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랑인 시설 인권유린 증언] <2>11살때 강제수용된 박상종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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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2.11.28. 오후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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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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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아닌데 돌게 잡다 끌려가…17년째 우울증 약으로 버텨- 조부모 사랑받던 부잣집 손자
- 윗도리 머리에 씌워선 납치해
- 손에 피 마를 날 없이 노역 시켜
- 방망이에 맞은 상처 아직 남아
- 탈출하다 잡혀 죽은 애도 있어

- 둘째 고모가 수소문해 찾아와
- 재생원서 2년 반 만에 벗어나
- 인간 이하 삶, 평생 트라우마로

박상종(65) 씨는 17년째 우울증 약을 먹는다. 11살 무렵이던 1967년 부산 최대 부랑인 시설 ‘영화숙·재생원’에 강제로 수용됐을 때의 기억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머릿속을 헤집는다. 2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세상은 너무나 버거웠다. 제때 교육받지 못한 서러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시기를 인간 이하로 살았다는 괴로움이 그를 고장나게 했다.
부산 사하구 장림동에 있었던 재생원과 영화숙. 왼쪽 사진이 재생원으로, 오른쪽 사진의 앞부분이 영화숙으로 추정된다. 출처=사진으로 본 마리아수녀회 40년사

■부잣집 아들 돌게 잡다 날벼락

박 씨의 집은 부유했다. 그의 조부모는 서구 동대신동에서 목욕탕을 운영했다. 장사가 잘된 덕에 부족할 게 없었다. 박 씨의 도시락엔 늘 쌀밥이 담겼다. 계란 프라이며 고기 등 당시로선 귀한 반찬도 원 없이 먹었다. 텔레비전이나 피아노 같은 당대 부의 상징과 같은 물건 역시 집안에 들여져 있었다. 어린 시절 이혼해 떨어져 산 부모님의 빈자리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으로 충분히 채워졌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었다.

고아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재생원에 2년 반을 갇혀 지냈다. 납치였다.

“국민학교 4학년 때 할머니가 구포역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치셨다. 온몸이 다 부서져 병원에 누워 계셨다. 하루는 고모가 (사하구) 신평동 갈대밭에 가서 돌게를 잡아 오라고 했다. 돌게를 갈아 먹으면 뼈가 잘 붓는다고 했다”고 한다. 그 길로 박 씨는 사촌 동생 2명과 신평동으로 향했다. 외할아버지 소유의 밭이 신평동에 있었다.

갈대를 헤집으며 돌게를 잡던 중 사촌 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님, 도망가자!” 박 씨는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당시에는 동생들이 뭐라고 말한 건지도 제대로 못 들었다. 때마침 영화숙·재생원 아이들이 관리자들과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동생들이 그들을 보고 부리나케 줄행랑친 거였다. 반장 한 사람이 나를 딱 잡더니 ‘너 여기서 뭐 하냐’고 물었다. 하필 그때 입고간 옷도 행색이 좋지 못했다”고 그는 전했다.

여긴 외할아버지 밭이라고, 집은 동대신동에 있으며 목욕탕을 운영한다고, 전화번호를 불러줄 테니 확인해보라고, 나는 고아가 아니라고 그는 고함쳤다. 소용없었다. 장정 셋이 그에게 달라붙어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박 씨의 윗도리를 들어 올려 머리에 씌워버렸다. “고함을 못 지르게 그런 식으로 입을 막더라고. 그 사람들에게 붙잡혀 곧장 재생원으로 끌려갔어요. 아무리 항변해도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

■고문 그 자체였던 재생원 생활

1960년대 부산 최대 부랑인 시설 ‘영화숙·재생원’에 강제 수용됐던 박상종 씨.

입소 직후 박 씨는 노역에 시달렸다. 시설 근처의 밭에서 온종일 옥수수나 고구마, 배추 등을 캐야 했다. 처음 겪는 낯선 일이라 다치는 일도 잦았다. 하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날엔 사정없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시설의 건물을 짓는 일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는 “소대장이 ‘오늘은 고구마를 150평만큼 캐라’, 이런 식으로 지시했다.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우리가 누구 밭에서 일하는 건지도, 밭에서 난 작물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일했다”고 말했다.

당시 영화숙과 재생원에 수용된 원생 1200여 명의 노동력은 이순영 원장의 개인 재산 축적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 1월 영화숙·재생원 이순영 원장 등은 12년간 국고보조금과 민간단체의 구호 물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수사를 받았다. 이렇게 빼돌린 돈으로 이 원장은 장림동 일대 2만여 평의 대지와 6500여 평의 임야를 사들여 자기 명의로 등기했다. 시설 주변의 땅 상당 부분이 이 원장 소유의 개인 토지였던 셈이다.

소대(시설 내 수용실) 생활은 그 자체로 고문이었다. 나무 바닥 틈새마다 빈대가 끼어 득실댔다. 그는 온몸에 빈대가 들러붙어 피를 빨아대는 통에 가려움을 참기 어려웠다. 피곤했지만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밤 9시 취침 점호를 받을 때면 반장들이 ‘원산폭격’을 시킨 뒤 발로 차 볼링 핀처럼 넘어뜨렸다. “그 재미로 살았던 사람들”이라며 박 씨는 이를 갈았다. 관리자인 소대장은 어른이, 그들의 수발을 드는 반장은 박 씨 또래가 맡았다.

소대장들은 참나무로 만든 방망이에 광을 내고 다녔다. 말을 안 듣거나 굼뜨면 어김없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박 씨 머리엔 그때 맞아 생긴 상처가 아직 남아있다. 마리아수녀원에서 파견 나온 수녀들이 그를 치료해줬다고 한다.

탈출을 감행하기엔 담력이 부족했다. 담장에는 가시철조망이 둘렸고, 경비가 수시로 주변을 살폈다. 잡히는 날엔 정말로 죽을지 몰랐다. “도망 가다가 잡힌 애도 많아요. 한 명은 실제로 잡혀 와서 맞아 죽었어요. 가마니에 둘둘 말아 묻어줬죠. 병이 들어도 치료를 못 받아 죽은 사람, 특히 결핵으로 죽은 사람도 정말 많았습니다.”

■“내 인생 재생원에서 끝난 거예요”

박 씨는 수소문 끝에 자신의 소재를 알아낸 둘째 고모 덕에 재생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엔 고모가 날 못 알아봤다. 울면서 ‘고모야’ 하고 부르니 그제야 ‘찬호(어릴 적 이름) 맞네, 얼굴이 너무 변했다’며 같이 울었다. 사촌 동생들에겐 왜 내가 잡혀갔단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겁이 나서 못 했다고 하더라. 아직 국민학생 나이도 안됐을 때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고 했다.

11살에 납치돼 14살에 다시 바깥으로 나온 그는 친구들이 중학교에 다닐 때 그는 국민학교 5학년 수업을 들어야 했다. 도저히 연필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박 씨는 중학교 1학년 말 무렵 학교를 그만둔 뒤 조부모를 도와 목욕탕 보일러공으로 일하거나 소작농을 했다. 교육받아야 할 시기를 재생원에서 허비했다는 사실이 그는 지금도 한스럽다.

안타깝게도 재생원이 그의 삶을 짓밟았다는 사실을 증명할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영화숙·재생원은 1970년대 폐쇄돼 기록 대부분이 사라졌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조사를 의뢰했지만,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어 스스로 철회했다. 그저 그곳에서 일찍 빠져나오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도망갈 생각을 못 했을까? 내 인생은 거기서 끝난 거예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릿속이 멍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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