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폭행 감금 업무상횡령 등 기소
1심 집유 5년→대법 벌금 30만 원
"10여년 간 사회사업 공로 참작"
연탄구입비 횡령과 폭행만 인정부산 최초의 공식 부랑인 시설 ‘영화숙·재생원’은 1971년을 계기로 폭행과 강제노역 등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의 비참한 실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곳에서의 실태를 파악하고 관련자를 엄벌에 처해 마땅한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당시 사법부는 이에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1971~1977년 ‘재단법인 영화숙’ 이순영 원장의 형사사건부·판결문을 입수해 살펴본 결과다.
▮실형 면해준 법원
이 원장은 1971년 4월 12일 소 알로이시오 신부에 의해 고발되면서 부산지검 수사를 받았다. 당시 소 신부는 영화숙·재생원 수용인들이 심하게 매질 당해 죽거나 다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돌본 영화숙 아이들의 비참한 상태나 증언이 근거였다. 마리아수녀회 이사장이었던 소 신부는 영화숙·재생원 인근에서 구호병원을 운영했다. 또 소 신부는 그 해 6월 16일부터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영화숙·재생원에서의 비인도적 행위를 멈추려 했다.
고발장 속 이 원장의 혐의는 폭행과 감금이었다. 여기에 수사 초기 검찰은 ▷아동복리법 위반 ▷업무상 횡령 ▷산림법 위반 ▷상해 ▷매장 및 묘지 등에 관한 법률 위반을 추가해 총 7가지 혐의를 적용했다. 이 원장은 그 해 6월 1일 한 차례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7일 만에 구속적부심사를 거쳐 석방됐다. 이후 검찰은 그 해 7월 31일 이 원장을 기소했다. 최종적으로 공판에 부쳐진 혐의는 폭행·감금·업무상 횡령·아동복리법 위반이었다.
1974년 6월 27일 열린 부산지법 1심 선고에서 정해진 이 원장의 형량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3만 원의 벌금형이었다. 재판부는 부산시가 영화숙·재생원에 지급한 생계비를 이 원장이 횡령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1970년 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영화숙·재생원 자립 사업으로 취득된 돼지고기가 마치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입해 얻어진 것처럼 허위 서류를 만들어 생계비 약 211만 원을 인출했다. 또 같은 기간 연탄을 실제 구매량보다 많이 사들인 것처럼 서류를 꾸며 차액 155만여 원을 자신이 가졌다. 두 사례를 합하면, 이 원장은 1년여 만에 총 366만 원을 횡령한 셈이다. 통계청 소비자물기자수 계산에 따르면 1971년 기준 지난해의 물가상승배수는 20배로, 그 당시 366만 원의 화폐가치는 지난해의 7469만 원 수준이다.
이 원장은 원생을 강제노역에 동원하는 한편 매 식사를 부실하게 제공하기도 했다. 그는 1969년 4월부터 1971년 4월까지 영화숙·재생원의 18세 미만 아동으로 작업반을 편성해 신평동 갈대밭 매립에 동원했다. 또 보리밥과 옥수수 죽 등 기준 이하의 영양분과 용량을 가진 식단으로 끼니를 해결하게 했다. 여기에 옴과 같은 피부병으로 원생들을 신음하게 했다. 소 신부와 싸움을 벌이며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피고인은 10여 년간이나 사회사업에 몸을 담아오면서 그 방면에 많은 공로가 있었던 점 등 그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다”며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택했다.
▮“학대 지시했단 증거 없어”
1977년 7월 13일 항소심을 맡은 대구고법 재판부는 아예 이 원장의 혐의 대부분을 무죄로 판결했다. 먼저 2심 재판부는 이 원장이 취득한 돼지고기는 자립 사업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축사에서 구해진 것이라고 봤다. 즉, 비록 이 원장 소유의 돼지농장에서 얻은 것이라도 ‘재단법인 영화숙’이 아닌 다른 법인으로부터 돼지고기를 구매한 만큼 횡령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2심 재판부는 아동복리법 위반 또한 혐의가 없다고 판시했다. 이곳 원생들이 같은 원생들로부터 구타를 당하거나 매립 작업에 동원된 사실은 인정되지만, 이 원장이 이 같은 일을 지시했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관리·감독권이 그에게 있었더라도 학대 등을 그가 직접 시켰다는 사실을 증명할 자료는 확보되지 않았다는 거다. 또한 재판부는 원생에게 제공된 부실한 식사는 부산시 등의 지원이 부족했던 탓이며, 피부병 또한 시설 수용 전부터 옴 등을 앓은 원생이 다른 원생에게 퍼뜨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봤다. 결국 2심 재판부는 연탄 구입비 횡령과 소 신부 폭행만을 유죄로 보고 그의 형량을 벌금 30만 원으로 대폭 줄였다. 대법원 또한 1977년 11월 22일 항소심 판단에 잘못이 없다고 판단, 이 원장의 형을 확정지었다.
이 원장은 대법원 선고 4년 뒤인 1981년 1월 암으로 숨졌다. 그가 운영한 돼지농장 등 자산은 그의 자녀들에게 상속됐다. 당시 이 원장의 개인사업체 일부는 오늘날에도 운영되고 있다. 이 원장의 사건과 관계된 변호인 등도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남아 있는 이들 또한 당시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이 원장 사건의 주임검사로서 그를 직접 수사했던 A(83) 씨는 “초임 검사 시절 일이라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런 시설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