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 넘긴 '아재' 울린 '코리안 좀비'의 은퇴 경기[이승환의 노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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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3.09.17. 오후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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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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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좀비' 정찬성의 '인생 2막'은 어떨까[편집자주] 신조어 No cap(노캡)은 '진심이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캡은 '거짓말'을 뜻하는 은어여서 노캡은 '거짓말이 아니다'로도 해석될 수 있겠지요. 칼럼 이름에 걸맞게 진심을 다해 쓰겠습니다.

‘코리안 좀비’ 정찬성이 31일 서울 상암동에서 10월 UFC Fight Night 출전을 앞두고 열린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커넥티비티 제공) 2020.8.31/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서울=뉴스1) 이승환 기자 =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체육 시간이었다. 배구 연습을 하다가 오른쪽 어깨를 확 젖혔다. 순간 '뚝'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렸다. 나도 모르게 '악'이라는 비명을 질렀다. 어깨가 탈구됐던 것이다. 한 번 어깨가 빠지면 습관성 탈구로 악화하곤 한다. 그 고통은 생살이 통째로 뜯기는 것 같은 참혹한 수준이다.

약 10년 전인 2013년 8월, 세계 최대 격투기 단체 UFC 페더급 경기였다. 20대 한국인 선수가 챔피언 조제 알도(당시 27세)와 맞붙었다. 모든 이의 예상을 깬 대등한 경기였다. 그러던 4라운드 초반, 알도와 펀치 공방하던 사내의 상체가 심상치 않았다. '악' 비명을 질러 본 필자는 직감했다. 그의 오른쪽 어깨가 탈구됐음을 말이다.

◇'어떻게 저거 가능하지?'

사내는 그 와중에도 왼손으로 어깨를 맞추려 했다. 알도는 놓치지 않고 어깨 쪽으로 연신 발차기를 날렸다. 필자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만, 이제 그만, 경기를 멈춰야 해"라고 속으로 외쳤다. 생살이 통째로 뜯기는 듯한, 참혹한 고통이 찾아왔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내는 오히려 챔피언을 향해 전진했다. 놀라운 투혼이었다. 알도도 다소 당황한 듯했다. 경기는 알도의 승리로 끝났으나 인상적인 것은 사내였다. 어깨 탈구를 경험해 본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그 고통 속에서 어떻게 계속하려 했던 거지?'

그의 이름은 정찬성(36). '코리안 좀비'라는 링네임으로 유명한 한국 최고의 격투기 선수다. 좀비처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드는 그의 경기에 세계 격투기 팬은 열광했다. 정찬성이 팔각 링인 '옥타곤'으로 걸어 들어가면 팬들은 그의 입장곡 '좀비'(더 크렌베리스 곡)를 '떼창'한다. 데이나 화이트 UFC 회장도 '코리안 좀비' 티셔츠를 입고 '팬심'을 드러낸 바 있다.

알도 전 이후 그의 경기와 인터뷰를 빠짐 없이 챙겨봤다. 그가 격투기에 얼마나 진심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지난해 4월 정찬성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8년 8개월 만에 두 번째 타이틀전을 치르게 됐다. 상대는 현 페더급 챔피언이자 UFC 역대 최고 선수로 꼽히는 알렉산더 볼카노프스키(35)였다.

챔피언의 경기력은 예상보다 압도적이었다. 정찬성의 얼굴은 피범벅이 됐고 퉁퉁 부어올랐다. 필자는 "그만, 이제 그만해"라고 속으로 외쳤다. 3라운드 후 1분간의 휴식시간에 보다 못한 세컨드(경기 중 선수를 돌보는 사람)가 정찬성에게 물었다. "더 할 수 있겠어?" 그러나 이미 '좀비 모드'였다. 정찬성은 "하겠다"며 경기 의지를 보였다.

경기 결과는 볼카노프스키의 승리였다. 정찬성은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은퇴를 고민하는 발언을 했다. "나는 더 이상 챔피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걸(격투기) 계속하는게 맞는지 모르겠다."

이후 지난해 5월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현한 정 선수는 훨씬 복잡한 심경을 밝혔다. "(은퇴를 하기엔) 저는 격투기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머릿속이 미칠 것 같아요." 그의 아내도 이 프로그램에 나와 울먹이며 말했다. "남편이 사랑하는 일을 같이 한다는 것 자체가 저희에겐 큰 행복인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좀비 모드'

정찬성의 최근 경기는 지난달 26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맥스 할러웨이(32) 전이었다. 2라운드 후 승세는 페더급 1위 할러웨이로 이미 기울었다. 정찬성도 당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3라운드 공이 울리자, 그는 어김없이 전진했다. 적당히 버티고 피하기보다 장렬히 싸우겠다는 투혼이었다. 팬들을 위해서라도, 불꽃을 태우겠다는 의기가 느껴졌다.

이번엔 '그만, 이제 그만'이라고 속으로 외치지 않았다. 정찬성이라면, '코리안 좀비'라면 질 줄 알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기 종료 후 승자 할러웨이는 패자 정찬성을 부축하며 예우를 갖췄다. 정찬성은 "이제 그만 하겠다"며 은퇴를 선언했고 관객들은 승자가 아닌 '좀비'를 외쳤다. 16년간의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는 장면이었다.

정찬성이 너무 고생한 것 같아 다섯 살이나 어린 그에게 '형'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이런 필자가 철 없이 느껴질 수 있지만 정찬성의 경기는 그런 것이었다. 불혹을 넘어 중년으로 향하는 '아재'(아저씨)마저도 청년처럼 가슴 뛰게 하는 감동이 있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해 빠져들다 보면 마침내 그 분야 장인이 된다. '격투기 장인' 정찬성의 인생 2막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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