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던 길 끌려간 생지옥…감금과 탈주는 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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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02. 오전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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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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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수용 디아스포라 <1> 전국의 형제복지원들

- 소년 손석주가 두번이나 끌려간
- 부산 부랑인 시설 영화숙·재생원
- 다짜고짜 잡아다 가둔 이곳에선
- 구타·질병 심지어 죽음도 일상

- 탈출 후 일자리 찾아 서울 갔다
- 서울·대전시립아동보호소 등
- 전국 집단수용시설로 끌려다녀

- 영화숙·재생원 생존자협 회원들
- 150명 복수시설서 유사한 경험

- 1960년대 집단수용 디아스포라
- 특정지역·시설에 매몰되지 말고
- 국가적으로 자행된 ‘부랑자 소탕’
- 그 거대한 체계의 진상을 밝혀야

소년은 목적한 곳 없이 열차에 올랐다. 검표원의 눈을 피해 열차 칸을 넘나들고, 아량 넓은 승객 사이를 파고들어 몸을 숨겼다. 열차가 경부선 철길을 따라 급행하는 동안 소년도 분주히 살길을 찾았다. 서울과 부산 그 어디로 향하는지 소년은 알지 못했다. 애초 기차 머리 방향은 그에게 상관없는 문제였다. 멀쩡한 집을 놔두고 ‘피난’ 떠난 처지였다. 그저 열차가 계속 달리기만을 바랐다.

1960년대 부산지역 최대 부랑인 수용 시설이었던 영화숙과 재생원의 수용인 모습. 성인 ‘부랑인’과 어린 ‘부랑아’가 함께 집합했다. 표면적으로 영화숙은 어린이, 재생원은 성인을 수용했으나 실상 마구잡이 배치가 이뤄졌다. 영화숙재생원피해생존자협의회 제공

그러나 종국에는 열차 공안에 적발되거나, 기어코 당도한 종착역에서 하차해야 했다. 멈춰 선 열차에서 소년은 절규했다. 일상으로부터 분리·수거돼 쓰레기가 되는 삶을 강요받고 싶지 않다고. 영화숙·재생원과 같은 부랑인 집단수용시설로 끌려가 세상에서 잊혀선 안 된다고.

기대는 늘 어긋났다. 열차가 닿는 곳마다 집단수용시설이 있었다. 새마을호가 그랬다. 1969년 운행을 개시한 새마을호의 당시 명칭은 ‘관광호’다. 이름대로 전국 관광용 열차다. 경부선을 시속 120㎞로 4시간 50분 만에 주파하는 당대 가장 빠른 열차였다. 정차 역으로는 부산(진)~동대구~대전~서울역 4곳을 뒀다. 대도시마다 승객을 태우고 내렸다. 사람이 넘치는 지역마다 명칭과 장소를 달리한 인간 분리수거장들이 있었다. 영화숙·재생원과 형제복지원(부산), 대구희망원, 서울·대전시립아동보호소….

환갑이 된 소년 손석주(61) 씨는 “열차에서 내려 향하게 되는 곳은 늘 또 다른 영화숙·재생원, 또 다른 형제복지원, 또 다른 지옥이었다”고 회상했다.

▮돌고 돌아 종착지 ‘형제복지원역’

부산지역 집단수용시설로부터 ‘피난’하기 위해 열차에 올랐던 손석주 씨. 김태훈 PD

손 씨는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다. 영화숙·재생원은 1960년대 부산에서 운영된 부랑인 시설이다. 그는 10대 시절 두 차례 재생원에 끌려갔다. 부산 중구 일대에서 신문을 팔다 한 번, 부산진역 앞에서 고향 양산 물금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다 한 번.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잘 알려진 ‘군대식 통제’가 이곳에서 기원했다. 부모가 멀쩡하게 살아 있어도 행색이 남루하면 단속됐다. 하루의 시작은 늘 제식 훈련이었다. ‘소대장’ 등 완장 찬 원생이 동료 원생을 폭력으로 다스렸다. 밥은 강냉이죽이나 꽁보리밥 정도가 다여서 늘 굶주렸다. 좁은 방마다 30~50명씩 아이가 들어차 칼잠을 잤다. 이들 사이로 옴이며 진드기가 퍼져 겨울에도 옷을 벗고 살았다. 배우고 싶어도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아파도 병원 외래를 꿈꾸지 못했다. 맞아서, 굶어서, 병들어서 죽은 아이는 뒷산에 묻히거나 근처 늪지대에 수장됐다.

그가 협의회에 속했다고 해서 영화숙·재생원에서만 수용 피해를 당했던 건 아니다. 재생원 수용·탈출 뒤 그는 구두닦이 등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일을 하려면 사람이 많은 지역으로 가야 했고, 그때마다 기차에 몸을 실었다. 입에 풀칠이 버거웠던 사정에도 부산역만큼은 내리기가 꺼려졌다. 깊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실상 그가 향하는 곳 어디든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다. 그는 서울 용산역에 들렀다가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수용돼 수개월을 갇혔다. 어떤 날은 대전역을 지날 즈음 열차 공안에게 잡혀 대전시립아동보호소로 끌려갔었다. 대구역에 내려 거리를 헤매다 대구희망원으로 강제 수용되기도 했다. 사람을 때릴 때 휘두르는 것이 방망이냐 주먹이냐, 하루에 두 끼를 주느냐 세 끼를 주느냐의 차이일 뿐 시설 모두 군대식 통제가 이뤄진 건 매한가지였다. “전국이 하나의 시스템처럼 똑같이 해왔다”는 게 손 씨의 설명이다.

시설의 운영 구조는 물론, 원생의 수용 방식도 같았다. 부랑아 시설을 표방했으나 실상 거리에서 눈에 띄는 아동이라면 누구든 단속 대상이 됐다. 단속은 행정·경찰 공무원보다는 주로 시설 관계자가 맡았다. 고향에 엄마가 계신다고 하소연해도 집을 찾아주지 않았다. 기약도 없이 시설 안에서 썩게 했다. 유독 부산 집단수용시설들이 특유의 가혹한 방식을 택했다거나 영화숙·재생원, 형제복지원만이 군대식 통제를 자행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협의회 회원 150여 명 중 절대다수도 복수의 시설에서 유사 피해를 경험했다. 이들은 한 시설로 수용됐다가 탈출한 뒤 재차 단속되면서 또 다른 시설에 갇혔다. 때로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연고도 없는 타지의 시설로 전원(轉院)됐다. 가난할지언정 부모의 보살핌 아래 살던 아동이 억지로 시설에 수용됐다가 정말 부랑아가 돼 거리에 던져졌다. 부랑아가 된 아동은 수용과 탈출을 반복하며 피난의 삶을 강제당했다. 부산이 무서워 고향을 떠났더니 또 다른 영화숙·재생원에 갇히게 된 이도 적지 않다. 발 내딛는 땅마다 ‘형제복지원들’이 자리했다. 손 씨는 “한 곳에서만 피해를 겪은 사람이 오히려 더 드물다”고 부연했다.

▮집단수용 디아스포라

서울시립아동보호소, 형제복지원 등 여러 집단수용시설에 수용돼 어린 시절을 빼앗긴 박경보 씨. 박세종 PD

집단수용은 가난한 아동을 피난길로 떠밀었다. 홀로 행보하는 낡은 옷차림의 어린이는 단속 사냥의 먹잇감이었다. 사람들 틈에, 눈길 닿지 않는 곳에 숨어야 했다. 단속이 삼엄한 곳엔 처음부터 발 들이지 않아야 했다. 디아스포라. 고향을 떠나 타지로, 타지로 옮겨가야 했다.

“옥천역에서 엄마를 찾겠다고 기차에 탔는데, 나이가 어리다 보니 서울 가는 상행선 대신 부산행 기차를 거꾸로 탔어요. 부산은 정말 가기 싫었던 데였어요. 대전시립아동보호소와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 형들에게 그 높은 악명을 익히 들었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부산역에 내린 뒤 대합실로 빠져나오는데 완장 찬 이상한 사람들이 저를 탑차에 태웠어요.”

박경보(60) 씨의 기억이다. ‘형들’은 박 씨보다 먼저 전국의 수용시설을 떠돌았던 사람들이다. 박 씨는 영화숙 대신 형제복지원(당시 형제원)으로 붙잡혀 갔다. 서울 태생인 그는 현재 형제복지원피해자협의회장으로 일한다. 그 역시 가정과 집이 있던 아이였으나 거리에서 혼자 운다는 이유만으로 파출소를 거쳐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내 유아용 공간인 13통에 수용됐다. 당시 쌀을 팔러 나간다던 아버지는 며칠이 지나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리웠던 박 씨는 친형과 함께 집을 나섰다. 박 씨는 당시 아버지 또한 ‘서울갱생원’이란 수용시설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친형과 함께 보호소에서 탈출해 무작정 기차를 타 천안으로 갔다. 기약 없는 수용, 자유 없는 생활에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러나 박 씨는 그곳에서 또 단속반에 걸린 뒤 여러 보육원이나 충남아동보호소 등에 수용됐다. 그러다 친형이 소리 소문 없이 다른 지역의 또 다른 시설로 전원됐다. 박 씨는 형을 찾고자 무작정 부산행 열차에 올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찾아 헤맨 형 또한 형제복지원에 갇힌 상태였다. 형제복지원을 빠져나온 뒤 박 씨는 서울 고향으로 돌아가 오랜 시간 가족을 수소문했다. 유년 시절 기억에 의존해 동네 곳곳을 돌았고,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가족 대부분과 재회했다. 그러나 어릴 적 헤어진 아버지의 행방은 여전히 알 길이 없다.

이처럼 1960년대는 ‘집단수용 디아스포라’의 시대였다. 이 시기부터 집단수용시설이 전국에 들어섰다. 수많은 아이가 가정과 친족이라는 공동체에서 강제로 뜯겨 나와 시설에 뿌려졌다. 6·25 이후 쏟아진 전쟁고아를 수용하기에 기존 보육원이나 고아원 등 소규모 시설로 부족하다는 국가 판단이었다. 시설과 수용 규모가 점차 대형화하면서 수많은 아동을 맡게 된 이들 시설은 군대식 통제라는 폭력·강제노역 등을 동원해 수용자를 억눌렀다. 아이들은 이 재앙과 같은 공간에서 탈주하며 끊임없이 거리를 배회했다. 시설이 무서워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태어난 고향을 등지고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가야 했다.

아동들이 진정으로 도망할 방법은 없었다. 어디에나 시설이 존재했다. 2021년 12월 한국방송통신대 산학협력단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의뢰로 수행한 ‘집단시설 인권침해 실태조사-수도권(서울·경기·인천) 및 강원권’에 따르면, 1962년 전국에는 23곳의 부랑아 집단수용시설이 운영됐다. 수용자는 4769명으로 파악됐다. 당시 전국 시·도는 10곳으로, 부산·대구·대전·광주·울산시가 직할시로 승격하기 이전이다. 10개 시·도 중 제주를 제외한 9곳에는 최소 1개의 집단수용시설이 자리했다. 대부분 지자체가 세운 공립 시설이었다. 부산에선 예외적으로 민간법인 재단법인 영화숙이 시의 공인을 받아 부랑아 시설을 위탁 운영했다.
1953년 부산 부산진구 부전역 주변의 기차와 아이들. 당시 기차역 부근에는 수많은 전쟁고아가 몰려들었다. 상당수 아동은 ‘부랑인 사냥’의 먹잇감이 됐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집단수용 ‘체계’를 조사하라

이들은 눈앞에서 치워버려야 할 쓰레기로 취급됐다. 이 무렵부터 국가는 부랑아 ‘일소’니 ‘일제 단속’과 같은 용어를 써가며 마구잡이로 아동을 수용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사회 안정과 치안을 내세웠던 군사 정부가 단속·수용 중심 부랑아 정책을 더욱 강화한 영향이다. 1964년에는 전국에서 단속된 부랑아의 수가 2만9652명에 달했다. 단속된 이들의 절반가량(1만4571명)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부산에서는 군사정부가 공식적으로 들어서기 전부터 이 같은 소탕 행위가 자행됐다. 일례로 부산시는 1961년 6월 시내 넝마주이(폐·휴지를 주워 되팔던 당대 빈민층)의 규모를 파악해 강제로 집단수용했다. 제복을 입히고 명찰을 달게 한 뒤 강제노역을 보냈다. 동래·구포 등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괴정동 도로 확장 공사에 투입했다. 관리는 ‘군대식’으로 이뤄졌다. 소대별로 넝마주이를 배치해 부대장의 통솔을 받게 하는 등 군법에 준하는 규율을 적용시켰다. 수용소를 무단으로 이탈하면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 무렵 이후 당대 전국 곳곳에 걸쳐 영화숙·재생원, 형제복지원에서와 같은 피해가 일어났다. 달리 말해, 악명 높았던 시설 한 곳을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것으로는 감춰진 피해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이름 모를 시설에 갇혔던 누군가는 평생 영욕의 기억으로만 혼자 냉가슴을 앓아야 한다. 사정이 이렇지만 이들의 피해를 파악 중인 진화위는 여전히 단위 시설을 중심으로 조사를 벌인다. 그 범위가 폭넓지도 못하다. 진화위에 따르면 현재까지 피해가 사실로 인정된 사건은 ▷형제복지원 사건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 ▷서산개척단 사건 ▷서울시 부랑아시설 사건 ▷서울동부여자기술원 등 여성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 총 5건에 그친다. 이외 9건의 집단수용시설 피해 사건이 조사 중인데, 직권조사(진화위가 피해자 직접 발굴해 조사)가 결정된 건 영화숙·재생원 사건뿐이다.

피해자 신고·면접 등을 기반으로 진행된 실태조사도 2021년 수도권 및 강원권 조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끝났다. 이외 지역의 실태조사는 예산 문제로 계획이 철회됐다. 게다가 실태조사든 사건조사든, 진화위의 활동 기간이 내년 5월로 종료되는 터라 현재로서는 추가적인 조사를 벌일 계기나 여력이 없다. 집단수용시설 피해생존자를 중심으로 진화위의 상설화와 같은 내용을 담은 특별법이 시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이 역시 구체화된 입법 행위로 나아가지는 못한 실정이다.

국가에 의해, 국가를 피해 피난민이 된 손 씨와 박 씨. 두 사람은 입을 모은다. 전국에 걸쳐 체계화된 이 ‘돌봄 감옥’에서 아이들은 끝없이 도망치고 붙잡혔다. 형제복지원들이 전국에 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형제복지원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저희들(영화숙·재생원 피해자)뿐만 아니라 선감학원이든 형제복지원이든 모든 시설에서 아동이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죄 없이 납치되다시피 끌려가 그곳에서 유년 시절의 행복이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교육을 박탈당했고 숱한 인권 침해 속에서 모든 걸 빼앗겼습니다. 그 결과로 모든 원생의 인생이 다 망가지다시피 했습니다. 모든 시설에서 같은 체계가 적용됐습니다. 이 지점에서 시설 간에 차이는 없습니다.”(손 씨)

“영화숙, 서울시립아동보호소 같은 시설에서 시작된 피해가 전국의 구조를 타고 확대된 겁니다. ‘형들’에 의해 폭력의 기술이 여러 시설로 퍼졌어요. 달리 말하면 그 시설들의 문제가 제때 잡혔다면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정점의 피해는 탄생하지 않았던 거죠. 멈춰 있는 집단수용시설 피해자 조사가 재개될 수 있도록 상설 기구가 만들어져야 합니다.”(박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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