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는 머리가 나빴다?...최고 과학자들 둘러싼 진실

입력
기사원문
이창욱 기자
본문 요약봇
성별
말하기 속도

이동 통신망을 이용하여 음성을 재생하면 별도의 데이터 통화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과학동아 제공
여성 과학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마리 퀴리이다. 여성 과학자가 드물었던 시절에 노벨상을 두 차례나 받은 그는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과학자로 존경받고 있지만, 동시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쓴 평가가 뒤따르기도 했다. 마리 퀴리를 둘러싼 소문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과학동아 제공
● 의혹 1 마리 퀴리는 이론적 능력이 떨어진다?

마리 퀴리는 폴로늄과 라듐, 두 종류의 방사성 원소를 발견하고 방사능의 특성을 규명한 공로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11년에는 라듐 원소를 분리하고 원소량을 측정해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서로 다른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탄 사람은 마리 퀴리가 유일하다. 그만큼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마리 퀴리의 방사능 연구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발견하고 그 특성을 밝히는 데 집중돼 있었다. 그의 연구는 우라늄을 추출하고 남은 피치블렌드 광석을 적당한 용매로 녹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강한 방사능을 띠는 물질만을 뽑아내는 방법으로 라듐을 분리했다. 이를 위해 마리 퀴리는 20kg에 달하는 광석을 부수고 두꺼운 철봉을 돌려가며 용매에 녹였다. 엄청난 노동에 퀴리는 한때 체중이 9kg 가까이 줄었다. 이렇게 부인이 고생하는 동안, 공동연구자였던 남편 피에르 퀴리는 방사능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자 세간에는 ‘마리 퀴리는 머리가 안 좋아서 힘들지만 단순한 일만 하고, 재능이 출중한 남편이 이론적 작업을 전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1903년 노벨 위원회가 처음에는 남편 피에르 퀴리만 수상자로 선정했다가, 피에르 퀴리가 편지를 보내 부부의 공동 수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이런 소문의 근거였다. 이 소문은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마리 퀴리의 이론 실력은 그의 대학 졸업 시험 성적에서부터 확인된다. 프랑스 소르본대의 자연과학부에 등록한 학생은 1800명, 그중 여성은 23명에 불과했지만, 마리 퀴리는 1893년에 치러진 물리과학 학사 자격시험에서 1등, 수학 시험에서는 2등을 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퀴리 부부는 연구를 왜 이렇게 나누었을까? 이는 방사능 연구가 갖는 특성에 기인한다. 마리 퀴리가 개척한 방사능 연구는 알파(α)선, 베타(β)선, 감마(γ)선의 물리적 특성을 탐구하는 물리학 연구와 방사능을 띠는 원소를 분리하는 화학적 연구가 중첩된 융합 분야였다.

처음 연구를 시작한 것은 마리 퀴리였지만 이 분야의 발전 가능성이 커지자 피에르 퀴리도 부인을 따라 이 연구로 뛰어들었다. 마리 퀴리는 세심하면서도 철저한 실험이 중요한 방사성 원소 분리를 전담했고 피에르 퀴리는 대담한 이론적 가설을 세우는 일이 중요한 방사선 탐구를 맡는 식으로, 전략적으로 연구 분야를 나누었다.

초창기 방사능 연구자들 사이에선 이런 분업이 자주 눈에 띈다. 영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화학자 프레데릭 소디와, 독일의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는 남성 화학자 오토 한과 공동 연구를 했다. 이들 중 화학자에게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평가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마리 퀴리에 관한 세간의 평가는 여성 과학자를 향한 편견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과학동아 제공
● 의혹 2 마리 퀴리는 지독하게 가난한 유학생이었다?

마리 퀴리의 가난했던 유학 시절 이야기는 유명하다. 러시아 식민지 치하였던 폴란드 출신으로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으로 유학을 왔던 그녀는 대학 근처에 다락방을 얻어 생활했다. 겨울이면 있는 옷을 다 껴입어야 할 정도로 다락방은 추웠다. 끼니를 거르는 일도 잦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 역경을 딛고 마리 퀴리는 뛰어난 과학자로 우뚝 섰다는, 감동적이지만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와는 결이 조금 다른 이야기도 있다. 마리 퀴리의 유학 시절, 파리에는 마리 퀴리의 언니 부부가 둘 다 의사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같지는 않더라도 부부가 모두 의사라면 경제적으로 넉넉해서 동생 하나 건사하기가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마리 퀴리가 가난한 고학생이었다는 이야기는 위인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장된 이야기일까? 아니면 언니는 폴란드에서 온 동생을 모른 체 했던 것일까?

두 자매의 외국 유학은 상부상조의 결과였다. 언니 브로냐와 동생 마리는 대학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당시 폴란드에서는 여성의 대학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자매는 여성도 대학에 갈 수 있었던 파리로 가기로 결심했다. 두 자매는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먼저 브로냐가 파리에서 공부하는 동안 마리는 폴란드에서 돈을 벌어 언니의 유학비를 보내고, 언니가 공부를 마치면 마리의 유학비를 지원한다. 이에 따라 언니가 유학을 간 동안 동생은 지방의 어느 부잣집에서 입주 가정교사 생활을 했다. 브로냐가 공부를 마친 후 의사가 되자 언니는 약속대로 마리를 파리로 불렀다. 마리 퀴리는 언니의 신혼집에 같이 살면서 언니 부부의 지원 속에 대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고학 스토리는 꾸며낸 이야기인가? 그건 아니다. 마리 퀴리가 따뜻하고 포근한 언니네를 떠나 낡고 추운 다락방으로 옮긴 것은 아버지의 당부 때문이었다. 언니네 집은 파리로 유학 온 폴란드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거기 모인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고국의 정치적 상황을 개탄하며 폴란드의 독립과 자유를 열망했고, 퀴리 자매도 여기에 동참했다.

한 마디로 언니네 집은 일제강점기 도쿄에 모여 조선의 독립을 논했던 조선인 유학생들의 사랑방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셈이다. 자매의 아버지는 언니네 집을 드나드는 폴란드 유학생 중에 러시아 정보원이 섞여 있을까 봐 걱정했고, 또 매일 밤 모이는 사람들로 작은딸의 공부가 방해받을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마리 퀴리는 집을 옮겼고, 언니의 지원이 있었음에도 타지에서 홀로 지낸 유학 생활은 춥고 배고팠던 기억으로 남은 것이다.

둘째 딸 이브 퀴리는 후에 유엔아동기금(UNICEF) 대표인 헨리 라부이스와 결혼했는데, 라부이스도 1965년 유니세프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때 유니세프 대표 자격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래서 이브 퀴리는 집안에서 노벨상을 못 받은 사람이 본인밖에 없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과학동아 제공
● 의혹 3 퀴리 가문은 노벨상 메달이 다섯 개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이 배출된 적이 없다. 노벨상이 생긴 지도 120년이 넘었는데 아직 노벨 과학상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다. 이렇게 귀한 노벨 메달을 퀴리 가문은 지금까지 다섯 개나 받았다는데 사실일까?

마리 퀴리의 노벨상 메달부터 따져보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마리 퀴리는 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으로 2개의 메달을 받았다. 다음으로 남편 피에르 퀴리.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은 남편 피에르 퀴리와의 공동 수상이었으므로 남편도 노벨상 메달을 받았다. 이것까지 포함하면 3개.

1904년 연구실의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Public Domain 제공
마리 퀴리가 사용한 실험 노트의 일부. 마리 퀴리의 노트는 라듐-226으로 오염되어 있어, 열람하기 위해서는 보호 장비를 착용해야 한다. Wellcome Foundation 제공
남은 2개 메달의 비밀은 마리 퀴리의 첫째 딸, 이렌느 퀴리에게 있다. 10대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방사능 실험을 했던 이렌느 퀴리는 방사능 연구 분야에서 그 명성을 이어 나갔다. 남편이 되는 프레더릭 졸리오도 실험실에서 만났다. 선배였던 이렌느 퀴리가 프레더릭 졸리오에게 실험을 가르쳐 주면서 둘은 사랑에 빠졌다. 결혼 후 서양 풍습에 따라 이렌느 퀴리는 이렌느 졸리오가 되어야 했지만,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연구와 인품 모두를 존경했던 사위 프레더릭은 자신의 가문과 퀴리의 가문 모두를 잇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부부는 졸리오-퀴리를 자신들의 새로운 성으로 택했다.

이들은 퀴리라는 성과 함께 그 연구도 이어받았다. 졸리오-퀴리 부부는 폴로늄에서 나온 알파 입자를 알루미늄에 쏘자 알루미늄 원자핵이 방사성 인의 원자핵으로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 예전 연금술사들이 꿈꿨던 것처럼 인공적인 방법으로 원소를 다른 원소로 바꾸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1935년 졸리오-퀴리 부부는 이 발견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퀴리 가문의 노벨상 메달은 모두 5개가 된다. 퀴리 가문의 다섯 개의 노벨상은 진실!

※관련기사
과학동아 5월, [과학사 극장] 마리 퀴리는 머리가 나빴다?

기자 프로필

안녕하세요. 동아사이언스 어린이과학동아 이창욱 기자입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IT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기사 섹션 분류 안내

기사의 섹션 정보는 해당 언론사의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언론사는 개별 기사를 2개 이상 섹션으로 중복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닫기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