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행정수도 '족보' 거스르는 영호남식 사법기관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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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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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헌법재판소 소재지 논란
대구·광주, 지난달 법 개정안 발의
유력 정치인 역대 주장 정면 배치
세종, 2004년부터 대상 기관 확정
대법원은 2004년 6월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가 발표한 신행정수도(현재의 세종시) 이전 대상 기관에 포함됐다. 사진은 현재의 서울 서초구의 대법원 청사. 사진=대법원 자료
"뜬금없이 뭔 이야기입니까?"

최근 일부 국회의원들이 대법원을 대구광역시로, 헌법재판소를 광주광역시로 옮기는 법안을 발의한 데 대한 반응이다. 왜 이런 법안이 나왔고, 이전 대상지가 대구와 광주냐는 것이다. 특히 충청권의 반응은 냉소에 가깝다. 수십년 동안 그래온 것처럼 영남과 호남이 충청권 세종시를 제쳐두고 사법기관을 하나씩 나눠 갖자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대법원을 대구로 이전하는 법원조직법 개정법률안은 지난 6월 26일 민주당 김용민의원이 대표발의했다. 제안이유에 대해 서울의 과밀화 해소하고, 국토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사법기관도 지방으로 이전해야 하며, 사법기관이 헌법상 중립을 지키려면 정치권력으로부터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을 대구에 두는 이유로 대구가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고, 4.19혁명을 시작했던 역사적 의의가 깊은 도시라고 주장했다.

□ 짜고 치듯 동시에 법 개정안 발의, 함께 환영성명도

광주에 헌재를 두는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은 민주당 민형배의원이 대표발의했다. 제안이유는 대법원 이전안과 비슷하다. 수도권 과밀 해소와 국가 균형발전 차원에서 헌재의 지방 이전이 필요하고, 정치적 중립을 위해 행정 권력의 중심과 물리적 거리를 둬야 한다고 밝혔다. 광주에 두는 이유로 광주는 일제강점기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5.18 민주화운동은 1987년 헌법 체제를 탄생케 한 밑거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법원조직법 개정안은 대법원 소재지를 서울특별시가 아닌 대구광역시로 바꿨다.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은 기존에는 특별하게 소재지를 정하지 않았던 것을 고쳐 소재지를 광주광역시로 명기했다.

대법원과 헌재의 소재지를 옮기는 법률 개정안 발의는 지난달 26일 같은 날짜에 이뤄졌다. 대표발의자는 모두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다.

이처럼 대법원과 헌재의 이전 법안이 발의되자 대구와 광주의 법조계도 화답하고 나섰다. 7월 2일 대구와 광주지방변호사회가 대법원 대구 이전, 헌재 광주 이전을 환영한다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대구·경북 및 광주·전남의 1000만 시도민과 함께 법안 발의를 적극 환영한다."며 "여야 의원들의 협력과 상생의 정치를 통해 이번 법안이 조속히 통과되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정부세종청사는 현재 국무총리실 등 22개의 중앙행정기관과 조세심판원 등 16개 소속기관이 입주해 있으며, 입법(국회) 및 사법부까지 이전, 정치·행정수도를 지향하고 있다. 대전일보DB
□ 2004년 세종시 이전 대상 기관으로 확정 발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이전은 애초부터 족보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신행정수도로 옮겨야 할 기관에 포함됐던 것이다. 2004년 6월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는 74개 중앙행정기관, 11개 헌법기관 등 총 85개를 이전 대상 기관으로 확정, 발표했다.

이중에서 헌법기관 11개가 국회와 국회사무처, 국회도서관, 대법원, 법원행정처, 헌법재판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이다. 대법원과 헌재가 신행정수도에 오기로 했던 것이다. 행정부에 속하는 대검찰청과 경찰청, 국세청도 이전 대상으로 분류됐다.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지고 그 대안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가 추진되면서 당초 세종시로 이전하려던 기관들을 타지역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대법원과 헌재를 세종시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는 주장은 2021년 7월 등장했다. 민주당 소장파 모임인 '처럼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대법원을 대구로, 헌법재판소는 광주로 이전하는 내용으로 법원조직법 및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을 발의한 것이다.

이들이 대법원과 헌재, 대검찰청까지 지방 이전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수도권 과밀해소 외에도 사법부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서울 서초동에 몰려있는 대법원과 대검찰청을 지방으로 옮겨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밀착하여 사법체계를 왜곡하는 소위 '법조 카르텔'을 해체하자는 것이다.

20대 대통령선거와 22대 총선에서 대법원과 헌재의 '지방'이전 공약이 등장했다.

21년 7월 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대구에 대법원, 광주로 헌법재판소를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22년 2월 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는 서울 서초동의 대법원과 대검찰청을 지방으로 이전하고, 이곳에 청년 디지털타운을 짓겠다고 공약했다. 24년 4월초 조국혁신당도 총선을 앞두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대검찰청 등을 지방으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선거를 앞두고 '세종시'가 아닌 다른 곳이 이전 대상지로 가시화된 것이다.

대전일보DB
□ 역대 유력 정치인 대다수 세종행 주장

이러한 흐름은 기존의 다수 정치인의 주장과 사뭇 배치된다.

김두관 전 민주당 의원은 21년 5월 수도권 정부 기관과 국회 전체, 청와대도 다음 대통령 임기 중에 세종시로 옮겨야 한다며 법조신도시를 만들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추미애 의원도 21년 7월 세종시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가균형발전 4.0 시대를 제안하고 청와대와 대법원, 법무부의 세종시 이전을 주장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도 21년 8월 대선주자로서 청와대, 국회, 대법원, 법무부와 대검찰청을 충청신수도권으로 이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앞서 2017년 1월 당시 대선주자로 손꼽혔던 민주당 안희정 충남지사와 바른정당 남경필 경기지사는 소속정당은 다르지만 "국회와 청와대, 대법원과 대검 등을 세종시로 완전 이전하는 것이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여야 유력 정치인이 대법원과 헌재, 대검찰청 등의 세종시 이전안을 제시하고 다수 국민들이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상황에서 2021년부터 대법원은 대구, 헌재는 광주 이전론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우리가 모델로 삼은 미국의 경우 경제·문화수도는 뉴욕이지만 연방대법원(헌법재판소 기능도 수행)은 정치·행정수도인 워싱턴에 두고 있다. 영국도 대법원을 런던에, 프랑스도 대법원 역할을 하는 파기원(Cour de cassation)을 파리에 뒀다. 독일 등 사법 선진국들이 지방에 대법원과 헌재를 분산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미국의 대법원이 의회 및 행정부처가 위치한 워싱턴에 함께 있기 때문에 정치권력과 사법권력 사이에 권력분립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물리적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 기관 구성원의 인식과 태도, 제도의 운영에 달렸다.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소재한 헌법재판소는 법률의 위헌 여부, 탄핵, 정당의 해산 등을 심판하는 헌법기관이다. 김재근 선임기자
□ 뜬금없는 영남 호남 배치론, 갈등의 씨앗 될것

대법원과 헌재가 세종시로 이전할 명분은 차고도 넘친다. 2004년 이미 신행정수도 이전기관으로 분류됐고, 국민들 다수가 그렇게 여기고 있다. 세종시는 국토의 중심부로 전국 어디서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더구나 2021년 7월 세종시 아름동에 대법원 제2등기전산정보센터(등기정보센터)가 들어섰다.

대법원을 대구, 헌재를 광주로 이전하자는 것은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될 뿐이다. 과거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결정을 싸고 엄청난 국론 분열을 겪은 바 있다. 당시 진보와 보수, 수도권과 지방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다면, 이번에는 영남과 호남 대 충청권 갈등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작금 영남당과 호남당이 나라의 정치, 행정, 예산권력을 전횡하면서 충청권의 소외감이 날로 커지고 있다. 정치권이 표에 급급해 대법원과 헌재의 소재지를 바꾸면 충청권의 엄청난 반발과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긁어 부스럼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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