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당연하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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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05. 오후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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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어린 딸의 질문 하나도
정성껏 설명하는 엄마를 보며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 관계도
노력해야만 가능함을 깨닫다




한낮의 지하철 객실 안은 한산했다. 나는 해가 쏟아지는 창을 등지고 앉아 졸고 있다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작달막한 아주머니가 내 앞을 지나고 있었다. 독특한 억양으로 웅얼대던 목소리가 구원이니 진리니 하는 단어에서만 정확해졌다. 지하철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의아해지곤 했다. 전도도 전달도 목적이 아닌 저 기이한 혼잣말은 대체 뭘까. 아주머니는 주변 한번 둘러보지 않고 옆 객실로 사라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열차의 끝까지 걸어간 아주머니가 되돌아올 테고, 객실 안내방송이 아주머니를 뒤따를 것이었다. 열차 내에서 무리하게 종교 활동을 하시거나 판매 행위를 하시는 분은 다음 역에서 하차해주시기 바랍니다. 늘 그런 순서였다. 아주머니가 물건을 파는 사람으로, 큰소리로 싸우거나 소란을 떠는 사람으로 바뀔 뿐 이후의 과정은 똑같았다. 지속적인 소음에 무뎌지는 것처럼 못내 익숙한 일상이었다.

진리가 뭐야? 이번엔 왼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나와 나란히 앉은 사람 곁으로 빠져나온 작은 발이 보였다. 꼭 맞는 샌들 앞쪽으로 발가락들이 작은 치아처럼 돋아 있었다. 진리가 뭐야, 엄마? 아이가 발가락을 꼼질대며 다시 물었다. 변하지 않는 거야. 약속하는 거? 약속은 깨질 수도 있잖아. 진리는 안 변하는 거야. 절대 안 변한다고, 매일매일 똑같다고 믿을 수 있는 거.

아이가 살그머니 웃으며 말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 같은 거?

귀여워라. 나는 아이를 따라 몰래 웃으며 아이 엄마를 살폈다. 아이 엄마도 틀림없이 나처럼 아이가 귀여워 견딜 수 없다는 얼굴로 웃고 있겠지. 그러나 그녀는 여상한 얼굴이었다. 아이의 말에 신경 쓰기보다 그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 중인 듯했다. 어쨌거나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고 나는 좋은 걸 봤다고 생각했다. 모처럼 귀엽고 즐거운 걸 봤다고, 한낮의 졸음 끝에 목격하기엔 과분한 풍경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지하철에서 내린 뒤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귀여웠고 아이 엄마는 다정하고 신중해 보였다. 그들 사이에 공고히 자리 잡은 신뢰가 사랑스럽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이상하게 여긴 건 그들 사이에 벌어진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나의 태도였다. 그들이 나란히 앉는 것이, 서로를 향해 질문하고 답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서로를 호명하는 일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이다. 그들 사이에는 지금껏 무수히 많은 소란과 노력과 보답이 존재했을 터였다. 나는 시행착오 끝에 견고해진 관계의 단면을 구경했을 뿐이고, 관계의 지속을 위해 앞으로도 저들은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내던져야 할 것이었다. 어느 한쪽의 노력이 미진하다고 느낄 때 아이는 대뜸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엄만 왜 날 미워해?

한낮의 거리는 열차 안과 달리 빼곡하고 복잡했다. 뜨거운 햇빛이 직각으로 내리꽂혀 정수리가 얼얼해질 정도였다. 나는 가로수 아래 미약하게 드리운 그늘을 따라 걸었다. 6차로 위로 차들이 신호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도로 위로 내려섰다. 상점 유리창 안쪽으로 무언가를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걷고 몸을 부딪친 사람에게 사과했다.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노력 중이었다. 정교한 규칙 안에서 모두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단 한 명만 노력을 멈추어도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매 순간 무수히 노력해야만 가까스로 가능한 일상이었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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