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내겐 닻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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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설야 시인



두 평짜리 방 안이 일망무제다
화분 하나가 들어오면서
난바다 한가운데 구부러져
원을 이룬 수평선처럼 방이 출렁거린다
야생의 말잔등이라도 올라탄 듯 파도가 치면
잴 수 없는 수심을 향해
닻 내리는 나무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지만
떨어진 닻은 끝없는 심해로 내려간다
과외받는 아이들이 다 잘려 나갔지만
병든 어머니는 밥보다 더 많이 먹는 약을 끊을 수 없고
차라리 닻줄을 끊어 버릴까 망설이다
무저갱 속에서 허방 디디며 길을 찾는다
닻을 내릴 때마다 닻나무에서 이파리가 떨어진다
물벼락과 파도를 얻어맞고 나자빠졌다가
힘겹게 나를 부축하는 일도 신물 난다
내 닻나무는 꽃을 피우기나 할까
떨어진 나뭇잎을 언제나 끌어올려
돛을 올릴까
도대체 가늠할 수 없는 바닷속
다시 닻을 내 안으로 빠뜨린다

김시언(1963~)


시인에겐 동아줄이던 “과외”도 다 끊긴 어느 날. 수심이 가득한 방 안으로 “화분 하나가 들어”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잎이 닻처럼 생긴 닻나무와 함께 간신히 숨을 쉬던 방 안은 어느새 출렁거리는 “난바다”가 되었다.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는” 허기진 날들. 파도는 갈수록 거세어지고, 도저히 닻을 내릴 수가 없다.

어머니는 병이 깊어 “밥보다 더 많이 먹는 약”을 끊지 못했다. 난파선 위에서 시인은 “차라리 닻줄을 끊어 버릴까 망설”이지만, 그럴 수도 없다. 언제나 등에는 돛 대신 치료비와 고지서들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수심을 알 수 없는 바닷속으로 다시 닻을 천천히 내린다. 방 안은 뒤집힐 듯 흔들리고, 시인의 가슴 밑바닥에 박힌 닻혀도 흔들린다. 그때 언젠가는 돛처럼 꽃을 피워줄 닻나무가 소리친다. 어서 닻줄을 끌어올리라고, 돛을 달고 나아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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