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 ‘우범선’ 처단... 고영근 선정비 파주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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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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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내 군부대에 존치 확인... 장단부사 당시 1889년 건립 추정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일조했던 조선군 훈련대 우범선 대대장을 직접 처단했던 고영근 전 장단부사 선정비가 130여 년 만에 파주 민통선 한 군부대에 존치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파주학연구소 제공

파주 민통선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일조했던 조선군 훈련대 우범선 대대장을 처단했던 고영근 전 장단부사 선정비가 발견됐다.

16일 파주문화원 부설 파주학연구소에 따르면 민통선 내 군부대에 고영근 장단부사의 선정비가 있는 것으로 존치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군부대 측은 지난 8일 군부대 내 오랫동안 존치된 비석의 가치와 역사성 등을 확인해 달라고 파주학연구소에 요청한 바 있다.

발견 당시 선정비 높이는 1m로 비신 하부 및 대석 등이 토사에 묻혀 있었다. 비석 전면의 제목은 ‘행(行職) 부사 고공 영근 청백 애민 선정비’로 고영근이 장단부사 재직 당시인 1889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됐다.

파주학연구소관계자는 “승정원일기 1888년 5월25일자에 고영근은 백성 구제에 힘써 임기가 찼지만 연임을 고종이 허락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고영근 선정비가 이목을 끄는 건 그가 을미사변(1895년) 당시 명성황후 시해에 일조했던 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1857~1903년)을 직접 처단해서다. 우범선은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원예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부친이다.

그는 1903년 11월24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우범선을 초대한 뒤 흉기로 살해하고 자수해 8년 복역한 후 1911년 출소했다.

고종실록 43권(고종 40년 1903년 12월3일)에는 중추원 부의장 김가진 등이 우범선을 죽이고 일본경찰서에 구속된 고영근을 탕척하고 일본 공관에 조회해 즉시 호송해 돌아 오게 해달라고 상소했다고 기록됐다.

고영근은 귀국해 홍릉(명성황후) 능참봉이 됐다가 고종 승하 후 남양주 홍릉(고종과 명성황후 합장릉)을 돌봤다. 특히 고종 붕어 후 태황제(太皇帝) 시호를 올리기를 상소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비밀리에 석장과 각수를 불러 ‘대한·고종 태황제 홍릉·명성황후 부좌’를 써 넣어 황제국의 자존심을 살렸으며 이로 인해 순종도 황제능비로 남게 됐다.

차문성 파주학연구소장은 “고영근 전 장단부사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일조했던 조선군 훈련대 우범선 대대장을 처단했다는 점에서 광복절에 그의 정신을 떠올려볼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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