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했다. 90살을 맞이한 2018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불이선란도’와 ‘잔서완석루’ 등 202건 304점을 기증했다.

김정희 예서 ‘잔서완석루’, 조선 19세기 중반, 종이에 먹, 가로 177.4㎝, 세로 4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018년 손세기・손창근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년 ‘세한도’ 기증을 마지막으로 그의 소장품 모두 국가의 것이 되었다. 2남1녀 자식들에게 한 점도 물려주지 않고 자식들 집에 있던 그림을 회수해 기증했다.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2018년 기증식 전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로 소장품에 애정을 기울였던 그는 가장 아끼던 ‘세한도’를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인 김 여사의 간곡한 권유로 ‘세한도’ 기증을 결심했다.

별세 소식을 듣고 그분과 나누었던 문자 메시지를 찬찬히 읽어봤다. 찾아뵙는다고 또는 봄이 왔다고, 생신이어서, 새해가 왔다고 연락드렸다. 이따금 꽃바구니를 보내드렸다. 솔직하고 종종 농담도 툭툭 잘 던지시던 그분은 “보고 싶다”고, “잊지 않고 생각해주어 고맙다”고 하셨다. 그런데 정작 먼 길 가실 때 올리고 싶었던 흰 국화 한 송이를 그분은 받지 않으셨다. 조문하러 올 시간에 박물관 일 더 많이 하라는 뜻이었을까?

“선생님, 주신 큰 선물, 박물관에서 잘 보존하고 널리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모두 선생님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수경/국립춘천박물관장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생활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