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약해지는 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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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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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하마스 가자 전쟁, 개전 초 이스라엘 명분 확보
난민촌 공습·기아 위기 대두…비우호적 분위기 점점 확산
정치 외교 군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명분이다. 명분은 국가 집단 개인이 벌이는 행위 행동의 동기이자 목표다. 명분이 없다면 어떠한 행동이나 결정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는 세상에 차고 넘친다. 하다못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을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심지어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조폭 두목으로 출연한 하정우는 건달끼리 싸우는 데도 명분이 필요하다며 ‘명분’ 타령을 했다.

그렇다면 명분이 없다면? 역사에서 숱한 사례를 목격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과 베트남의 베트남 전쟁이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하지만 실제 전장에서 총을 들고 싸운 미국 청년들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명분 없는 전쟁에 끌려왔다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다. 미국 내에서도 반전 운동이 극렬하게 일어났다. 결국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했다.

이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보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가자 전쟁은 어떤가. 이 전쟁을 논하면서 이 지역의 오래된 역사를 굳이 꺼내고 싶지 않다. 복잡다단해진다. 단순화시켜 보자.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가 전격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하마스는 민간인을 중심으로 1200여 명을 죽이고 250여 명을 인질로 붙잡아 가자지구로 끌고 갔다.

이스라엘은 즉각 하마스 전면 해체를 내걸고 가자지구를 침공했다. 서방을 중심으로 세계는 하마스의 행위를 규탄했다. 하마스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고,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고 납치한 것도 하마스였다. 개전 초기 이스라엘은 충분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가자 전쟁 8개월째다. 최근 분위기가 묘하게 흐른다. 몇 개의 장면은 달라진 상황을 보여준다. 먼저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영장 청구다. 카림 칸 ICC 검사장은 지난달 20일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에 대해 2023년 10월 8일부터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형사적 책임이 있다며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고의적 및 전범 살인,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 공격 지시, 기아를 전쟁 수단으로 활용하는 등 ICC 조약인 로마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가자지구에서 숨진 사람은 3만6000명이 넘는다. 60% 이상이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민간인으로 알려졌다. 또 세계은행과 유엔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가자지구 전체 인구 230만 명의 75%가 피란했고 주민 절반 이상이 심각한 식량 위기 상태인 기근에 직면해 있다. 물론, ICC는 하마스 지도부 3명에 대해서도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또 하나. 최근 유럽연합(EU) 회원국인 노르웨이와 아일랜드, 스페인이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갑자기 웬 국가 인정?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두 국가 해법’을 위해서다.

그리고 대학생들의 전쟁 반대 시위다. 특히 미국 전역에서 격렬하게 벌어졌다. 경찰에 체포된 학생만 2200명에 이른다. 지난 4월 30일 뉴욕 컬럼비아대 해밀턴홀에 경찰이 진입해 점거 농성 중인 학생들을 체포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정확하게 56년 전인 1968년 4월 30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벌이던 학생들도 경찰에 체포됐다. 이로 인해 68혁명이 소환되기도 했다. 몇 개의 장면에서 서방을 중심으로 한 세계가 개전 초기처럼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명분이 약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심지어 이스라엘과 우방국 미국의 갈등도 노출됐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최남단 도시 라파에 대한 대규모 군사작전에 나서면 무기와 포탄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주요 7개국(G7) 등 13개국이 라파에 대한 전면적 군사 작전을 반대하는 서한을 이스라엘에 보냈다. 유엔 최고법원인 국제사법재판소(ICJ)도 이스라엘에 라파 공격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전 세계가 전쟁을 말리는 모습이지만 이스라엘은 멈출 기세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잔혹한 테러 조직 하마스를 뿌리뽑기 위해 싸운다고 한다. 그 명분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분명 타당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제외한 세계는 여러 모습을 통해 가자 전쟁에 대한 변화된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줬다. 이스라엘인들을 포함해 팔레스타인인들까지 너무 많은 무고한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최근 라파 난민촌에서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수십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비극적 실수’로 규정했다. 비극적 실수가 반복되면 명분을 잃는다.

김희국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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