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집단수용시설)에 거리로…난민 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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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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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80년대 집단수용 아동- 당시 탈출해도 고향 못 찾아
- 전국 떠돌며 다른 곳 재수용
- 강제노역·매질 고통 되풀이

“나는 절대로 국가를 용서할 수 없어요. 잘못도 없이 전국 집단수용시설을 ‘뺑뺑이’ 돈 게 유년 시절 기억 전부입니다. 어떤 시설이 더 가혹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특정 시설 한두 군데가 나빴던 게 아니에요. 어디든 삼청교육대에서나 상상할 일이 6~7세 아이에게 벌어졌어요. 거꾸로 매달고, 곡괭이로 매질하고, 노역시키고…. 제 삶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는데, 국가는 시설 몇 곳 조사하곤 이제 그만하려 해요. 나 같은 사람은 계속 고통의 늪에 빠져 있어야 합니까.”

홍성정(57·사진) 씨는 의지와 상관없이 들썩이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말을 이어 나갔다. 숨이 돌아올 때마다 홍 씨는 토해내듯 흉터로 남은 기억을 분출했다. 그의 삶은 폭력을 앞세운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살아졌다’. 물리적 폭력에서 벗어난 뒤로는 마음 깊숙이 자리한 흉터에 온 삶을 잠식당했다. 왜 내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 누적된 억울함이 화로 쌓이며 그의 호흡을 흔들었다. 살아서 숨 쉬는 일이 그에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국가가 남긴 흉터 탓이다.

서울 출생인 그는 예닐곱 살 무렵인 1970년대 어느 날 서울역에서 ‘밥 사주겠다’는 낯선 아줌마 손에 이끌려 남대문경찰서로 갔다. 가족과 함께 살았던 그는 별안간 가정으로부터 뜯겨 나와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수용됐다. 지독한 폭력과 가혹 행위를 이기지 못해 그곳에서 탈출했으나, 기억을 되짚어 집으로 찾아가기엔 너무 어렸다. 그렇게 홍 씨는 국가에 의해 거리로 내던져졌다.

그러나 길거리조차 국가폭력의 사정거리 바깥은 아니었다. 고향을 떠나 경기로, 부산으로 ‘피난’ 가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형제복지원 ▷영화숙 ▷소년의집 ▷선감학원 ▷서울갱생원 등에 10여 차례 수용됐다. 대부분 국가(지자체)가 운영하거나, 국가 권한을 위임받아 운영됐다. 부랑아 ‘소탕’을 명분으로 국가는 홍 씨와 같은 아이를 가뒀다. 6·25 전쟁 이후 쏟아진 전쟁고아, 넝마주이 등의 사회적 취약계층을 시설에 쓸어 담았다. 가난에 찌들어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을 재생, 갱생한다는 명분이었다.

실상은 달랐다. 갱생은커녕 인간의 겉과 속을 철저히 붕괴시켰다. 시설마다 강제노역과 매질, 굶주림, 그리고 죽음이 기다렸다.

흉터는 지금도 그의 삶을 할퀴고 찌른다. 좁은 곳에 오래 갇혔던 그는 폐소공포증에 시달린다. 2010년엔 섬유근통이라는 희귀병까지 진단받았다. 못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수반하는 병이다. 너무 많이 맞아 생긴 병이다.

홍 씨뿐 아니다. 집단수용시설 피해자의 다수의 삶은 ‘디아스포라’와 다름없다. 디아스포라는 ‘흩뿌려지다’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고향을 잃고 이주한 유대인의 삶을 가리킬 때 쓰인다. 근래에는 범주를 넓혀 강제로 난민 또는 이주민이 된 이들의 생을 두고도 디아스포라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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