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날마다 따가운 시선과 사투… 병마보다 더 큰 고통 [고통의 굴레, 희귀질환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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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25. 오전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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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주변 시선에 힘들어...희귀질환자들, 사람들의 인식 달라졌으면




희귀질환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고충을 겪어야 했다. 경기일보가 만난 희귀질환자들은 평생을 가져가야 할 몸의 고통보다 주변의 냉혹한 시선이 주는 고통이 더 힘들었다고 했다. 일일이 설명하지 못한 채 쌓여가는 오해는 이들을 더욱 고립시켰다.

매일 병마보다 무서웠던 시선과의 사투, 그 과정이 담긴 일기장의 한 부분이다.

■ 임지영(가명·12·평택)양 어머니의 일기 “우리 아이도 다른 아이와 똑같아요”

엔젤만증후군을 앓고 있는 임지영양(가명·12·평택)은 어머니의 도움없이 일상생활을 하기 어렵다. 이진기자

오늘 오랜만에 지영이와 워터파크에 다녀왔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가 얼마나 신이 났는지 싱글벙글 웃기 바빴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자주 데려와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우리 지영이는 엔젤만증후군을 앓고 있다. 간단한 단어 몇 개만 내뱉을 수 있고 가끔 소리를 지르거나 몸을 제어하기 힘들어 주변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도 어렵다. 무의식중에 돌발행동을 하기도 한다.

오늘도 그랬다. 갑자기 내 손을 뿌리친 지영이가 뒤에서 걸어오던 아이의 손을 쳤다. 아이 아빠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놀란 마음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이가 몸을 제어할 수 없어 그랬다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그 아이 아빠는 지영이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했나 보다. 나를 한번 훑어보더니 “왜 이런 아이를 여기 데리고 왔어요. 다른 사람한테 민폐잖아요” 소리친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지영이의 손을 붙들고 죄송하다고 고개만 숙였다. 혹시 지영이가 알아듣는 건 아닐지,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려다 상처만 준 건 아닐지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모른다.

처음도 아닌 이런 상황이 매번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한다. 어느 날 지영이를 데리고 마트에 갔다가 다른 아이와 부딪치게 됐다. 그 아이 엄마는 “장애를 가진 애를 데리고 마트에 오면 어떻게 해요. 집에나 있을 것이지”라며 소리쳤다. 화가 났지만 “아이가 아파서 그런 거니 이해해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화를 내봤자 돌아오는 건 더 큰 냉대였기 때문이다.

바닷가 근처 식당에 갔던 어느 날, 지영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증상이 발현된 것.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한 아저씨가 지영이를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다.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날 선 말들.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따졌지만 “저런 애를 데리고 온 당신 잘못이지”라는 더 큰 면박이 돌아왔다. 지영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곳에서 언쟁을 벌이는 건 지영이에게 더 큰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우리 지영이는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아요. 조금 특별합니다’라고 말해도 이해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올까. 어느 순간부터 우리 아이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좋아하게 됐다.


설윤경(가명·27·여주)씨의 일기 “주변의 오해로 일상이 망가졌어요”

기면증을 앓고 있는 설윤경씨(가명·27·여주)가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고통 받았던 나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진기자

오늘 회사를 그만뒀다. 몇 번의 도전 끝에 입사한 지 8개월 만이다.

매번 졸다가 지각하는 나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의지박약’이라고 했다. 긴장하면 나타나는 발작 증세 때문에 중요한 발표는 번번이 망쳐버렸다. 직장 상사의 쓴소리에도 꾹 참고 버텼지만 한계가 왔다. 더 이상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과 더 이상 내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공존한다. 이곳에 취직하기 위해 노력했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시작은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나는 늘 피곤했다. 잠을 아무리 많이 자도 수업 시간이면 잠이 쏟아졌다. 친구랑 대화하다가도 순간적으로 잠에 들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잠 때문에 친구들과의 약속을 번번이 어기게 됐다. 그렇게 친구들은 하나둘 내 곁을 떠났다.

학창 시절 내내 ‘친구의 말을 무시하는 이상한 애’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가장 친했던 친구도 잃었다.

그 친구는 내게 “너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 게 맞냐. 실망이다”라고 말했다. 억울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내가 답답했다.

나는 자책만 하면서 지냈다. 자존감은 점점 떨어졌다.

학창 시절의 경험은 대학에서도 이어졌다.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주변의 시선이 무서워서, 다시 또 사랑했던 친구를 잃을까 봐 나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 무기력했다. 아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20대를 이렇게 방 안에서만 보낼 수 없어 몇 번의 도전 끝에 나선 사회였는데....

여전히 현실의 벽은 높았다.

기면증이라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기면증이 희귀질환이라는 걸, 갑자기 쓰러져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잠이 조금 많은 병 정도로 생각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졸음으로 인해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는 내 고통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까. 이해해 줄 사람은 있을까.


김종규(가명·52·용인)씨의 일기 “더러운 사람 아닙니다... 옮지도 않아요”

김종규씨(가명·52·용인). 본인제공

일기장을 편 게 얼마 만인지. 그동안 추억하고 싶은 날이 없어 일기를 쓰지 않았는데 오늘은 그동안 손발바닥농포증, 판상형 건선으로 힘들었던 지난날이 스쳐 일기장을 폈다.

온몸을 뒤덮은 염증, 1~2㎜ 정도의 작고 투명한 수포, 시간이 지나 노란 고름까지 들어찬 몸. 처음 증상이 나타난 일곱 살 때부터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나는 진단을 받은 후로 한 번도 반바지와 반팔을 입은 적이 없다. 그래서 내게 가장 괴로웠던 건 학창 시절 80명에 달하는 반 친구들이 속옷만 남기고 옷을 홀딱 벗은 채, 한 공간에 있어야 하는 신체검사였다.

그날이면 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부모님은 선생님께 친구들이 없을 때 검사해 달라고 부탁하셨지만, 그때는 그런 부탁이 통하지 않을 때였다. 80명의 친구 앞에서 옷을 벗어야 했다. 내 몸을 본 친구들이 웅성거리던 모습, 한 친구가 “너 이거 옮기는 거 아니야?”라고 묻던 그 말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어찌 학창 시절뿐이랴. 사회에 나와서도 서류전형을 통과했다가 면접에서 떨어지길 반복했다. 면접관들은 “마케팅이나 영업에 부적절하다”고 잘라 말했다. 어디에서도 나의 겉모습을 편견 없이 봐주는 곳은 없었다.

지금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여전히 내게는 차별적인 시선이 따라다닌다. 식당이나 미용실에서 각질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한 적도 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이 더러워 하기 때문에 우리 가게는 이용할 수 없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고립된 나는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자존감은 떨어졌다. 하루하루 불안했고 우울했다. 극단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45년이다. 편견과 차별 속에 살았던 세월. 지금 내가 바라는 건 한 가지다.

나를 포함한 희귀질환자들이 왜곡된 시선 속에 살지 않는 것,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져 당당히 세상에 나와 함께 어울리는 것이다. 경기α팀


경기α팀 : 경기알파팀은 그리스 문자의 처음을 나타내는 알파의 뜻처럼 최전방에서 이슈 속에 담긴 첫 번째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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