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시선] 민신(民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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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행스님 오대산 월정사 선덕·조계종 원로 의원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다. 의회민주주의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은 수백 년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이 의사당 오른쪽과 왼쪽에 서로 나뉘어 앉아서 허구한 날 다투다 보니 우파, 좌파란 말까지 생겨났다.

프랑스도 공화정 탄생 이후 다양한 정파가 등장해 수도 없이 싸웠다. 올해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도 지금 건곤일척의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그런 정쟁으로 치면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다. 아니, 민주주의 후발주자로서 가끔 세계 언론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 모두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다툼이 최근 도를 넘은 것 같아 몹시 우려스럽다. 오대산 빈승(貧僧)의 귀에까지 들려올 정도면 임계점을 넘었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는 혼란 그 자체다. 2년 차를 막 넘어선 윤석열 정부의 국정 지지도는 연일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고, 192석의 거대 야권은 모든 세력을 총동원해 정부에 대한 강경책을 쏟아붓고 있다. 거기에 더해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는 목불인견이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막장 드라마를 선보이는 중이다.

대한민국 앞에 놓인 수많은 난제는 풀릴 길이 없고, 백성은 민생 문제로 허덕이고 있는 판국에 나라를 이끌어야 할 정치권의 이런 모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화가 난 국민이 채널을 돌리는 바람에 방송사의 뉴스 프로그램 시청률이 뚝 떨어졌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가 특히 정쟁이 심한 것은 신뢰가 없어서다. 신뢰가 없는 건 자기의 주장만이 지고지선(至高至善)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니 상대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이거나 위선이거나 조작으로 들린다. 그 불신이 갈수록 커지다 보니 목소리는 높아지고, 험한 욕설이 튀어나오고, 고소 고발이 난무한다. '내로남불'이라는 말도 이에 바탕을 둔 것이다.

공자(公子)는 '족식 족병 민신지의(足食 足兵 民信之矣)'라고 했다. 양식을 풍족히 하고, 군사를 풍족히 하고, 백성이 믿게 해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경제 문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국방 문제, 그리고 국민과 정부, 나아가 정치 세력 전체의 신뢰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했다. 국민이 지도자를 믿지 못하고, 지도자가 국민을 믿지 못하고, 정치인끼리 서로 믿지 못하면 남는 것은 공멸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의 후손이다. 당연히 정치지도자도 그 후손이다. 언행 하나하나 품격과 자부심을 지키고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심을 읽어야 한다. 눈앞에 놓인 정치적 이해득실에 빠져 국민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면 결국 정치 권태감, 정치 혐오감만 더할 뿐이다.

오대산 조실이셨던 탄허 스님도 항상 강조하셨던 게 민의(民意)였다. 국민의 마음을 읽고 그 뜻을 따르고 이를 통해 상호 간에 신뢰를 쌓지 못하면 그 정치는 낙제점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대한민국호는 거대한 풍랑 앞에 직면해 있다. 얼마 전 공개된 OECD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장기적으로 소멸할 가능성이 큰 국가라고 지적했다. 재난이 오기 전에는 반드시 징조가 있다. 이를 국민 모두 느끼고 있다. 정치권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민주주의 #대한민국 #오대산 #지도자 #의회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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