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 출신 20대 여성 온두라스서 살인 혐의…500일 만에 풀려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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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8.27. 오전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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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초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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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 방에서 네덜란드 여성 구호 조치 후 누명[사건속 오늘]
한국서 긴급대응팀 파견…목 출혈 원인 밝혀, 체포 416일만 무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갈무리)


(서울=뉴스1) 신초롱 기자 = 2009년 8월 27일, 이집트 카이로 공항에서 한국인 여성 한지수 씨가 네덜란드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한 씨는 이날 엄마를 만나기 위해 미국 워싱턴에 가려 했으나 끝내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그렇게 이틀이 흐르고, 친언니 지희 씨는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큰 충격에 빠졌다. 이란인이라고 밝힌 여성은 "인터폴 유치장에서 지수를 만났다"면서 그가 살인 혐의로 구금돼 있는 상태라고 전했다. 당시 한 씨에게는 인터폴 적색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다.

살해됐다는 피해자는 마리스카 마스트라는 23세 네덜란드 여성이었다. 명문대 출신 한 씨는 어쩌다 타국에서 살인 용의자가 되었을까.

◇하우스메이트가 데려온 여성, 의식 잃고 쓰러진 뒤 사망

사건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5세였던 한 씨는 2008년 6월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스킨스쿠버 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다이빙 성지라 불리는 온두라스 로아탄섬으로 향했다.

로아탄섬은 살인율 1, 2위를 다툴 정도로 최악의 치안으로 악명 높다. 하지만 스쿠버 다이빙에 최적인 자연환경, 저렴한 물가 덕분에 늘 전 세계에서 온 여행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한 씨는 다이빙 강사 시험을 열흘 앞둔 시점, 함께 지내던 룸메이트들이 하나둘 귀국하면서 머물 곳이 마땅치 않게 되자 다이빙 숍 강사였던 호주 출신 남성 댄과 하우스메이트로 지내기로 한다.

2008년 8월 늦은 밤, 댄은 취한 상태로 마리스카 마스트라는 여성과 함께 귀가했다. 여성은 새벽 3시쯤 화장실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문을 열고 나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댄과 한 씨는 신속하게 응급처치했고 덕분에 마리스카는 의식을 되찾았다. 그러다 약 3시간이 흘렀을 무렵 댄은 다시 한 씨를 다급하게 불렀다. 침대에 누워 있던 마리스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고 있었다. 병원으로 이송된 마리스카는 결국 숨을 거뒀다.

마리스카의 사망 원인은 뇌 손상에 의한 급성 뇌부종이었다. 부검 결과 향정신성 의약품인 암페타민이 검출됐다. 사망 당시 술에 취했을 뿐 아니라 약물에 취해 있는 상태에서 바닥에 세게 부딪히면서 뇌 손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됐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갈무리)


한 씨와 댄은 목격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지만 별다른 타살 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곧 풀려났다. 이후 댄은 온두라스를 떠나 호주로 돌아갔고 한 씨도 다이버 강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9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 씨는 로아탄섬에서 딴 자격증으로 이집트 다합에서 강사 활동을 시작했다.

◇한 씨, 살인 혐의로 긴급 체포…"마녀사냥하듯 범인으로 몰아"

같은 해 12월 한 씨는 어머니가 있는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이집트 카이로 공항에서 여권 심사를 받다가 살인 혐의로 체포돼 카이로 감옥에 3주간 구금됐다.

인터폴에서는 한 씨에게 마리스카 사망 사건에 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랍어로 적힌 서류를 내밀더니 서명을 요구한 뒤 유치장에 감금했다.

한 씨가 인터폴 유치장에 들어온 지 일주일쯤 됐을 무렵 이집트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파견된 영사가 도착했다. 영사는 온두라스 검찰이 마리스카 살인 혐의로 한 씨를 기소했다고 전했다. 검찰은 한 씨가 댄과 공모해 마리스카를 죽였으며 뒷받침할 증거도 있다고 주장했다.

3주 뒤 한 씨는 온두라스로 옮겨졌다. 2009년 9월 23일, 떠난 지 1년 만에 로아탄섬으로 돌아오게 된 한 씨는 압송된 날 1차 심리를 받았고, 심리가 끝난 후에는 다시 유치장에 구금됐다.

2차 심리에서 검사는 아무런 설명 없이 다짜고짜 살인이라고 주장했다. 한 씨는 일기장에 "객관적인 입장에 있어야 할 검사가 마치 마녀사냥하듯이 무고한 사람을 몰고 가고자 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재판의 공정성 역시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저는 현재 온두라스의 라세이바 감옥에 수감 중이며 3차 심리 및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며 강압 수사에 대한 억울함을 토로했다.

◇긴급 대응팀 꾸려 결백 입증…가석방 수사 끝에 무죄 판결

한 씨는 증거가 충분하고 외국인이라 도주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결국 구속됐다. 한 씨의 아버지 한원우 씨는 딸의 체포 소식을 듣고 생업을 접고 급히 온두라스로 향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갈무리)


신원보증서를 받는다면 불구속 수사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곧장 대사관을 찾았다. 하지만 대사관 측은 "어려운 사정을 존중해 외교통상부에도 건의했지만, 정부가 개인에 대해 보증할 수 없다는 일관된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신병 확보에 대한 어떠한 소명 보증도 제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 씨의 아버지는 매일 40㎞를 달려 딸을 면회하러 갔다. 며칠 뒤 한 씨를 취재한 방송이 전파를 타면서 희망적인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한 씨의 구금 상황을 장관 회의에서 언급했다.

이후 판사 출신 변호사, 경찰 영사 출신 경감, 국과수 전문 법의학자 등 8명으로 구성된 긴급 대응팀이 꾸려졌다. 온두라스 한인 목사도 한 씨의 신원 보증을 자처하고 나섰다. 다수의 노력 끝에 한 씨는 2009년 12월 가석방 처분을 받아 가택연금 상태로 수사를 받았다.

대응팀은 본격적으로 한 씨의 결백을 입증할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두 번에 걸쳐 작성된 부검보고서에 이상한 점이 포착됐다. 급성 뇌부종으로 사망했다는 1차 부검보고서 내용과 달리 2차 부검보고서에는 사망자 몸에 남은 상흔은 방어흔이며 사인은 경부 압박 질식이라고 기록돼 있었던 것.

하지만 상흔이 치료 과정에서 생겼다는 진료 기록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마리스카가 사건 당일 실려 갔던 병원 당직 의사는 목 내부 출혈 원인이 후두경으로 인해 발생한 상처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후 한 씨가 온두라스로 이송된 날짜와 2차 부검 보고서 작성일이 같은 날짜에 작성된 것으로 드러났다. 사망한 마리스카는 네덜란드의 유명 재력가 집안의 딸이라는 사실이 전해졌다. 외국에 놀러 간 딸이 하루아침에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부모가 온두라스 측 수사당국을 압박해 재조사를 요청했던 것으로 추정됐다.

2010년 10월 16일 열린 1심 재판에서 무죄가 판결됐다. 체포 416일 만이었다. 온두라스 검찰은 항소하지 않아 무죄가 확정됐고, 한 씨는 약 500일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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