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 시장 안에 있으면 의사도 상인인가요? [視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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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9.29. 오전 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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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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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커버스토리 視리즈
추석 후 민생의 민낯 2편
흥행 성공한 온누리상품권
기존보다 상향한 할인율에
'오픈런', 사이트 마비까지
다만 효과 체감 상인은 적어
전통시장 활성과 거리 먼 업종
상품권 사용 가능토록 한 탓
무분별한 사용처 확대 막아야
온누리상품권 사용처가 지나치게 확대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올 추석을 앞두고 전통시장에서 쓸 수 있는 온누리상품권이 '역대급 흥행'을 기록했다. 온누리상품권을 판매한 담당 부처는 "흥행몰이에 성공했다"는 자찬을 늘어놨다. 하지만 추석이 끝난 후 찾은 전통시장에선 온누리상품권 흥행의 효과를 찾기 힘들었다. 여기엔 정부 정책의 '오류'가 한몫했다.

추석을 보름여 앞둔 9월 2일. 중소벤처기업부가 온누리상품권을 '특별할인'이란 명목으로 대량 판매했다. 고물가로 침체를 겪고 있는 전통시장을 돕기 위한 이른바 '추석 민생 안정 대책'의 일환이었다. '특별할인'을 앞세운 만큼 할인율을 기존보다 대폭 상향했다. 

모바일ㆍ충전식 카드형 온누리상품권의 할인율은 기존 10%에서 15%로, 종이(지류형) 상품권 5%에서 10%로 상향했다. 소비자가 10만원짜리 온누리상품권을 모바일로 사면 8만5000원에, 종이 상품권은 9만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는 거다.

높은 할인율에 온누리상품권을 구매하려는 소비자들이 줄을 이었다. 일부 판매점에선 '오픈런'까지 벌어졌다. 온라인 판매처도 마찬가지였다. 상품권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발매 첫날인 9월 2일엔 판매 사이트가 마비되기도 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당초 3000억원 규모로 준비했던 상품권은 총 4061억원어치가 팔려나갔다. 이마저도 발매 3일 만인 9월 5일 품절됐다. 정부가 9일부터 1조원 규모의 2차 판매에 나선 것도 이런 이유다. 온누리상품권이 역대급 흥행 몰이에 성공한 셈이다.

그렇다면 역대급 흥행에 성공한 온누리상품권은 경기침체에 신음하고 있는 전통시장의 구원자 역할을 했을까. 아쉽지만 따져볼 점이 많다. 온누리상품권의 흥행을 체감한 전통시장 상인이 생각만큼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사용처의 무분별한 확대는 '전통시장 살리기'라는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서울 마포구 공덕시장에서 24년째 야채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성지현(56)씨는 "추석 연휴 기간에 온누리상품권으로 판매한 금액이 100만원에 불과했다"며 "온누리상품권의 수혜를 받았다고 보기엔 적은 금액"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대표 시장인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에서 과일가게를 운영 중인 강두겸(가명ㆍ65)씨도 "과일값이 올라서 그런지 시장에서 과일을 사려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며 "온누리상품권의 흥행 효과를 체감하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역대급 흥행에도 전통시장 상인에게 돌아간 효과는 크지 않았다는 건데, 원인이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정부의 정책 변화를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 실제로 정부는 온누리상품권 특별 할인 판매 하루 만인 9월 3일 "전통시장과 상점가의 상권 활성화를 위해 온누리상품권 가맹 제한 업종을 40종에서 28종으로 대폭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그 결과, 전통시장과 상점가에 있는 법무사무소와 세무사무소는 물론 요가ㆍ필라테스ㆍ한의원ㆍ치과의원ㆍ동물병원ㆍ노래연습장 등에서도 온누리상품권을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전통시장 활성화와는 거리가 있는 업종들이다.

박기현 인천 현대시장 상인회장은 "온누리상품권이 병원 등 전통시장 활성화와는 거리가 먼 업종에 쓰이는 것을 시장 상인들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전통시장 상인들 내지는 소상공인들에게 혜택이 오도록 정부 대책을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온누리상품권은 전통시장과 무관한 곳으로 흘러나가는 비중이 적지 않다. 2020년 한국국제경제학회가 진행한 설문조사(온누리상품권 사용자 3만2850명) 결과에 따르면, 상품권의 사용처로 전통시장이 아닌 곳을 선택한 소비자는 절반에 달하는 46.0%를 기록했다. '식료품ㆍ생활용품 구매'가 34.4%, 식사(5.8%), 가족ㆍ지인 선물(3.7%), 의복ㆍ미용(2.2%)이 뒤를 이었다. 시장 내 마트나 편의점, 브랜드 체인점 등에서도 상품권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온누리상품권의 사용처를 확대했다는 걸 감안하면 올해 추석에는 전통시장에서 온누리상품권을 쓴 소비자가 더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사용처를 섣불리 확대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중기부는 "전통시장에 있는 치과나 한의원 등을 찾은 소비자 중에선 시장에서 또다른 물품을 구입할 분들이 많을 것"이란 전제로 온누리상품권의 사용처를 늘렸지만,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어떠한 조사도 진행하진 않았다. 객관적인 지표 없이 '추정'으로 온누리상품권의 사용처를 확대했다는 거다.

하준경 한양대(경제학) 교수는 "온누리상품권은 사용처를 제한해 상품권의 용처를 전통시장과 같은 특정한 곳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사용처를 무분별하게 확대하면 원래 의도했던 소상공인이나 전통시장 상인이 아닌 큰 업체들이 혜택을 볼 수도 있다"고 꼬집었다. 온누리상품권의 '역대급' 흥행에도 전통시장 상인들이 웃지 못한 이유를 면밀하게 살펴봐야 할 시점이라는 얘기다.

홍승주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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