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을 많이 담으려면…귤포장에 숨은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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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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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제공
겨울 하면 귤입니다. 따뜻한 방에 앉아 손가락이 노래질 때까지 귤을 까먹는 즐거움은 역시 겨울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죠. 귤을 까먹으며 빨간색 망에 들어있는 귤을 보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망에 귤을 최적의 부피로 포장할 수 있을까요. 답은 예상 외로 복잡합니다.

● 케플러 대포알 쌓는 방법을 고민하다

‘부피가 최소가 되도록, 망에 최대한 많은 귤을 담는다’. 이 문제를 좀 더 일반화하면 ‘주어진 공간에 구를 가장 빽빽하게 담는 최적의 배치를 찾는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를 ‘구 쌓기 문제’라고도 부르죠. 어떻게 하면 구 사이 빈 틈이 가장 적도록 쌓을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400년 전인 16세기 말,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시절로 올라가는 유서깊은 수학 문제입니다. 당시 정치인이자 탐험가로 활동하던 영국의 월터 롤리 경은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면서 함선에 실린 대포알의 수를 파악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고민합니다. 그는 함께 탐험 중이던 수학자 토머스 해리엇에게 이 문제를 풀어달라고 부탁했죠. 해리엇은 1591년에 대포알 문제에 관한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왼쪽부터_쌓여있는 대포알의 모습. ‘구 쌓기 문제’는 함선에 실린 대포알의 수를 추정하는 문제에서 출발했다, 16세기 독일의 천문학자였던 요하네스 케플러의 초상. 케플러는 대포알 문제를 연구하다 효율적으로 구를 쌓는 방법에 관한 ‘케플러 추측’을 발표한다.August Kohler(W) 제공
여기서 더 나아가 대포알 문제를 효율적인 구 쌓기 문제로 바꾼 사람은 독일의 자연철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입니다. 케플러는 해리엇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구의 배열을 연구했고 1611년 논문을 발표하며 ‘3차원 공간에서 무한개의 구를 가장 촘촘하게 쌓는 방법은 면심입방격자 혹은 조밀육방격자’라는 추측을 제기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케플러 추측’입니다.

아마도 생소하게 들릴 면심입방격자와 조밀육방격자는 결정의 형태를 연구하는 학문인 결정학에서 널리 쓰이는 결정 구조입니다. 둘 다 삼각형으로 쌓은 구 세 개 위에 구 하나를 정사면체 형태로 쌓아나가는 배열입니다. 고체 결정도 구 형태의 원자가 쌓이면서 만들어지니 구 쌓기 문제와 닮아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형태로 구를 쌓으면 구 하나가 12개의 다른 구와 접하게 됩니다. 이때 충진율(단위 부피에서 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74.0%로 면심입방격자와 조밀육방격자가 다른 중요 결정 구조인 ‘단순입방구조(52.0%)’와 ‘체심입방구조(68.0%)’보다 더 빽빽하게 공간을 채울 수 있다는 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결정학에서 분류한 고체 결정구조. 원자의 배열은 수학에서의 구쌓기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위 결정구조 그림에서 내부의 원자는 구별하기 쉽도록 다른 색을 칠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과학동아 제공
● 387년만에 풀린 케플러 추측

그럼에도 실제로 케플러의 추측을 증명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후로 4세기 동안 수많은 수학자들이 케플러의 추측에 달려들었고, 나가 떨어지길 반복했어요. 처음으로 케플러 추측이 맞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은 토머스 헤일즈 당시 미국 미시간대 교수로, 1998년의 일이었습니다.

구 위에 구를 쌓는 방법은 무한정 많을텐데 헤일즈는 어떻게 이 문제를 증명했을까요. 1월 8일 미국 UC버클리에서 정수론을 연구 중인 이시우 박사과정 연구원을 화상 인터뷰로 만나 물어봤습니다.

“헤일즈는 무한개의 구조를 고려해야 하는 케플러 추측을 수천 개의 최적화 문제로 바꿨습니다. 그후 최적화 문제의 각 경우를 컴퓨터를 이용해 하나씩 확인했고, 마침내 증명하는 데 성공했죠.”

컴퓨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증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반응도 있었지만 결국 7년에 걸친 검토 끝에 헤일즈의 증명은 2005년 수학계 최고의 명망을 가진 저술지 ‘수학연보’에 출판됩니다. (doi: 10.4007/annals.2005.162.1065)

케플러 추측이 무려 387년 만에 풀린 것입니다.

자, 그러면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망 속의 귤도 케플러가 말한 것처럼 정사면체 모습으로 쌓아 올리면 가장 효율적이겠군요.

(왼쪽부터)면심입방격자 형태로 쌓은 테니스 공 뒤에서 포즈를 취한 토머스 헤일즈 미국 미시간대 수학과 교수. 그는 1998년, 무한 공간에서 구를 쌓을 때의 공간 효율에 관한 케플러 추측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헝가리 수학자 페예시 토트 라슬로. 유한한 구를 쌓을 때는 케플러 추측이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라슬로는 유한한 구를 쌓을 때 최적의 부피를 가지는 배열에 대한 ‘소시지 추측’을 발표했다. .University of Michigan Library 2.the Image File Collection of the Academic Library 제공
● 유한개의 구를 쌓을 때는 ‘소시지 추측‘

케플러 추측을 적용해보면 유한개 귤의 경우도 면심입방격자를 따라 귤을 입체 형태(덩어리)로 포장하면 부피를 덜 차지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케플러 추측은 무한한 구, 무한한 공간을 가정한 구 쌓기 문제입니다. 제게 주어진 귤의 수는 겨우 열 개 남짓. 이렇게 유한한 수의 구를 쌓을 때는 최적의 배열이 달라집니다. 오히려 소시지 모양으로 구를 길게 포장하는 편이 훨씬 부피효율적입니다.

1975년 헝가리 수학자 페예시 토트 라슬로는 ‘5차원 이상의 경우 공의 개수와 상관없이 항상 소시지 모양으로 공을 길게 배치했을 때 부피를 최소로 차지한다’는 추측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시지 추측’입니다.

이 연구원은 소시지 추측에 관한 간략한 역사를 들려줬습니다. “1998년 울리히 베트케 독일 지겐대 교수와 마르틴 헹크 독일 베를린공대 교수는 42차원 이상의 차원에서 소시지 추측이 맞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5~41차원 사이에서의 소시지 추측은 미해결 상태예요. 2~4차원에서는 구의 개수에 따라 가장 효율적인 배치 방법이 소시지나 덩어리를 왔다갔다하며 그때그때 달라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수학 연구로는 구가 존재하는 차원과 구의 중심이 존재하는 차원 사이에 부등식이 성립하며 이 부등식에 의해 효율적인 배치가 정해진다는 것 정도만 알려졌습니다. 구의 중심을 1차원 직선(소시지), 2차원 평면(피자), 3차원 입체(덩어리),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배치가 달라진다는 거에요.

특히 우리가 속한 3차원의 구에서는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구의 개수가 55개 이하일 때까지는 소시지 포장법이 최적이고 65개 이상일 때는 덩어리 포장법이 낫습니다. 그 사이 구가 56~64개일 때는 덩어리 포장법과 소시지 포장법이 최적 자리를 놓고 왔다갔다 합니다.

어쩔 때는 소시지 포장법이 낫고 어쩔 때는 덩어리 포장법이 낫다는 거죠. 외르크 월스 지겐대 교수는 1985년 이렇게 갑작스럽게 최적 포장법이 변하는 현상을 ‘소시지 재앙’이라 불렀습니다. 확실히 소시지 포장법과 덩어리 포장법이 줏대없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수학적으로 아름다워 보이진 않습니다.

귤 7개를 과학동아 편집부에서 직접 포장해봤다. 귤(구)을 포장하는 방법은 구의 중심이 위치한 차원에 따라 위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울리히 베트케 독일 지겐대 교수와 페터 그리츠먼 독일 뮌헨공대 교수는 구의 차원과 중심의 차원을 변수로 하는 부등식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3차원 구의 경우 소시지나 덩어리 형태의 구 쌓기만 효율적 배치의 후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 과학동아 제공
● 소시지 재앙, 직접 실험해보다

2023년 11월 30일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는 소시지 재앙을 색다른 관점에서 접근한 연구가 게재됐습니다. 마르욜레인 다익스트라 네덜란드 우트레흐트대 데브예 나노재료과학 연구소 교수팀은 소시지 재앙 문제를 실험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풀었습니다. (doi: 10.1038/s41467-023-43722-0)

연구팀은 우선 생물의 세포 내에서 볼 수 있는 막형 구조물인 소포를 거대한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구형 나노입자를 하나씩 집어넣으면서 전자 현미경으로 변하는 모습을 관찰했습니다. 소포가 어떤 형태에서 안정적이며 효율적인 모습으로 유지될지 지켜본 겁니다.

실험은 쉽지 않았습니다. 나노입자를 9개 이상 넣으면 소포가 찢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소포와 콜로이드가 보여준 움직임을 컴퓨터로 옮겨 시뮬레이션했습니다. 시뮬레이션 안에서는 소포가 찢어지지 않도록 소포의 물리적 특성 변수를 변화시키고, 최대 150개까지의 입자를 소포에 집어넣었죠. 그리고 구 55~65개 사이, 소시지 포장법과 덩어리 포장법의 회색 지대에서 구 쌓기 효율을 실험했습니다.

실험 결과 연구팀은 구가 58개와 64개일 때 정팔면체 형태로 구를 쌓으면 소시지 포장보다 더 조밀하게 포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전의 수학적 방법으로 찾지 못한 포장법을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으로 찾아낸 겁니다. 다른 수의 경우는 이전에 알려진 결과가 대체로 맞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실험 수학이라니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이전까지 수학적으로 찾아내지 못했던 쌓기 방식을 찾아낸 것이니 면밀한 검증을 거치면 충분히 수학 연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이 연구원의 의견입니다.

귤 어떻게 포장할까. 과학동아 제공
1 마르욜레인 다익스트라 네덜란드 우트레흐트대 교수팀은 나노입자를 사용해 소시지 재앙 현상을 직접 실험했다. 나노입자 7개를 소포에 집어넣어 소시지와 덩어리 모양으로 만든 모습. 흰 막대의 길이는 5um. 2·3 다익스트라 교수팀이 시뮬레이션을 통해 발견한 구 58개(2)와 64개(3)의 최적 배열. 살짝 잘린 정팔면체 형태로 구를 쌓으면 된다. Nature Communications 제공
● 구 쌓기 문제, 순수수학과 응용과학 사이에서

정리해보겠습니다. 3차원에서 구를 포장할 일이 있다면 55개까지는 소시지 모양으로 포장하는 것이 부피를 가장 덜 차지합니다. 56개, 58~62개, 64개 이상은 덩어리로 포장하는 게 낫습니다. 57개, 63개의 경우 소시지 포장법이 낫다고 추정되지만 연구가 더 필요합니다.

이 삶의 지혜는 귤은 물론 다른 구형 물건을 포장할 때도 유효합니다. 만약 친구에게 잘 깎은 수제 대포알 12알을 선물할 일이 생긴다면 덩어리보다는 소시지 형태로 포장하는 게 포장지를 아끼는 방법이겠죠.

구 쌓기 문제는 선물 포장 말고도 훨씬 넓게 응용됩니다. 앞서 봤던 것처럼 구 쌓기 문제는 결정학 분야에서 오래 전부터 논의됐습니다. 만약 이 구들이 서로 잡아당기는 인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위치에너지를 반영해 구 쌓기 문제를 일반화한 ‘보편 격자 문제’는 수학과 물리학이 상호작용하는 좋은 예입니다. 이 연구원은 수학계에서 “부호이론의 오류정정부호, 암호학의 격자기반 암호에서도 구 쌓기 문제가 응용될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구 쌓기 문제의 응용 범위가 엄청나게 넓은 거죠.

물론 수학자들이 응용을 염두에 두고 구 쌓기 문제를 고찰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지난 400년 동안 수학자들은 대포알에서 시작된 구 쌓기 문제를 일반화와 추상화를 통해 수십 차원을 넘나드는 수학적 통찰로 확장했습니다. 그리고 응용 과학자들은 이 통찰을 현실에 대입해 실험으로 증명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학자들에게 제시했습니다.

이렇게 순수수학과 응용과학의 세계는 서로 자극을 주고 받으며 짜릿한 접점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소시지 추측의 남은 수수께끼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에서 풀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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