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봉비평문학상 제정·운영 주역
비평적 균형감, 문단 진영 논리에 묻혀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선생은 아무런 가식이 없었다. 말 그대로 소탈하고 털털했다. 일각에서 ‘문단권력’으로 비판받은 문학과지성사 대표를 4년간 역임했지만, 그에게서 어떤 권위나 허위의식을 느낄 수 없었다. 짧게나마 선생과 인연을 맺으며 느꼈던 것은 감히 말하건대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짙은 경외와 애정, 진솔한 인간미였다.
10여 년 전 풋내기 문학 담당 기자였을 때 알게 됐던 문학평론가 홍정선 선생은 그렇게 문학을 사랑했던 휴머니스트였다. 올해 문화부로 발령 났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지만, 선생은 이미 쓰러진 후였다. 홍정선 선생은 지난 8월 22일 생을 마감했다.
올해 문학계에서 유난히 많은 어른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2월에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5월 김지하 시인, 9월 소설 ‘만다라’의 김성동 작가, 12월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작가까지. 거목들의 부고 하나하나가 문학이 절정이었던 한 시대를 마감하는 늦은 오후의 종소리처럼 쓸쓸했지만, 선생의 부음은 가슴을 찌르는 가시처럼 아팠다. 마치 비평의 영원한 죽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홍 선생은 한국일보가 1990년부터 2021년까지 주관했던 팔봉비평문학상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주역이었다. 근대 문학 비평을 개척한 팔봉 김기진(1903~1985) 선생을 기리는 비평문학상 제정을 유족들에게 권고했고, 이후 이 상의 운영위원으로서 30년 가까이 궂은일을 도맡았다. 어떤 수익도 없는 일이었지만, 상의 정신을 유지하는 게 그의 보람이었다.
상 제정 당시에도 팔봉의 친일 행적은 알려져 있었지만, 근대 비평 개척자의 업적을 역사에서 삭제할 수 없고, 일제강점기의 모순적 양상을 선악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게 선생의 뜻이었다. 그에겐 문학과 문학 밑에 깔린 인간애가 국가와 이념의 틀보다 더 넓고 더 깊은 바다였다. 1회 수상자인 김현을 시작으로 김윤식 김치수 김우창 김병익 등 기라성 같은 평론가들이 수상하며 뿌리 깊은 정신의 계보를 만들었다. 2017년 수상자였던 김형중 평론가는 역대 수상자들을 거론하며 “제게는 이루어야 할 정신의 모범이었다”면서 “이 상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학의 위상이 날로 위축되는 상황에서 되레 문단의 앙상한 잣대는 점점 더 위력을 떨쳤다. 친일문학상을 폐지하라는 압력과 시위의 강도는 해가 갈수록 거세졌다. 이런 소란에 유족마저 지쳤고, 이 상을 지탱했던 홍 선생이 쓰러지면서 운영 동력이 상실됐다. 결국 올해 유족들이 출연한 기금이 환원되면서 팔봉비평문학상은 폐지됐다. 문학의 사회 참여를 내세우던 흐름엔 문학의 독립성을, 상업성이 문학을 덮칠 때 비판 의식을 강조했던 선생의 비평적 균형감각 역시 우리 사회의 적대적 진영 논리에 묻히고 만 셈이었다.
소위 ‘친일문학상’이 없어졌기에 문학의 정신이 회복된 것일까. 지자체들이 지역 홍보 차원에서 문학상을 남발해 수백 개의 상이 만들어졌지만 나눠먹기 수상으로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더군다나 그 많은 문학상 중 비평가에게 주는 상은 거의 없다. 회색의 대학 강단이나 알량한 추천사가 아니라면 비평의 자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친일과 반일의 깃발이 나부끼는 사이 비평은 극소수만 찾는 폐허가 된 셈이다. 비평이 없는 곳에서 문학 작품인들 제 빛을 볼 수 있을까. 저 수많은 문학상들이 기리는 정신이 대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 최근 몇 년간 문단 미투 사건, 표절 시비, 문학상 난립 등으로 문학판에는 존경할 어른도, 따르고 싶은 본보기도 없다는 말이 무성하다. 결국 그렇게 시대가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