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8일!] "영원히 죽지 않을 줄 알았다"… 49년 독재자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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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4.07.08. 오전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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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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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김일성 주석 사망
1994년 7월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석 김일성이 82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사진= tvn '응답하라 1994' 캡처
1994년 7월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의 주석 김일성이 사망했다.

다음날인 9일 북한 중앙방송은 지난 8일 오전 2시 김 주석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음을 알렸다. 북한의 독재자이자 6·25 한국전쟁의 주범이었던 김 주석은 평안북도 묘향산에 위치한 개인 특각에서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김 주석은 7월25일로 예정된 김영삼 대통령과의 최초 남북정상회담을 18일 앞둔 상황에 급사했다. 1945년 이후 북한의 전 분야를 장악하고 1인 장기 집권체제를 유지해온 김 주석의 사망은 북한 내부에 큰 변화를 예고했다.



변화하는 남북 정세 속 갑작스러운 김일성의 사망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갑작스럽게 탈퇴 후 핵 개발을 통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했다. /사진=채널A 이제만나러갑니다 캡처
1993년 3월12일 북한의 돌발적인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북한은 핵 개발이 국제적 고립을 막아줄 것이라 생각했고 성명문을 통해 "사회주의제도를 옹호, 고수하기 위한 응당한 자위적 조치"라고 말했다.

김 주석이 사망한 해인 1994년 3월19일 특사 교환을 위해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실무접촉에서 북한의 박영수 대표단장이 "전쟁 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된다"고 말해 남북관계에 또다시 위기감을 조성했다.

한반도의 위기 상황에 미국이 움직였다. 카터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방문해 김 주석을 만났다. 그는 북측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김 주석은 이를 수락하며 분단 이후 첫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7월5일 기자회견에서 "우리 한반도의 평화와 나아가서는 신뢰의 구축, 더 나아가서는 통일을 지향하는 일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지만 두 정상의 만남은 김 주석의 사망으로 무산됐다.



김정일 체제의 붕괴… 남도 북도 대혼란


북한 주민들은 신 같은 사람이라 믿던 김일서의 사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사진=채널A 이제만나러갑니다 캡처
북한은 김 주석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큰 충격에 빠졌다. 2021년 9월 방영된 채널A 프로그램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나온 탈북민 패널들은 그 당시를 회상했다. 북한 주민은 "김일성은 죽지 않을 줄 알았다"며 "신 같은 사람이 죽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태양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며 심지어는 "내일 해가 뜨지 않을 줄 알았다"고 말할 만큼 북한 주민에게 김 주석의 사망은 놀라운 일이었다. 김 주석이 49년 동안 장기 집권하면서 북한은 '김일성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40대 주민까지는 살아있는 동안 통치자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북한은 큰 충격에 빠졌다. /사진=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캡처
김 주석이 죽자 북한은 애도 기간을 가졌다. 이 기간에는 밝은 옷을 못 입게 했으며 장마당(북한의 시장)에도 못 나가게 했다. 주민들은 김 주석의 죽음을 슬퍼하며 자해와 자살을 시도하고 매일 같이 김 주석의 동상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 기간에는 북한 주민이 죽어도 장례조차 치르지 못해 처리하지 못한 시신이 집 마당에 나뒹굴었다.

한국도 김 주석의 사망에 깜짝 놀랐다. 김 주석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기 위해 다방과 전자상회 앞에는 TV를 지켜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김 주석의 죽음에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국민들은 악독한 독재자이자 한국전쟁의 원흉이었던 김 주석의 죽음에 잘 죽었다는 반응과 정상회담을 앞둔 만큼 남북관계가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다는 반응으로 나뉘었다. 또 일각에서는 북한이 내부에서 스스로 무너지며 평화적인 흡수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레발치기도 했다.

북한의 내부가 혼란할 것으로 예측한 일부 시민들은 다시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며 라면 등 생활필수품을 사재기해 일시적 으로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통화량이 급상승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9일 낮 12시 청와대 본관에서 오찬 간담회 중 김 주석의 사망 소식을 쪽지로 전달받았다. 홀로 옆방으로 이동한 김 대통령은 이병태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전군에 비상 경계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이어 대통령은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김 대통령은 "정부는 어떤 사태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국민을 보호할 대책을 마련해뒀으며 국민은 정부를 믿고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김 주석의 죽음으로 조문 논란도 거세게 일었다. 이는 조문 논쟁으로 이어졌다. 당시 남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북한 최고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해 조문해야 한다는 주장과 한국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에게 조문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의 대립이었다.



죽어서 썩지 못한 김일성의 최후



김일성 주석은 죽은 후에도 김씨 일가의 정권 유지를 위한 상징이 됐다. /사진=조선중앙TV
김 주석은 결국 죽고 나서 김씨 일가의 정권 유지를 위한 미라가 됐다. 북한은 김 주석의 시체를 방부 처리하고 금수산태양궁전(주석궁)에 안치했다. 이는 먼저 세상을 떠난 세계 각국의 공산주의자인 레닌, 마오쩌둥, 호치민과 같은 모습이다.

정권을 이어받은 김정일 국무위원장은 국가의 상징이던 자신의 아버지를 미라로 만들어 정권 유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죽은 아버지를 신격화해 김 주석의 권력이 자신에게 안정적으로 승계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스탈린도 마찬가지 행동을 보였다. 1924년 소련의 동치자였던 레닌이 사망했다. 레닌은 당초 죽으면 어머니 묘지 옆에 묻어달라고 밝혔지만 지지 기반이 취약했던 후계자 스탈린이 죽은 레닌의 후광을 이용하기 위해 미라로 만들었다.

김 주석의 사후 북한 경제는 급격하게 무너졌다. '고난의 행군'으로 불린 이 시기에 북한은 김 주석의 껍데기를 유지하는 것에만 매년 수억원의 돈을 쏟아부었다. 그러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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