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팀장이 고물가 시대 MZ에 배운 '더치페이'[이승환의 노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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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10.18. 오후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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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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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안 마셨으면 술값 빼고 돈내는 '신풍속도'
MZ·X세대 이어 베이비부머도 '더치페이' 선호
[편집자주] 신조어 No cap(노캡)은 '진심이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캡은 '거짓말'을 뜻하는 은어여서 노캡은 '거짓말이 아니다'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요. 칼럼 이름에 걸맞게 진심을 다해 쓰겠습니다.

ⓒ News1 DB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올해 초 'MZ세대'(1980년 초반생~2010년생)의 더치페이 문화를 알아보라고 후배에게 요청했다. 고물가 시대를 맞아 젊은 세대들이 더치페이(각자 내기)를 선호하지 않겠느냐는 지레짐작 때문이었다. MZ에 속하는 30대 초반 후배는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좀 식상한 얘기이지 않을까요?"

더치페이가 MZ의 소비문화로 자리 잡은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신풍속도'를 그리고 있다고 한다. 함께 식당에 가서 먹고 마셔도 비음주자는 술값을 제외하고, 채식주의자는 고기가 들어간 음식값을 빼고 비용을 내는 식이다. 30대 초반 이하 MZ에게 이런 문화가 익숙할지 모르지만 40대 이상 기성세대에겐 아직 낯선 모습이다.

◇'각출'이냐 '갹출'이냐

더치페이는 한국어로 '각출' 또는 '갹출'이라고 표현한다. 어감이 비슷한 두 단어의 쓰임새는 다소 다르다. '각각 낸다'는 의미의 각출은 5명이 10만 원어치 먹었다면 한 사람당 칼같이 2만 원을 지불하는 것이다.

갹출은 '같은 목적을 위해 여러 사람이 돈을 나눠 낸다'는 뜻이다. 반드시 'n분의 1'로 계산해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게 핵심이다. 술값이 10만 원이라면 주머니 사정에 따라 누구는 5만 원 내고 누구는 2만 원을 내는 식이다. 술을 안 마셨다며 술값을 제외하고 돈을 지불하는 것은 갹출이 진화한 형태처럼 보인다. 한국어로 표현한다면 요즘 MZ의 더치페이는 각출 아닌 '갹출'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80년대 초반생이라 MZ세대지만 중년에 접어들어 기성세대로도 분류되는 필자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또래나 선배 세대 얘기를 들어 보면 과거 갹출은커녕 '각출'조차 언감생심이었기 때문이다. 연장자가 혹은 직급이 가장 높은 사람이 술값이든 밥값이든 모두 내는 것을 미풍양속처럼 떠받들었다. 이러한 술값 내기 문화를 '라떼'(나 어렸을 때 일)가 아닌 진행형으로 인식하는 40대 이상 중년이 여전히 적지 않다.

그러나 이대로 가다간 주머니가 거덜 날 것이란 불안감을 저마다 느끼고 있다. 고물가가 도무지 잡힐 기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달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다시 3%대로 진입했다. 특히 농산물 물가는 20.9%나 껑충 뛰며 전체 물가를 0.08%포인트(p) 끌어올렸다. 식료품 등 가공식품은 물론 외식 물가도 펄펄 나는 모양새라 당분간 3%대 물가 상승률이 이어질 수 있다. 이러다 보니 '대파 한 단이 875원'이라는 얘기에 사람들은 펄쩍펄쩍 뛰며 진위를 추궁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일상에서 피부로 체감하는 것이다. 기자 생활을 시작한 10년여 전만 해도 대여섯 명이 아랫배가 팽창할 정도로 술과 음식을 먹어도 영수증에는 총 10여만 원이 새겨졌다. 요즘에는 대여섯 명이 회식해 20만 원 이하로만 나와도 '나름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6년 전만 해도 소주 한 병에 3000원 하는 곳도 있었는데 이제 서울 도심 식당에선 최소 5000원이다. 서민 음식의 대명사 자장면 한 그릇이 7000원이 넘는 세상이다.

더치페이가 MZ세대 맏형격인 40대와 그 윗세대인 X세대(1965~1979년생)뿐 아니라 베이비부머(1946~1964년생)에게도 확산하는 배경이다. 고정비인 집세와 관리비, 각종 공과금까지 고려하면 고물가의 부담은 가중하지만 '외근'이 잦은 사회구성원은 외식을 포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앞으로 더치페이하자"

결국 자주 만나는 또래 지인인 A 씨에게 제안했다. "앞으로 더치페이를 하자. 그래야 서로 부담스럽지 않지." A 씨는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A 씨와 다른 지인인 B 씨, 필자는 최근 서울 도심의 한 삼겹살집에서 고기를 굽고 술잔을 부딪쳤다. 우리는 누적된 스트레스와 애환을 고함치듯 쏟아냈고 술병은 테이블에 하나씩 늘어갔다.

그러던 중 영업 마감 시간이 다가오자 A 씨는 돌연 지갑을 손에 들고 질주하려는 모양새를 취했다. 계산대 앞에 선 그의 팔을 붙잡은 필자는 단숨에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옆에 있던 B 씨도 "그러면 나도 내겠다"며 카드를 들이밀었다. 총 16만 5000원 정도 나왔는데 우리 세 명은 5만 원 조금 넘게 각각 냈다.

갹출은 아니지만 '각출'에는 성공한 것이다. 밖으로 나와 필자는 호기롭게 외쳤다. "40대 이상 평범한 직장인에게 더치페이는 선택 아닌 필수인 것 같습니다. 허허." A 씨와 B 씨는 맞장구를 치면서도 필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비교적 가벼웠지만 어딘가 씁쓸했다.

이승환 사회부 사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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