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기소 전까지 '수미 테리' 경고했었다"…국정원의 안일함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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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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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첩보활동 참담" "미국, 대선 앞둔 경고" 해석 분분...국정원은 내부 감사 착수

지난 5월 제주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주포럼에서 인터뷰 중인 수미 테리 미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 자료사진. ⓒ연합뉴스


수미 테리 미국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미 법무부에 신고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한 혐의와 관련해, 미 정부가 과거부터 우리 측에 여러 차례 경고를 보낸 것으로 파악됐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가 이런 활동을 중단하지 않자 미국이 오는 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테리 연구원을 기소했다는 것이다. 국가정보원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내부 감사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소장서 낱낱이 드러난 활동..."참담" VS "통상적 일"

31쪽 분량의 미 검찰 공소장을 보면, 테리 연구원은 지난 2013년부터 10년 동안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된 국가정보원 요원과 만나 '협력자'로 활동했다. 그는 국정원 요원에게 비공개 정보를 건네고 한·미 정부 관계자들 간의 모임을 주선했다. 우리 정부의 정책 방향을 뒷받침하는 기고문도 수 차례 올렸다.

미 수사 당국은 테리 연구원의 이런 행위가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미국은 이에 근거해 외국 정부나 정당 등의 정책과 이익을 대변하거나 홍보하려면 미 법무부에 등록하도록 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도 보고 대상이다. 그런데 테리 연구원이 이런 규정을 알고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법과 국정원 사정에 정통한 복수의 전문가들은 이와 관련해 "심각한 범죄 혐의는 아니다"라고 입을 모으면서도 국정원의 허술한 첩보 활동에 대해 참담함을 표했다. 국정원 요원들이 테리 연구원에게 협력의 대가로 명품 가방을 선물하는 장면 등이 미 수사당국에 의해 포착된 사실이 단적이다. 이런 모습이 촬영된 사진은 공소장에 담겼다. 한국 대사관 등록 차량이 미국 측과의 비공개 회의 직후 테리 연구원을 태운 사실도 드러났다.

국정원 간부  출신의 A씨는 "미 정부가 지난해 여러 차례 우리 정부에 경고한 것으로 안다"며 "그런데도 정부와 테리 연구원과의 협력 활동이 이어졌기 때문에 기소하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지난 16일(현지시간) 테리 연구원을 기소하면서 이를 우리 측에 사전에 공유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다른 관계자인 B씨는 "과거 (첩보 활동을 하던) 해군 대령이 구속된 전례도 있다. 우방국이어도 이런 사안은 체크(확인)한다"면서 "특히 11월 미 대선을 앞두고 각국 정보기관의 치열해지는 정보전을 사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이 과거 정부 시절부터 테리 연구원과 관련해 경고했는데도 활동한 사실이 불을 지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전임 정부의 일?" 국정원, 내부 감사 착수

국정원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내부 감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지난 7월18일 출입 기자들과 만나 "감찰이나 문책을 하면 아무래도 문재인 정권을 감찰하거나 문책해야 될 것 같다"며 "사진이 찍힌 게 문재인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정부를 겨냥해 "전문적인 외교 활동을 할 수 있는 요원을 다 쳐내고 아마추어 같은 사람들로 채워 넣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번 사안이 특정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테리 연구원의 활동 시기는 박근혜 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허술한 정보 당국의 활동은 기관 내부의 자체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실제로 테리 연구원은 지난 2013년 주뉴욕 유엔 한국대표부 외교관(공사)으로 가장한 국정원 고위 요원 C씨와 처음 만났고, 2016년까지 교류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정책 방향을 뒷받침하는 글을 기고했다. 2014년 6월 미국외교협회가 발간하는 잡지에 "완전무결한 대한민국: 한반도 통일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 이유(A Korea Whole and Free: Why Unifying the Peninsula Won`t Be So Bad After All)"가 대표적이다. 테리 연구원은 이와 관련한 보수를 우리 정부에서 지급받았다. 2016년 말에는 국정원 요원과 미국 측 인사와의 만남을 주선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테리 연구원은 C씨의 후임 요원들과의 교류도 이어갔다. 문재인 정부 시절엔 국정원 요원이 테리 연구원에게 건넬 고가의 선물을 구매하는 장면이 포착되면서 특히 비판이 커졌다. 요원은 2019~21년 2845달러(약 390만원) 상당의 돌체앤가바나 코트, 2950달러(약 407만원) 보테가 베네타 가방, 3450달러(약 476만원) 루이비통 등 명품 코트와 가방을 구매해 테리 연구원에게 건넸다. 이런 모습이 담긴 사진은 미 검찰의 공소장을 통해 드러났다.

현 정부에서도 테리 연구원의 활동은 이어졌다. 그는 2022년 6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의 비공개 회의에서 나온 미 정부의 대북 정책과 관련한 비공개 메모를 국정원 측에 전달했다. 한국 외교정책과 관련한 행사(2022년 7월) 등을 정부의 요청으로 주최했다. 2023년 3월에는 외교부 관계자의 요청에 따라 테리 연구원이 근무하던 우드로윌슨센터가 '한미동맹 70주년 행사'를 한국 싱크탱크와 공동 주최했다. 행사 비용으로 한국국제정치학회가 윌슨센터에 2만5400달러(약 3500만원)를, 국정원이 주미 대사관 명의로 2만6000달러(3600만원)를 각각 테리 연구원에게 전달했다.

수미 테리 "한국 대리인으로 활동한 적 없어"

물론 유력 전문가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국정원의 통상적인 업무 가운데 하나다. 사건의 중심인 테리 연구원은 외교 전문가로 정평이 난 인사다. 북한 인권 문제에 특히 관심이 깊다고 한다. 테리 연구원은 최근 탈북민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유토피아를 넘어서(byond utopia)》 제작에도 참여했다. 앞서 미 중앙정보국(CIA) 수석 분석가, 미 국가안보회의(NSC) 한·일·오세아니아담당 국장,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 등을 지냈다. 그는 한국계 이민자 출신으로 미국 하와이와 버지니아에서 자랐다.

테리 연구원의 변호인 리 월러스키는 7월23일 공개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관련 혐의를 반박했다. 그는 "미국과 관련된 기밀 정보를 한국 정부에 넘기거나 미국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며 "한국의 고위 관리들은 워싱턴의 싱크탱크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그런 회의를 주선하는 건 미국의 유명 연구소 소속 간부로선 일상적인 업무"라고 했다. 그러면서 "테리가 한국의 대리인으로 활동한 적도 없다"고도 했다. 고가의 선물과 관련해선 알고 지낸 사인(私人)과 주고받은 선물이라며 대가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국정원 요원들의 허술한 첩보 활동을 두고 파장이 이어졌다. 미 수사 당국은 지난 10년간 테리 연구원이 요원들과 접촉한 동선, 통화·이메일뿐 아니라 대화 내용 등을 파악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 1차장 출신인 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외교관 여권을 가진 (국정원) 직원들이 전문가인 수미 테리를 만나 활동하면서 사진을 찍히고 뒤를 밟혔다는 건 매우 허술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특히 윤석열 정부의 전현직 국정원장(김규현·조태용)을 겨냥해 "국정원 정보관에게 외교부 직원들이 하는 일을 시켰고 그 과정에서 성과 욕심을 내 동맹국 간 정보 활동의 금도를 깼다"며 "외교부 출신들이 국정원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국회는 오는 7월29일 정보위원회를 열고 이번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의 업무 보고를 받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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