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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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오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도에 있는 위도를 그대로 따라 항해하는 것이다. 북위 40도를 그대로 평행하게 간다. 다른 방법은 대권 항해를 하는 것이다. 지구의 중심을 지나 두 지점을 연결하면 지구상에 선이 그어지는데 이를 대권(great circle)이라고 한다. 알래스카를 지나는 길이 나온다. 대권항로를 이용하면 항해일수가 3일 정도 더 짧아진다. 여름에는 선박 대부분이 대권 항해를 한다. 하지만 겨울은 다르다. 저기압이 일본 근처에서 발생해 계속해서 알래스카 쪽으로 전진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는 선장들에게는 이 저기압을 어떻게 피하는지가 큰 숙제다. 심한 저기압은 태풍과 같은 위력을 가진다.

배가 북태평양에서 큰 저기압을 만나게 되면 그 저기압을 뚫고 나아가기가 정말 어렵다. 그래서 선장들은 오히려 베링해의 섬과 캄차카반도에 있는 섬을 향해서 항해해 나간다. 베링해에 있는 섬들의 뒤쪽에서 강한 바람과 파도를 피하고자 하는 의도다. 이 섬들이 속한 알류샨열도 남쪽은 북태평양이고, 그 북쪽은 베링해다. 애투섬 등은 굉장히 높기 때문에 북태평양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바람을 모두 막아준다. 베링해와 러시아 수역으로 들어가서 그 큰 섬의 뒤쪽에 3마일 정도 되는 지점에서 안전하게 대기하는 것이다. 이것을 셸터링(sheltering)이라고 한다. 마치 어머니 배 속의 태아처럼 안전한 지역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버티고 나면 북태평양의 저기압이 지나간다. 바다가 잔잔한 상태가 되면 다시 우리 배는 태평양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고 항해를 시작한다.

비가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면 30년도 더 지난 일들이 생각난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갈 때 너무나 잔잔해서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던 애투섬. 우리나라로 올 때는 바다가 뒤집어졌다. 우리는 애투섬의 뒤로 돌아가서 셸터링을 했다.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속담이 우리나라에 있다. 바다에서 비빌 언덕이 바로 안식처다. 두렵고 무서운 바다에서 불쌍한 선박과 선원을 피난시켜줄 수 있는 어떤 수단이 있다면 정말 반갑고 안도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 선장들은 북태평양과 베링해를 지날 때 우리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섬들을 찾아냈고 활용해왔던 것이다.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미국 서부를 떠난 선박은 오히려 섬 쪽으로 붙어서 항해하게 된다.

바다가 험한 상태가 될 때 우리 배가 피난할 수 있는 안식처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출발할 때부터 베링해와 캄차카반도에 있는 어떤 섬을 목표점으로 염두에 두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피할 수가 있는 준비가 된 상태로 출항하게 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을 살다 보면 정말 어려운 위기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 상대방이 너무나 힘이 센 사람이라서 우리가 상대하기 어려운 지경일 때가 있다. 그러나 든든한 형님과 같은 사람이 뒤에서 지켜준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어려움이 있을 때 육지에서도 가족, 직장 또는 동창회와 같은 공동체가 우리를 지켜주는 방패 노릇을 한다. 육지에서도 이러한 안식처가 있기에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큰 안도가 된다. 바다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운다. 안식처도 내가 바다에서 얻은 지혜 중 하나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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