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낙수효과, 환상 속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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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영 기자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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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영 기자

삼성전자가 반도체 업황 회복을 타고 2분기에 10조원 넘는 영업이익을 냈다.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실적으로, 영업이익이 1조원을 밑돌던 1년 전과 비교하면 무려 15배 늘어난 규모다. 폭발적인 실적 상승에는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 가격 반등과 인공지능(AI)용 반도체 수요 급증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삼성전자 주가는 3년5개월 만에 최고치로 뛰었다.

정부도 삼성전자의 어닝 서프라이즈를 바라보며 모처럼 웃었을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6개월 전보다 0.4%포인트 높여 2.6%로 전망했다. 반도체를 필두로 한 수출 회복세를 반영한 숫자다. 기업들 실적이 좋아지면 세수 확충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반도체 불황으로 지난해 각각 11조5000억원, 4조6000억원씩 적자를 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올해 법인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통상 전체 법인세의 약 10%를 내온 두 회사의 실적 향상은 가뜩이나 심각한 세수 부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올해 법인세를 내지 않는 이유가 영업이익 적자 때문만은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적자였지만 영업 외 손익은 29조원 흑자, 법인세 차감 전 순이익은 17조5000억원에 달한다. 나라살림연구소에 따르면 해외자회사 배당금 법인세 감면,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설비투자 및 연구·개발(R&D) 세액공제 확대 등 정부의 적극적인 감세 정책으로 깎아준 세금이 12조원을 넘는다. 삼성전자의 법인세 0원은 정부가 추진한 적극적인 감세 정책의 결과라는 것이다.

세수 결손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도 정부·여당은 대기업과 고소득층 세금을 더 깎아주려 한다. 배당과 자사주 소각을 통한 주주환원에 적극적인 기업은 법인세를 줄여주고, 대기업 최대주주가 보유한 주식 가치를 일반 주주의 주식 평가액보다 20% 가산하는 최대주주 할증평가 제도는 없애 상속세 부담을 덜어주겠다고 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기업 세제는 기업가 정신을 세우고 혁신을 유인하고 보상을 작동시킬 효과적인 수단임에도 그간의 역할에 아쉬운 점이 많다”며 “경제 활동을 촉진하는 인센티브로서의 세제로 탈바꿈이 필요하다”고 했다. 재계에선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 대기업 R&D 세액공제 확대, 임시투자세액공제 연장 등 요구사항을 쏟아내고 있다. 마치 엄청난 세금 부담 때문에 기업들이 혁신도, 투자도 못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국의 법인세 실효세율은 17.5%로, 영국(19.8%), 프랑스(25.6%), 호주(29.3%)보다 낮다. 조사 대상 중 한국보다 실효세율이 낮은 나라는 미국(14.8%)과 일본(17.3%)뿐이었다. 법인세 최고세율이 적용된 법인은 151곳(2022년 기준)으로, 전체 법인세 납부 법인의 0.03%에 그친다.

지금 시장에선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의 고대역폭 메모리(HBM) 품질 테스트를 통과하느냐 마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다. AI 반도체에 들어가는 HBM 수요가 급증하면서 엔비디아의 밸류체인에 있는 SK하이닉스를 비롯해 대만 TSMC, 미국 마이크론 등은 수혜를 보고 있지만 삼성전자만 ‘AI랠리’에서 소외돼 있어서다. 삼성전자 주가는 엔비디아 납품 관련 소식에 따라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사실상 독점 공급하는 상황에서 삼성전자 입장에선 엔비디아 HBM 납품이 절실하다. 비메모리 분야에서 TSMC와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고, 후발주자인 마이크론은 기술 격차를 좁히며 추격하고 있다.

“삼성 내부 얘기를 들어봐도 D램에 안주하다 HBM 호황에 대비하지 못한 측면이 크다. 최고결정권자가 오판한 것이다. 삼성전자가 엔비디아 하청업체로 전락했다고들 우려하지만, 하청업체만 되어도 다행이다. 반도체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상당하다.” 한 전직 관료의 진단이다. 반도체 사업수장 교체에 이어 HBM 개발팀 신설 등 전열을 정비한 삼성전자가 판세 뒤집기에 성공할지 지켜볼 일이다. 지금 정부가 할 일은 대기업 감세에 힘을 쏟기보다 낙수효과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왜 낙수효과가 작동하지 않는지 구조적 요인들을 짚어보는 것이다. 대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 관행, 노동시장 이중구조 등이 지속되는 한 아무리 삼성전자 실적이 폭증하더라도 온기를 체감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머물 것이다.

이주영 경제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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