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판 변수로 떠오른 '집중투표제'…경영권 분쟁 장기화 가능성도
고려아연 경영권을 놓고 벌어진 영풍그룹 최씨·장씨 집안의 분쟁이 종막을 향하고 있다. '운명의 날'은 고려아연 임시주주총회가 열리는 2025년 1월23일이다. 이날 표 대결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든 지난 75년간 이어진 영풍가(家)의 동업 관계는 결국 끊어질 전망이다. 75년 신뢰를 무너뜨린 경영권 분쟁이 벌어진 까닭과 그 배경에 숨겨진 일화, 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장면과 현재 진행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봤다.
영풍그룹의 모태는 1949년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공동으로 설립한 영풍기업사다. 이후 두 집안은 75년 동안 영풍그룹을 공동 경영했다. 장씨와 최씨 일가가 전자·비철금속 부문과 아연제련·정련 및 합금 제조 부문을 각각 담당하는 식이었다. 그룹 전체 매출의 70%를 차지하는 고려아연은 장씨 일가가 더 많은 지분을 소유하고 최씨 일가가 경영하는 구조였다.
'한 지붕 두 가족' 체제는 최윤범 회장이 고려아연 회장에 취임한 2019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풍그룹 내부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최 회장은 장형진 영풍 고문과 몇 차례 인사만 나눈 뒤 왕래를 끊었다. 여기에 2022년 최창걸 명예회장이 코마(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면서 두 집안의 소통 창구는 사실상 사라졌다. 지금도 두 집안을 연결하는 메신저나 중재자는 부재한 상황이다.
세대 거치며 무너진 '75년의 신뢰'
영풍 측의 주장에 따르면, 포문은 표면적으로 최 회장이 먼저 열었다. 고려아연은 2022년 8월 한화그룹 미국 계열사인 한화H2에너지USA를 대상으로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단행해 우호세력을 확보했다. 당시 한화H2에너지USA는 4717억원을 투자해 고려아연 지분 5%를 취득했다. 최 회장과 미국에서 동문수학한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이 힘을 보탠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에는 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가 공동 설립한 해외법인 HMG글로벌에 5272억원 규모의 신주(5%)를 발행하기도 했다.
최 회장은 우군 확보에 고려아연 자사주(6.02%)를 활용하기도 했다. 고려아연은 자사주 1.2%를 한화그룹 지주사인 한화 자사주 7.3%와 교환했다. LG화학에도 자사주 1.97%를 넘기고 이 회사 자사주 0.47%를 받았다. 또 글로벌 원자재 트레이딩 기업 트라피규라(1.5%)와 한국투자증권(0.8%), 모건스탠리(0.5%) 등에 자사주를 매각하기도 했다. 자사주가 타사로 넘어가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는 점을 이용해 다수의 기업을 우군으로 끌어들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 고문은 적극적인 대응을 자제했다. 어릴 때부터 봐온 아들뻘인 최 회장과 각을 세우는 모습이 외부에 노출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1946년생인 장 고문은 2024년 기준으로 78세다. 1975년생인 최 회장(49세)과 29세 차이다. 또 지분율 차이로 최 회장이 사용할 카드가 많지 않다고도 판단했다. 분쟁 초기 장 고문과 영풍 등 장씨 집안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31.02%로, 최씨 일가(15.35%)의 두 배에 가까웠다.
장 고문이 본격적인 대응을 고려한 시점은 2024년 3월 주주총회 시즌에 들어서서다. 이때를 기점으로 최 회장과 고려아연의 압박이 거세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실제 고려아연은 3월 영풍 비철금속 물류를 담당해온 서린상사 이사회를 장악하고, 4월에는 영풍에 황산 취급대행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영풍에는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최 회장 측의 입장은 다르다. 최 회장 측에 따르면, 두 집안의 갈등이 본격화한 시점은 2022년 8월이다. 당시 낙동강 환경 오염 등으로 비판을 받던 영풍이 고려아연에 제련 잔재물을 떠넘기려 하는 등 압박을 지속했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황산 취급과 관련해 자체 해결 방안을 영풍에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최씨 집안이 설립한 서린상사 경영권을 되찾은 배경도 동업 관계에 균열이 갔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 회장 측은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자사주 교환 역시 경영권 분쟁을 염두에 둔 우군 확보 작업이 아니었다는 입장이다. 트로이카 드라이브라는 신사업을 진행하면서 각 기업과의 협력 강화를 위한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한화와는 재생에너지 및 수소 관련 사업 그리고 LG화학과는 전구체 및 배터리 소재 사업의 파트너십을 진행하고 있다"며 "현대차와도 유상증자 과정에서 니켈 제련 등과 관련한 파트너십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본격적인 '쩐의 전쟁', 그리고 역풍
2024년 8월 고려아연의 4000억원 규모 자사주 매입 발표는 장 고문이 경영권 분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최 회장이 고려아연 자사주를 다른 기업 자사주와 맞교환하는 등의 방식으로 우군 확보에 나서게 되면 장 고문의 입지가 크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장 고문은 2024년 9월 극비리에 MBK파트너스와 접촉, 협업을 결정했다.
이후 영풍·MBK와 최 회장의 경영권 분쟁은 본격화했다. 우선 장내에서 치열한 지분 확보 경쟁이 벌어졌다. 영풍·MBK는 9월13일 주당 66만원에 공개매수를 시작했고, 9월26일에는 공개매수가를 75만원으로 상향했다. 고려아연도 10월2일 주당 83만원에 자사주 공개매수를 선언하며 대응에 나섰다. 여기에 맞서 영풍·MBK도 공개매수가를 83만원으로 올렸다.
공개매수가 과열 양상을 보이자 금융감독원은 불공정거래 조사에 착수했다. MBK·영풍은 그 즉시 공개매수가 추가 인상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려아연은 10월11일 89만원으로 다시 한번 공개매수가를 올리며 승부수를 던졌다. 약 한 달간 계속된 MBK·영풍과 고려아연의 공개매수는 각각 10월14일과 10월23일 종료됐다.
이렇게 양측 '쩐의 전쟁'은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10월30일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발표로 시장은 다시 요동쳤다. 당시 고려아연은 자사주를 소각한 뒤 전체 발행주식의 20%에 해당하는 보통주 373만2650주를 주당 67만원에 일반 공모 형태로 신규 발행하겠다고 밝혔다. 유상증자를 통해 조달하는 2조5000억원 중 2조3000억원을 차입금 상환에 사용하겠다는 계획도 내놨다.
후폭풍은 거셌다. 유상증자 발표 당일 고려아연 주가는 하한가로 직행했다. 전 거래일 대비 46만2000원(29.94%) 하락한 108만1000원에 장을 마쳤다. 대규모 유상증자로 기존 주주의 지분 가치가 크게 희석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시장에서는 경영권 분쟁을 위해 차입한 자금을 주주가 대신 갚는다는 비판도 나왔다.
유상증자 발표는 금감원 조사로도 이어졌다. 만일 고려아연이 자사주 매입을 통한 공개매수와 소각, 유상증자 등의 과정을 사전에 계획해 실행에 옮겼다면 부정거래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시장의 비판과 당국의 압박이 거세지자 고려아연은 11월13일 유증 계획을 철회했다.
"우군을 확보하라"…치열했던 공중전
장외 여론전도 치열했다. 표 대결에 대비한 명분 쌓기 작업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영풍·MBK는 최 회장이 '트로이카 드라이브'라는 신사업 전략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투자를 단행해 고려아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고 주장한다. 최 회장이 주도한 투자처 38곳 중 30여 곳에서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폐전자제품 재활용업체 이그니오홀딩스 인수가 대표적인 사례다. 고려아연은 2022년 최 회장 주도로 이그니오홀딩스 지분 100%를 5819억원에 인수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이그니오홀딩스가 공시한 재무제표에는 자본금과 자본총계가 각각 1100만원과 –18억원,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이 각각 28억원과 –47억원으로 기재됐다.
원아시아파트너스에 대한 투자도 석연치 않다고 지적했다. 고려아연은 최 회장의 중학교 동창인 지창배 회장이 설립한 원아시아파트너스에 약 5600억원을 투자했다. 원아시아파트너스 전체 운용자금의 80~9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영풍·MBK는 2024년 6월말 현재 고려아연이 전체 투자금의 24.8%에 해당하는 1378억원의 손실을 기록 중인 것으로 추산했다.
특히 고려아연이 99%를 출자한 원아시아파트너스의 '하바나1호' 펀드는 카카오와 하이브의 SM엔터테인먼트 인수 경쟁 과정에서 벌어진 시세조종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원아시아파트너스는 하이브의 공개매수를 방해하기 위해 카카오와 공모, SM엔터테인먼트 주식을 고가에 대거 매입해 주가를 끌어올린 혐의를 받는다. 이 일로 지창배 회장은 기소돼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영풍은 일련의 투자에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다. 신사업 투자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경영권 분쟁을 염두에 둔 우군 확보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장 고문 측은 이그니오홀딩스 인수, 원아시아파트너스에 대한 투자 결정 등과 관련해 최 회장과 노진수 전 고려아연 대표이사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검찰 고소한 상태다.
최 회장 측의 입장은 다르다. 이그니오홀딩스 인수는 고려아연이 미래 사업으로 낙점한 '친환경 동' 생산을 위한 투자였다고 반박한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이그니오홀딩스는 유럽에서 공장을 운영하며 자원순환 사업에 대한 노하우를 쌓았다"며 "특히 저품위 전자폐기물에서 구리정광을 추출하는 독보적이고 검증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그니오홀딩스의 적자도 자원순환 밸류체인이 미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올해(2024년) 상반기에도 폐기물 원료 트레이딩 업체인 캐터맨을 인수하는 등 이그니오홀딩스를 중심으로 한 밸류체인을 구축하면서 손실 규모가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며 "순차적으로 밸류체인을 완성해 자원순환 사업의 수익성과 성장성을 도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원아시아파트너스에 대한 투자도 경영권 분쟁과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사내 유보금을 활용한 수익 창출 목적의 투자였으며, 영풍·MBK가 산정한 손실 규모도 과다하다고 말한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고려아연이 투자한 원아시아파트너스 펀드 8개 중 일부는 수익을 내는 중이고 일부 펀드는 청산을 통해 투자금을 회수해 손실 규모를 크게 줄였다"며 "현재 파악하고 있는 손실 규모는 700억~800억원 수준"이라고 말했다.
고려아연은 또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 의혹이 자사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하바나1호'가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에 연루돼 관련자들이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려아연은 이와 전혀 무관하다"며 "현재 문제가 된 하바나1호를 원아시아파트너스와 협의해 청산 절차를 밟았다"고 전했다.
경영권 분쟁 '키맨'은 국민연금
재계에서는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25년 1월23일로 예정된 임시주총에서 그 향배가 결정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영풍·MBK는 주총 안건으로 이사 14명 추가 선임과 집행임원제도 도입을 위한 정관 변경 등을 제시한 상태다. 현재 고려아연 이사회는 최 회장 측 12명과 영풍·MBK 측 1명으로 구성돼 있다. 주총에서 영풍·MBK의 안건이 가결될 경우 영풍·MBK는 고려아연 이사회를 장악,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12월20일 주주명부 폐쇄 직전까지 양측은 의결권 지분 확보를 위한 '막판 스퍼트'를 벌였다.
이에 대해 고려아연 측은 집중투표제를 막판 카드로 꺼내들었다. 집중투표제는 이사를 선임할 때 한 주당 선임하고자 하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전체 이사 수를 19명으로 제한하는 동시에 이 제도가 도입되면 단기간에 MBK·영풍이 이사회 과반을 장악하기 힘들어진다. MBK·영풍이 반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의 승패는 어떻게 결말이 날까. 일단 현재 고려아연 지분율은 영풍·MBK가 앞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MBK·영풍 연합은 공개매수로 고려아연 지분 38.47%(796만4417주)를 확보한 뒤 2024년 9월부터 최근까지 장내 매수 등을 통해 고려아연 지분을 추가로 매입, 지분율을 40.97%까지 끌어올렸다.
반면 최 회장의 지분율은 17.18%로, MBK·영풍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호세력 지분을 모두 더해도 34% 전후에 불과하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영풍·MBK에 6%포인트 이상 뒤처지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집중투표제 도입 안건 투표에선 최 회장 측이 유리할 수도 있다. 상법에 따라 집중투표제 안건 투표 시 3%를 초과하는 지분을 가진 주주는 초과분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측의 지분 경쟁 승패는 기관투자가와 소액주주의 판단에 달렸다. 2024년 9월말 기준 고려아연 지분 7.48%를 보유한 대주주이기 때문이다. 만일 국민연금이 최 회장 편에 서게 되면 그는 영풍·MBK와의 표 대결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경영권 분쟁 중인 한미사이언스 때처럼 중립을 지킬 경우 지분율이 높은 영풍·MBK와의 표 차이는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